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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수실기(野叟實記) 묘갈명



    남당회맹단 의병대장 채홍국장군 야수실기 게시 연재

    野 叟 實 記


    墓碣銘


    公諱弘國 字光輔 號野叟 系出平康 高麗門下侍郞 諡景平 諱松年 其鼻祖 高祖 諱忠敬 號槐亭 禮曹判書. 曾祖諱居亨 副司直 祖諱准進士軍資監叅奉 考諱致義司正 配淑夫人淸州韓氏 叅奉英器女 生公于嘉靖十三年甲午 公 忠孝根天 自幼事親以誠 鄕里咸稱其孝. 嘗自誦曰 爲人子者 事親不以孝 則非子也 爲人臣者 敬君不以忠 則非臣也. 及萬曆壬辰 倭奴入寇 時公年五十八 約前叅議高公敬命 赴錦山之役 及高公敗沒 列郡風靡 慨然收散卒以歸 先出家僮二十餘口 與其三子 及宗族三十三人 鄕隣同志高德鵬·曺益齡·金永年等 五十九人 倡起義旅 歃血同盟於興德南塘 公爲義旅將 其餘諸公 各隨才任職 又輪檄列邑 義旅來附者 日益惟衆 軍威益振 賊鋒挫退 六七隣邑 賴而得全 本官羅公惕 助給軍糧 權元帥 慄 遣書慰勉 以巡遠之責 於是 以義穀三百石 命長子命達 漕納于龍灣行在所 又聞賊犯順天 急奮旅追破於石堡 斬獲數十級 巡察使 以狀聞 宣廟嘉之 卽除僉中樞 又陞嘉善同樞 及丁酉 賊再侵掠 書檄同志 誓死國難. 書畧曰 國事之蒼黃

    倍加前日 驚愕之狀 一體吾心 其在臣子之道 寧安於宵旴之間哉. 與前日同志 合謀聚衆以當一面 終死於矢石之所 盡命酬國 豈菲大丈夫之高義乎云. 同聲嚮應者 倍加前日 乃伐賊於興德培風嶺 破追扶安胡峙 俄而賊衆大至 公素善射自朝至晡 射不停留 右手指 爲决弦所斷 復用左手 左指亦斷 公嘆 曰 吾不能爲國家除凶 惟死而已. 大呼掩擊 抱挾賊背 賊酋負劒而躓 刃及公胸 公遂絶. 享年六十四矣 公之子長仲 命達·慶達 赴救父急 俱遇害凶鋒 嗚呼 賊退 季子英達 與其長姪應蓍 收公屍 葬于扶安乾先祖家洞酉坐原 配貞夫人坡平尹氏合祔. 有三男二女 女適金守仁監察 次金觀吉. 長房命達 以扈聖功 官訓鍊副正 生一男應蓍 行誼敎官 壽僉中樞. 仲房慶達 以軍功官訓鍊院正 生三男萬蓍·仁蓍·遵蓍. 季房英達 官奉事 生四男一女 興蓍·雄蓍·仲蓍·有蓍 女金時俊. 應蓍生四男四女 長沆宣敎郞 次淹 次沰贈戶議 次澄. 女金時健別提 金萬鎰 金庄 丁有星 其餘蕃衍 不能盡記 惟我聖上卽位之九年壬申 公之九代孫泓覲 以公之忠孝卓節 啓達于朝 上特贈兵曹判書 賜祭 命旌 復戶. 噫 公自少養親接人 極其誠敬 當于國難 蹈刃不避 豈不偉哉 經曰 事親孝 故忠可移於君 眞公之謂歟. 因銘之曰 惟忠惟孝 烈士之膽 君子之風 龍蛇之變 首倡義旅 盟結死士 同一心膂 身冒刃鎗 爲國捐躬 日月爭光 炳然丹忠 瞻彼遺壠 松栢丸丸 千載聞風 懦夫勵志.

    崇禎紀元後五乙酉 輔國崇祿大夫原任吏曺判書兼知 經筵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經筵日講官 陽川 許傅 謹撰

     

     

     

    묘갈명(墓碣銘)

     

    ()의 휘는 홍국(弘國)이고 자는 광보(光輔)이고 호는 야수(野叟)이니, 계통(系統)은 평강(平康)에서 나왔다. 고려 문하시랑(門下侍郞)를 지내시고 시호(諡號)가 경평(景平)이신 휘 송년(松年)은 그 시조(始祖)이시고, 고조(高祖)의 휘는 충경(忠敬)이시니, ()가 괴정(槐亭)이며, 벼슬은 예조판서(禮曹判書)이시다. 증조(曾祖)는 휘는 거형(居亨)이시고 부사직(副司直)을 하셨다. 할아버지의 휘는 준()이며 진사(進士)로 벼슬이 군자감 참봉(軍資監叅奉)이시다.

    아버지는 휘가 치의(致義)이시며 사정(司正)을 지내셨다. 배위(配位) 숙부인(淑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참봉(叅奉) 영기(英器)의 따님으로, 공을 가정(嘉靖) 13년 갑오(甲午, 1534)에 낳으셨다.

    공의 충효(忠孝)는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라, 어려서부터 어버이 섬기기를 정성껏 하여, 향리(鄕里)에서 모두 그 효()를 칭찬하였다. 스스로 입버릇처럼 말씀하기를,

    사람의 자식 된 자가 효성(孝誠)으로 어버이를 섬기지 못하면 아들이 아니며 사람의 신하(臣下)된 자가 임금 섬기기를 충성(忠誠)으로 하지 못하면 신하가 아니다.라고 하셨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에 왜놈들이 쳐들어왔는데 당시 공의 나이 58세였다. 전 참의 고경명(高敬命) 공과 언약(言約)하고 금산(錦山) 싸움에 갔는데, 고공(高公)이 패몰(敗沒)하자, 열군(列郡)이 바람에 풀잎 쓰러지듯 하였다. 슬퍼하며 흩어진 군졸(軍卒)을 수습(收拾)하여 돌아왔다. 먼저 가동(家僮) 20여 명을 내고, 그의 세 아들과 종족(宗族) 33 (), 고향의 이웃 동지(同志) 고덕봉(高德鵬조익령(曺益齡김영년(金永年) 59 ()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피를 마시고 흥덕(興德) 남당(南塘)에서 동맹(同盟)하여, 공이 의려장(義旅將)이 되고, 그 나머지 제공(諸公)도 각각 재주에 따라 직책(職責)을 맡았다. 또 격문(檄文)을 열읍(列邑)에 돌려, 의려(義旅)에 와서 참가(參加)하는 자가 날이 갈수록 많아져서 군대의 위엄(威嚴)이 더욱 떨쳤다. 적봉(賊鋒)이 기()가 꺾여서 물러나니, 67 이웃 고을이 그 덕택으로 온전할 수가 있었다.

    본관(本官) 나척(羅惕) 공이 병량(兵糧)을 조급(助給)하였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공이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장순(張巡허원(許遠)의 책임(責任)이 있다고 하며 면려(勉勵)하였다.

    이때, 의곡(義穀) 삼백석(三百石)을 큰아들 명달(命達)에게 명하여 용만(龍灣) 행재소(行在所)로 조운(漕運)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또 왜적이 순천(順天)을 침범(侵犯)한다는 말을 듣고, 급히 군려(軍旅)를 떨쳐 일어나게 하여 왜적을 추격(追擊)하고 석보(石堡)에서 격파(擊破)하였다. ()하거나 사로잡은 것이 수십급(數十級)이나 되었다. 순찰사(巡察使)가 장계(狀啓)로 알려, 선조대왕이 이를 가상(嘉尙)하다 하여 곧 첨중추(僉中樞)에 제수(除授)하였고 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올렸다.

    정유년에 이르러, 왜적이 다시 침략(侵略)하니, 격문(檄文)을 동지(同志)에게 써 보내, 국난(國難)에 죽기를 맹서(盟誓)하였다. 편지에 쓰기를,

    나라 일의 허둥대는 것은 전일(前日)의 경악(驚愕)한 모습보다 배()나 더하다. 내 마음과 일체(一體)라면, 그 신자(臣子)의 도리(道理)에 있어서 어찌 조석(朝夕) 사이에 편안할 수가 있겠는가? 전일(前日)의 동지(同志)들과 함께 군대(軍隊) 모집(募集)하기를 도모하여, 하나의 방면(方面)을 담당하고, 끝내 시석(矢石)이 쏟아지는 곳에서 죽어, 목숨이 다하도록 나라에 보답한다면 어찌 대장부의 높은 의기(義氣)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소리에 응낙(應諾)한 자가 전일(前日)보다 배()나 더 많았다.

    곧 흥덕(興德)의 배풍령(排風嶺)에서 왜적을 토벌(討伐)하였고, 부안(扶安) 호치(胡峙)에서 왜적을 추격(追擊)하여 격파(擊破)하였다.

    갑자기 외적의 무리가 크게 몰려 왔다. 공은 원래 활을 잘 쏘아,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쉬지 않고 쏘니, 오른손 손가락이 활시위를 당기기에 끊어졌고, 다시 왼손으로 활을 당겨 왼 손가락도 또 끊어졌다. 공은 한탄하고 말씀하기를,

    내 국가(國家)를 위하여 흉악한 놈들을 제거(除去)하지 못하니, 오직 죽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크게 부르짖고 엄격(掩擊)하여, 왜적의 등을 껴안으니, 왜추(倭酋, 왜놈 우두머리, 倭將)는 검()을 지고 넘어졌는데 칼날이 공의 가슴에 미쳤다. 공은 드디어 절명(絶命)하였다. 향년(享年)64세이시다.

    공의 아들 맏이와 둘째 명달(命達경달(慶達)이 급히 가서 아버지의 위급(危急)함을 구하려고 하다가 다 함께 흉봉(凶鋒)의 해()를 입었다.

    아아, 왜적이 물러간 뒤, 막내아들 영달(英達)과 그 장질(長姪) 응시(應蓍)가 공의 시체(屍體)를 거두어 부안 건선면 조가동 유좌(扶安乾先面朝家洞酉坐)의 언덕에 장사(葬事)하고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를 합장(合葬)하였다.

    32녀를 두셨으니, 맏딸은 감찰(監察) 김수인(金守仁)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김관길(金觀吉)이다.

     

    장방(長房)인 명달(命達)은 임금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벼슬이 훈련부정(訓鍊副正)이다. 외아들 응시(應蓍)를 낳았으니 행의(行誼, 여기서는, 隱逸·學德·孝行 등과 같이 推薦으로 任官하는 하나의 德目(制度)를 말한다.)’로 추천(推薦)을 받아 교관(敎官)을 지냈고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除授)되었다.

     

    중방(仲房)인 경달(慶達)은 군공(軍功)으로 벼슬이 훈련원정(訓鍊院正)이니 세 아들 만시(萬蓍인시(仁蓍준시(遵施)를 낳았다.

     

    계방(季房)인 영달(英達)은 벼슬이 봉사(奉事)이니 41녀를 낳았다. 아들은 흥시(興蓍웅시(雄蓍중시(仲蓍유시(有蓍)이고 딸은 김시준(金時俊)이다.

     

    응시(應蓍)44녀를 낳았는데, 맏이 항()은 선교랑(宣敎郞)이고 다음은 엄()이고 다음 탁()은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고 다음은 징()이다. 딸 김시건(金時健)은 별제(別提)이고 김만일(金萬鎰)이고 김장(金庄)이고 정유성(丁有星)이다. 그 나머지는 번연(蕃衍)하여 다 기록하지 못한다.

     

    우리 임금님(고종황제)이 즉위(卽位)하신지 9년 임신(壬申, 1872), 공의 9대손 홍관(泓覲)이 공의 충효(忠孝)가 탁절(卓絶)함을 조정(朝廷)에 계달(啓達)하니, ()께서 특별히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하고 사제(賜祭)하고 정려(旌閭)를 명하고 복호(復戶)하여 주셨다.

    아아, 공은 어려서부터 부모 봉양(奉養)과 사람대접이 극히 정성스럽고 공경하였으며, 국난(國難)을 당하여 칼날 밟기를 피하지 않았으니, 어찌 위대(偉大)하지 아니한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어버이 섬기기를 효()로써 하기 때문에 충성(忠誠)을 임금에게 옮겨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공()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인하여 명()하여 이르기를, 오직 충신이요 오직 효자이며,

    열사(烈士)의 간담(肝膽)이요 군자(君子)의 풍의(風儀)로다.

    용사(龍蛇)의 변란(變亂)에 먼저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죽음으로 동맹을 맺은 선비, 하나같은 마음으로 힘쓰도다.

    몸은 도창(刀槍)을 무릅쓰고 나라 위해 목숨을 버렸으니,

    일월(日月)과 빛을 다투며 붉은 충성(忠誠)이 밝게 빛나도다.

    저 남겨주신 언덕을 보라! 송백(松栢)이 환환(丸丸)하니,

    천년(千年) 내려가며 바람소리 듣고,

    나약한 사람은 뜻을 힘쓸지어다.

    숭정(崇禎) 기원후 다섯 번째 을유년(乙酉年1885),

     

    보국숭록대부 원임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경연일강관(輔國崇祿大夫原任吏曺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經筵日講官) 양천(陽川) 허부(許傅)가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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