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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당회맹단
  • 우리 역사의 귀중한 자산으로 영원히 전승되는 남당회맹단 창의92열사 모충사 시제가 되도록 혼신전력 하겠습니다.
    임진년 누란의 위기에 혈맹창의 순국하신 충의대절(忠義大節) 92열사와 300의병 모충사 시제(慕忠祠時祭)
      • 남당회맹단 (南塘會盟壇)과 모충사(慕忠祠)
      • 전라북도 고창군 용반리(남당리)에 있는 남당회맹단과 모충사 전경,
        왼쪽 봉분이 회맹단이며, 오른쪽 사우(祠宇)가 모충사
      • 남당회맹단은
      • 혈맹단이라고도 하며,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채홍국(蔡弘國) 등 전라북도 고창•부안 지역 300여 명의 선비와 양민들이 구국의 기치로 의병을 창의하면서 삽혈 동맹을 하고 쌓은 맹단이다. 채홍국, 고덕붕(高德鵬), 조익령(曺益齡), 김영년 (金永年) 등이 격문을 돌려 창의(倡義)하니 300여 명의 의병이 모여, 단(壇)을 쌓은 뒤 백마(白馬)의 피를 마시며 다섯 가지의 맹약을 내걸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혈맹(血盟) 하였다. 의병장 채홍국이 다음과 같이 역설하니 모두가 이에 동의하고 맹서를 하였다고 전한다.
      • 터럭과 신체(身體)는 모두 이것이 부모가 주신 것이며, 지금 우리 임금님은 바로 부모이니, 부모의 위급(危急)에 당하여, 그 사람의 자식 된 자가 부모의 위급에 달려갈 때, 어찌 부모의 터럭과 신체를 아까워할 것인가, 여기에 삼강오륜 (三綱五倫)이 있으니 이것을 알고 행할 것이다.
        국난(國難)을 만나서, 죽으면 함께 죽고, 살면 함께 의지할 것이니, 이것을 알고 행할 것이다.
        군량(軍糧) 4 백석은 전량도감(典粮都監)에게 맡겨, 하루 한 되 이외에 다시는 더 지급하지 못한다. 이것을 알고 행할 것이다.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쟁(錚, 꽹과리) 치는 것으로 퇴군(退軍)하고, 북 치는 것으로 진군(進軍)한다 하였으나, 오직 우리 진법(陣法)은 쟁(錚) 소리로 진군하고, 북소리로 퇴군하며, 동(東)은 한 번씩 치고 서(西)는 세 번씩 친다. 이것을 알고 행할 것이다.
        여러 사람 가운데, 더러 맹약(盟約)을 배반(背叛)하는 자가 있으면, 역적(逆賊)의 이름으로 이를 참(斬)한다. 이것을 알고 행할 것이다.
      • 1963년 신상우(申祥雨) 군수가 “임진창의남당회맹단기적비”(壬辰倡義南塘會盟壇紀蹟碑)를 단상에 세울 때 좌대 작업 중 이척하(二尺下, 약 88cm)의 장검(長劍) 다섯자루, 투구끈, 청색구슬 반 되 가량, 45되들이 반흑색주기(半黑色酒器) 토기(土器), 화살촉 1되가량이 채홍국의병장의 유물(遺物)로 추정(推定)되는 물품이 출토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유물은 국립전주박물관(당시 전주박물관설립위원회)에서 보관하고 있다. 1964년에 의병장 채홍국의 12대손 채병묵(蔡秉默) 등 고창 군민들이 뜻을 모아 현재의 기적비(紀績碑)를 새로 세웠다.
      • 남당회맹단의 영어음역은 Namdang Hoemaengdan이며, 영어 의미역은 Namdang Hill Foundation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460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별칭으로는 혈맹단 또는 술무덤이라고도 한다. 현재 남당회맹단은 2004년 6월 8일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었다.
      • 모충사(慕忠祠)
      • 남당회맹단 바로 옆에 위치한 사당으로 채홍국(蔡弘國), 고덕붕(高德鵬), 김영년(金永年), 채명달(蔡命達), 채경달(蔡慶達) 등 임진창의92의사를 모신 사우(祠宇)이며, 남당회맹단 바로 옆에 있다.
        고종9년(1872)에 남당회맹단 의병대장 채홍국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되고 제문(祭文)을 하사(下賜)하고, 정려(旌閭,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을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를 명하고, 복호(復戶)하였으며, 일제강점기인 1924년 의병장 채홍국을 고창군 흥덕면 하남리 행정(杏亭)에 단향(壇享)으로 모시다가 1985년 신사범(愼思範), 남대희(南大熙), 채규섭(蔡奎燮) 주선으로 고창군수 이윤갑(李允甲)의 지원과 국도비, 평강채씨문중 지원 등으로 회맹단옆 현지 남당리(南塘里)에 대규모로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채홍국의병장과 고덕붕맹주장을 주벽(主壁)으로, 조익령 (曺益齡), 김영년(金永年), 한계상(韓繼常), 채명달(蔡命達), 채경달(蔡慶達), 채영달(蔡英達)을 좌우로 배향하고 동의사(同義士) 121위(位)가 동서(東西) 벽으로 종향되어있다. 행사일(享祀日)은 음력 9월 25일이다.
        • 모충사 전경, 우측 건물이 모충사 사당으로 3칸 맞배지붕으로 건축, 남당회맹단
          순절의 신위는 모충사에 동서로 종향되어 있다
        • 모충사 시제 봉양하고 있는 제관
           
      • 모충사의 영어음역은 Mochungsa, 영어 의미역은 Mochungsa Shrine, 맞배지붕 및 겹처마 정면 3칸 건물로 사당앞에는 묘정비가 있다. 평강채씨(平康蔡 氏) 야수공 채홍국 종중이 관리하고 있으며 제사일은 음력 9월 25일이다.
    • 의병장 채홍국(1534~1597년)과 임진창의92의사(壬辰倡義92義士)
    • 채홍국(蔡弘國)의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광보(光輔), 호는 야수(野叟). 고려 시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경평공(景平公) 채송년(蔡松年)의 후손으로, 예조판서를 역임한 채충경(蔡忠敬)의 현손(玄孫)이다. 아버지는 채치의(蔡致義)이다.

      채홍국은 임진왜란(1592년)이 발생하자 남당부락에서 회맹을 맺고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으로 이때 회맹에 참여했던 충의지사를 임진창의92의사라 한다. 회맹에 참여한 의병은 선비 외에도 평민도 참여하여 300여명이었으나 평민은 가동(家僮)으로 기록되어있어 "임진창의92의사"는 회맹에 참여한 92명의 선비를 지칭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채홍국(蔡弘國)은 1534년(중종 29)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나 장성한 후에 고창군 흥덕면 남당촌으로 이주했다. 천성이 너그럽고 강직했으며 정성을 다해 어버이를 섬기니 고을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의 대가(大駕)가 용만(龍灣. 지금의 신의주)로 피난을 하자, 채홍국은 김천일(金千鎰)과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으로 갔다. 전라도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고경명이 금산에서 왜적의 진격을 맞이하여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자 채홍국은 고향인고창군 흥덕면으로 돌아와 고덕붕, 조익령, 김영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 20여 명의 가동(家僮)과 세 아들 채명달(蔡命達)·채경달(蔡慶達)·채영달(蔡英達)을 거느리고 군량미 13석, 병철(兵鐵) 115근을 가지고, 채우령(蔡禹齡)을 비롯한 종족 30여 명 및 마을 사람 60여 명 등과 함께 흥덕 남당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싸울 것을 맹세하며 각자 피를 나누어 마시는 이른바 ‘삽혈동맹(歃血同盟)’을 맺고 의려장(義旅將)이 되었다. 이에 본관 수령 나척(羅惕)이 이들에게 군량을 조달해 주었으며, 수원에 있던 도원수 권율(權慄)도 그에게 글을 보내 격려하였다.

      또한 군량 400석을 모아 200석은 기효증(奇孝曾)을 시켜 용만(신의주) 행재소(行在所, 임금의 어가가 있는 곳)에 보내고, 100석은 경상도 곽재우(郭再祐)군중(軍中)에 보냈다. 왜적이 순천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채홍국은 급히 의병을 거느리고 순천 석보(石堡)에 이르러 적을 대파하여 적병 수십 명을 참살(斬殺)했다. 당시 사람들이 격전지였던 이 고개를 둔월치(屯越峙)라 불렀다. 순찰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자 선조가 특별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하고 다시 가선대부 동치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로 승격시켰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동지들에게 격문을 보내 뜻을 같이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전일에 숙맹(宿盟)을 했던 92명의 동지 외에도 30명이 합세했고, 의승(義僧) 5명도 가담했으며, 멀리 영암과 해남 등지에서도 달려와 가세했다. 흥덕 배풍산 흥덕읍성(興德邑城)에서 왜적을 맞아 2일간 전투끝에부안군 상서면 상량치(호벌치 또는 유정자재)까지 격퇴(擊退)하였으나 상량치에 많은 왜적이 대기잠복(待機潛伏)하고 있었다. 40여일간의 전투끝에 수백의 적을 사살하고 의병(義兵) 119명이 순국전사(殉國戰死)하였다. 부안 호벌치(胡伐峙)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여 누차 승리를 거두었으나 적들이 개미떼같이 달려들자, 이른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활쏘기를 계속했다. 이윽고 화살이 다 떨어졌는데 적병이 단검을 가지고 돌진해 오자, 채홍국은 맨손으로 대적하여 적병을 뒤에서 부둥켜안았으나 적의 칼날이 그의 가슴에 꽂혔다. 아들 채경달이 이 위급한 사정을 보고 달려와 지원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결국 채홍국의 두 아들 채명달, 채경달까지 모두 전사하였다.

      지사(知事) 유발(柳潑)이 행장(行狀)을 짓고, 판관(判官) 정범조(丁範祖)가 비문을 지었다. 1872년(고종9년)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증직되었으며, 사제(賜祭)하고 복호(復戶)[충신·효자·열부 등에게 노역과 전세(田稅) 이외의 잡부금을 면제하던 일]되었다.
  • 임진창의92의사(壬辰倡義92義士)
  • 임진창의92의사는 의병장 채홍국, 고덕붕, 조익령, 김영년 등 남당회맹단에 참여한 충의대절(忠義大節)을 가리키는데, 고종9년 의병장 채홍국이 병조판서로추증되면서 함께 향사(享祀)된 선비 등을 지칭한다. 남당회맹에 참여했던 채홍국 의병은 300~500여명으로, 양반을 제외한 평민과 노비 등은 가동(家僮)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의 정치사회체제를 고려할 때 평민과 천민 노비 등을 제외하고 양반계층만을 인정한 것은 당연하겠다. 그러나 오늘날 남당회맹단 채홍국의병이 가진 의의 중 하나는 양반·평민·노비·천민 등이 왜란을 맞이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함께 창의순절(倡義殉節)한 것으로, 남당회맹단 채홍국의병의 충의순절(忠義殉節)을 <임진창의92의사>, 즉 92명의 양반만의 것으로 기술(記述)하는 것은 부족함이 있다. 그럼에도 임진·정유년 왜란 직후에는 묻혀 있다가 300여년이 지난 1872년(고종9년)에 이르러서야 <임진창의92의사>라는 명칭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는 점에서 <임진창의92의사>는 92명의 양반만이 아니라 <남당회맹단 채홍국의병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해한 것이 타당하겠다.

  • 흥성창의비각

    창의비각 내 현수되어있는 임진창의92의사 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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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병소제임록(義兵所諸任錄)의 임진창의92의사 제위(祭位)
  • <야수실기>중 의병소제임록(義兵所諸任錄)에는 임진창의92의사의 제위가 기록되어있다. 의병소제임록(義兵所諸任錄)은 임진창의92의사 중 한 명인 김영년(金永年)의겁암록(怯力 巖錄)에 있는 것으로 김영년(金永年)의 7대손 지수(之粹)가 소장하였던 원본에 의거하여 의병장 채홍국의 10대손 채영진이 <야수실기>를 편찬•간행할 때 실기에 수록되었다.
    • 의려장(義旅將) : 첨중추(義兵將僉中樞) 채홍국(蔡弘國)
      맹주장(盟主將) : 고덕봉(高德鳳), 이대준(李大俊)
      참모관(參謀官) :
      이대영(李大榮), 조익령(曺益齡), 현감(縣監) 채우령(蔡禹齡)
      군기도감(軍器都監) : 현령(縣令) 김경덕(金景德), 채홍조(蔡弘祖),
      전량도감(典粮都監) : 이민복(李敏復), 이 번(李 蕃), 김수인(金守仁)
      조군향사도감(調軍餉士都監) : 김영년(金永年)
      부 감(副 監) : 임 기(林 機), 채명달(蔡命達)
      점정도감(點丁都監) : 김영무(金英武)
      부 점(副 點) : 임대수(林大樹), 오몽서(吳夢瑞), 이시화(李時華)
      돌격장(突擊將) : 채경달(蔡慶達), 윤흥은(尹興殷)
      부격장(副擊將) : 최언심(崔彦深)
      선 봉(先 鋒) : 오봉수(吳封壽), 현감(縣監) 주번길(朱蕃吉)
      부 봉(副 鋒) : 김경장(金景章)
      쟁고관(錚鼓官) : 박영동(朴榮東), 채대향(蔡大享), 채중달(蔡仲達)
      서사도감(書寫都監) : 채 상(蔡 償)
      부 사(副 寫) : 이민덕(李敏德)
      수화관(水火官) : 채대림(蔡大臨), 나기인(羅起寅), 최유정(崔有靑), 김응태(金應兌)
      조련도감(調鍊都監) : 채 봉(蔡 鳳)
    • 부 감(副 監) :
      오송수(吳松壽), 임 추(林 樞), 김상추(金尙秋), 이민부(李敏敷)
      습사도감(習射都監) : 배수의(裵守義)
      부 사(副 射) : 윤흥수(尹興壽), 채영달(蔡永達), 이 탁(李 綽), 이성춘(李成春), 조익수(曺益壽), 탁 상(卓 祥)
      종사관(從士官) : 채덕량(蔡德良), 김방필(金邦弼), 임세무(林世茂), 임대일(林大一), 나기종(羅起宗), 채치원(蔡致元), 전시춘(田始春)
      시포도감(矢炮都監) : 김 헌(金 王憲), 임계원(任啓元), 김이진(金以振), 박치덕(朴致德), 오필수(吳弼壽), 강재팔(姜載八)
      좌대관(左隊官) : 채 구(蔡 球), 채대원(蔡大元), 황득중(黃得中), 허 섭(許 燮) 김상동(金尙東), 채홍업(蔡弘業), 전시추(田始秋), 채홍우(蔡弘宇), 이인영(李寅永), 채영달(蔡永達)
      우대관(右隊官) : 이번위(李蕃衛),채영(蔡 英), 채인달(蔡寅達), 임세장(林世章)
      채 곤(蔡 琨), 채이달(蔡利達), 김이명(金以鳴), 채 장(蔡 璋),
      채홍무(蔡弘武), 이인발(李寅發)
      전초장(前哨將) : 박경덕(朴慶德), 채 침(蔡 琛), 김대진(金大振), 이득춘(李得春) 허득천(許得天)
      후초장(後哨將) : 채인달(蔡仁達), 김홍녕(金弘寧), 정대열(丁大悅), 채홍서(蔡弘緖) 최명동(崔鳴東),
      감포관(監浦官) : 이익성(李益盛)
      부 감(副 監) : 김 영(金 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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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맹주장(盟主將) 고덕붕(高德鵬, 1552~1626년)
  •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남익(南翊), 호는 여곡(麗谷). 아버지는 참봉 고응진(高應軫)이다. 1552년(명종7년)에 고창군 신림면[현 흥덕면 제하리] 고려곡(高麗谷)에서 출생하였다. 고덕붕(高德鵬)은 41세 때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 격문을 작성하여 동지를 규합한 뒤 의병장 족형(族兄) 고경명(高敬命) 진영이 있는 금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때 고경명은 금산전투에서 왜군진격에 맞서 싸우다가 순절한 뒤여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채홍국(蔡弘國) 등과 고창군 흥덕면을 중심으로 일어난 92명의 창의 동맹 일원으로 가담하여 남당고개에서 피를 나누어 마시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다짐한 이른바 ‘삽혈동맹(歃血同盟)’을 맺고 의병소를 차릴 때 맹주장(盟主將)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고덕붕은 의병들을 거느리고 담양, 곡성, 순천의 쌍암·주암, 남원, 순창의 적벽강으로 옮겨 싸우면서 11월 18일에 개선하였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당의 회맹단(會盟壇)에서 다시 봉기하여 흥덕 배풍산까지 쳐들어 온 왜군을 맞아 줄포의 장등(長嶝)까지 적을 몰아내었다. 이후 남당회맹단 임진창의의사는 이후 부안 호벌치(胡伐峙) 전투에서 대부분 순절하고 말았으나 다행히 고덕붕은 살아남았다가 1626년(인조 4년) 향년 75세로 죽었다. 고종(高宗) 30년 1893년 승정원좌승지 (承政院左承旨)로 증직되었다.

    의병을 인솔하여 왜적을 격퇴하고 적을 잡아 죽이지 않고 석방을 유인하는 책략을 역이용하여 크게 이겨 순천까지 적을 추격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적이 다시 침범하자 맹주장으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라북도 부안 호벌치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1893년(고종 30) 승정원좌승지를 증직 되었으며, 유림의 추천으로 남당회맹단 모충사(慕忠祠)에서 향사되고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에 묘소가 있으며,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에는 고덕붕을 모시고 있는 사우(祠宇, 사당)인 옥제사(玉堤祠)가 있다. 옥제사는 순조 29년(1829)에 건립되었다가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15년에 옛 사당지에 壇을 설치하고 제사지내 오다가 1958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로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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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년(金永年, 1545~1597년)
  • 자는 경로(敬老)이며 호는 겁암(怯力庵)이다.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며, 현감 김현석(金玄錫)의 증손(曾孫)이다. 1545년(명종1년)에 충북 옥천(沃川)에서 태어났다. 김영년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채홍국(蔡弘國), 고덕붕(高德鵬), 조익령(趙益齡), 이대준(李大俊), 그의 장자 김헌(金攇) 등과 더불어 흥덕(興德) 남당(南塘)에서 삽혈동맹(歃血同盟)을 맺은 임진창의92의사 중 한 분으로 조군향사도감(調軍餉士都監)의 직책을 맡았다. 7세에 “月色微臣像 日光聖主心(달빛은 신하의 모습이요, 햇빛은 높으신 임금의 마음이라)”라는 경인구(驚人口)를 지을 정도로 시작(詩作)에 기재(奇才)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12세에 이미 6경(6經)을 통독하였고 예절이 밝아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으나 그의 선조인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가 가담한 단종복위(端宗復位)거사의 화가 두려워 14세 때에 전라도로 피신하였다가 부안의 변산 낙수암(落水巖), 지금의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 수락동, 수락폭포 주변으로 추정) 아래에 모옥(茅屋) 짓고 산수를 벗하며, 이름도 필선(弼善)이라 바꾸고 숨어 살았다. 의병장 채홍국이 지은 야수실기에는 김필선으로 기록되어있다.

    1592년 남당회맹에 가담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앞의 임진창의92의사 외에 33인이 추가하여 정유갱창동맹(丁酉更倡同盟)을 맺고 왜적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향군도감(餉軍都監)을 맡았다. 왜적이 부안의 호벌치로 쳐들어오자 김영년은 적진 깊숙이 들어가 종횡무진, 좌충우돌로 혈전을 벌였으나 적의 부장 阿伊大의 칼에 맞아 순절했다. 이때 적병이 그의 코를 베어가는 것을 그의 장남 김헌과 노복 옥천금은 고덕붕(高德鳳), 임계지(任啓之), 오송수(吳松樹), 채위(蔡瑋) 등과 함께 김영년의 시신을 안고 적병을 추격하여 왜병들과 적장을 붙잡아 저들의 배를 갈라 간을 씹어 원수를 갚았으나 그 자리에서 헌과 노복 옥천금도 적의 칼에 맞아 장렬히 순절하니 세인들이 三義門이라 칭하였다. 이들 부자를 장절단(壯節壇)에 배향하였으며, 왕산사(旺山祠)에는 김영년이 배향되었다. 남당회맹과 호벌치전투의 일기와 동맹록(同盟錄)인 『겁암일기(㤼庵日記)』, <임진창의겁암록>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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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벌치 전투(胡伏峙 戰鬪)
  • 유년 1597년(선조 30년)에 재침략을 감행한 왜군이 호남지방에 쳐들어왔을 때 도내 각처에서는 지역별 의병항쟁이 계속되었고, 고창군 흥덕(興德)과 부안 일원에서도 왜군과의 전투가 치열하였다.
    남당회맹단 채홍국 의병은 고부군 만일사(萬日寺) 주지를 중심으로 인근 사찰의 많은 승려들도 가담하여 수백명의 군세(軍勢)를 보강하여 흥덕의 배풍령(排風嶺)·장등원(長嶝院) 및 부안의 호벌치에서 왜적과 연이어 격전을 펼쳤다. 특히 약 1주간에 걸쳐 호벌치에서 계속된 전투에서 의병장 채홍국과 그의 아들 명달ㆍ경달 3부자, 조익령, 김영년ㆍ김헌 부자, 채홍조(蔡弘祖)ㆍ이탁(李卓)ㆍ승(僧) 만세(萬世), 김영(金榮)ㆍ채우령(蔡禹齡)ㆍ이시화(李始華)ㆍ 이익성(李益盛)ㆍ임추(林樞)ㆍ오몽서(吳夢瑞)ㆍ김귀복(金貴福) 등 남당회맹단 의병 대부분이 전사하는 일대 혈전이었다. 남당회맹단 채홍국의병은 호벌치전투에서 패전하였으나 왜적도 피해가 적지않아 정읍으로 퇴각하였다고 한다. 호벌치 전투는 향촌선비들과 농민·천민·승려계층이 하나로 결합, 최후까지 침략군인 왜적과 대항하여 싸운 의병항쟁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정유재란 호벌치전적지(丁酉再亂 胡伐峙戰蹟地)는 1964년 유정자(柳亭子)재에 세웠다가 이후 도로확장공사로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로 옮겨졌으며, 순절비(殉節碑)를 새로이 세우고 주변을 정화하고 석등(石燈)과 호상(虎像) 한 쌍을 세워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 지방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 호벌치전적지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있다.
  • 『의사 채홍국외 92명의 선비에 35명이 추가로 흥덕에서 왔으며 김홍원은 변산에서, 이유는 도화동에서, 유희방은 유정자에서 충성의 비분을 참지 못해 궐기하여 달려와 합세했지만 그 수는 천(千)이 못되어 수적으로 당하기 어려웠고 병기도 적과 같지 못하나 수십회에 걸친 싸움에서 혹은 크게 이기기도 하고 혹은 패하기도 하니 그 공이 또한 분명하게 드러남에 충분하였으며 천의 군사로 수만의 군사와 싸워 왜적이 서쪽으로 향함을 막아 호남과 영남을 지켰음은 누구의 힘이었겠는가.』
  • 민충사(愍忠社)
  • 부안군은 야외에서 진행되었던 호벌치 추모행사의 열악한 여건을 개선하기위해 사업비 7억원을 투입, 호벌치전적지에서 바라보이는 앞 터에 2009년 5월 민충사(愍忠社) 제각과 담장시설, 주차장 등을 완공하였다. 사당내에는 의병장 채홍국, 고덕붕, 조익령, 김영년 등 147위의 호벌치전투 충의대절(忠義大節)이 모셔져있다. 매년 5월에는 호벌치 추모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 호벌치순국영령 추모제
    • 민충사내 안치되어 있는 채흥국 의병대장 등 임진창의92의사 위패
  • 호벌치전적지의 코무덤
  • 호벌지전적지에는 전적비 바로 옆에 코무덤이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재란을 개전하면서 왜병 1명당 조선인 코 한되씩 베어오도록 명령했다. 왜적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왜병에게 조선인의 코를 베어오게 하였으며, 그렇게 벤 코를 2,000개씩 상자에 담고 소금에 절여 코를 가져오면 수량을 세고 심지어 감사장까지 발급해주기까지 했다. 이렇게 베어간 조선인의 코는 일본 교토의 히데요시 사찰에 있는 오륜탑(코무덤)에 안치되어있다.

    1984년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부산외대 일어과 김문길 교수는 일본 오카야마현 비젠시(備前市)에 또 다른 코무덤 천인비총(千人鼻塚)을 발견하였다. 이 무덤은 당시 비젠의 성주로서 임진왜란에 참가한 우키타 히데이(宇喜多秀家)가 베어간 코로 만든 무덤으로, 김문길 교수에게 이 사실을 접한 당시 자비사 박삼중 스님은 '임진왜란 비총 환국안장 추모사업 위원회'를 구성하고 일본 비젠시(備前市)와 교섭하여 이 코무덤을 한국으로 송환하는데 합의하였다. 이 코 유해는 1992년 11월 24일 현해탄을 건너와 부산 동래 자비사에 잠시 안치시켰다가 1993년 11월 26일 호벌치에 영면하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코영수증 등으로 추정하여 보면 왜적은 남원, 부안, 고창 등 전라도 전역에서 집중적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 정유재란과 왜적의 코 베어가기 그리고 전라도 의병
  • 임진왜란 후의 강화기간에 왜적은 부산, 가덕도, 안골포, 죽도, 울산 서생포 5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후 1597년 7월에 약 600여척 규모의 왜군 수군이 180여척 규모의 조선수군을 칠천량에서 일거에 궤멸시키면서 약 14만명의 왜적이 총진격하는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한양 점령을 위해 신속한 북상진격이 임진년 왜적의 주요전략이었다면 정유년에는 전라도를 확실하게 제압하는 것이 왜적의 목표였다. 이것은 왜적이 군량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조선군에게 식량보급을 원천봉쇄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조선수군이 칠천량전투에서 괴멸하자 전라지역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다. 왜적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전주성에 무혈입성한 후 다시 정읍으로 남하하여 부안·고창으로 진입, 호남을 유린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이 이렇게 오래 간 것은 전라도민의 조직적인 반항이 심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격하여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버려라. 충청도·경기도와 그 밖의 도에서는 알아서 평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여기에 왜적 1인당 조선인 코 1되를 베어오라고 명령한다. 히데요시는 전라도를 10년 이상 점령하면 조선정벌을 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왜적이 전라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코를 베어가는 만행을 저지른 것은 단순한 전리품 획득이 아니라 전라지역의 조선인을 완전히 몰살하고 왜군의 영구점령지로 만들려 했던 무자비한 전략이 숨어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현재 일본의 야마꾸찌(山口)현 문서 보관소, 아마기시의 아끼즈까 향토관,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등에는 ‘코 수 360개를 받아 코 수집관에게 인도하였음’, ‘죽인 사람의 코 10,040개를 확실히 인수하였음’ 이라 기록된 코영수증(鼻請取狀)이 전시되어있다.







    전라지역 조선인에 대한 왜적들의 무자비한 만행과 맞싸우며 조선과 조선인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의병장 채홍국과 고덕붕, 조익령, 김영년 등 남당회맹단 의병과 같은 장렬한 충의순절이 전라지역 곳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유재란 당시 전라지역의 의병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400여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미미한 상태이다. 남당회맹단 채홍국의병의 기록이 이어져 온 것은 후손인 평강채씨문중과 전라지역 유림의 각고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였다.



  • 정조임금과 호남절의록
  • 호남절의록
  • 전라지역 임진·정유 왜란 기간의 의병사는 200여년이 지난 1799년(정조 23년)에 의병대장 고경명의 7대손 고정헌이 편집 간행한 “호남절의록”
    에 의해 비로소 기록된다. 호남절의록은 5권 5책의 목판본으로 임진왜란, 갑자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무신란 시기에 의병과 충의지절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남당회맹단과 의병장 채홍국, 호벌치전투 등에 관한 내용도 수록되어있다. 다만 개요 수준의 기록이 어서 상세한 전황을 알 수는 없다.
    조선 정조임금은 한양을 근거로 하는 노론 정치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조정을 혁신하기 위해 지방에 근거가 있는 충의가문을 발굴하여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고자 하였다. 호남절의록 간행은 호남지역에 묻혀있는 충의가문을 발굴하여 그 후손을 조정에 들여오기 위한 사전기초사업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호남절의록과 더불어 영남인물고(1798년)를 간행하도록 하여 호남과 영남의 충의가문을 발굴하고자 하였다.
  • 야수실기(野叟實記)
  • <야수실기>는 남당회맹단 의병장 채홍국의 10세손 채진영(蔡秦永)이 1932년에 간행한 야수(野叟) 채홍국 실기(實記)이다. 채홍국 선생의 시문(詩文) 가운데 겨우 남아있는 것 약간편(若干篇)을 원편(原篇)으로 하고, 나라에서 천양(闡揚)한 전례(典禮) 문건(文件)과 유림(儒林)에서 공적(公的)으로 칭송(稱誦)한 문장(文章)을 부록으로 하여, 합쳐서 상하(上下) 한 질(秩)로 편찬되었다. 야수실기 간행시기가 1932년 일본제국주의 강점기였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데, 장택 고순진(高舜鎭)의 <야수실기> 간행 당시에 붙인 서문(序文)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 『아아, 지금 세상은 선생께서 살아 계시던 세상과는 차이가 있으니, 선생께서 오늘날에 살아계셔서 눈으로 오늘날의 일을 보신다면, 충분(忠憤)에 격동(激動)되어 반드시 몸소 나서서 근왕(勤王, 왕실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하실 뿐만이 아닐 것이니, 종묘·사직으로 하여금 회복(恢復)의 기회(機會)가 있고, 생령(生靈)들이 다시 소생(蘇生)할 희망(希望)이 있을 것인데, 구원(九原, 저승)의 길이 어려우니, 다시 슬퍼하는 것이다.』
  • 서문의 글귀를 미루어 짐작하건대 <야수실기> 간행은 단순한 평강채씨 선조 채홍국에 관한 기록을 위해서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야수실기>에는 많은 호남(湖南) 유림(儒林)의 서문과 발문, 천양의 글이 수록되어 있어 일본제국주의 강점기하에 <야수실기>를 간행한 것은 호남(湖南) 유림(儒林)이 구국(救國)의 염원(念願)을 담기위한 신고(辛苦)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漢字로 기록된 <야수실기>는 2010년 동방연서회 백곡 김대현(東方硏書會 白谷金大顯)선생의 천거로 낙원동 한문 번역 전문가인 김희동(金禧東) 선생이 현대문으로 완역하여 출간되었다.
  • 호남흥성창의비(湖南興城 倡義碑)
  •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채홍국(蔡弘國), 고덕붕(高德鵬), 김영년(金永年), 한계상(韓繼常) 등 92명의 의사(義士)가 흥덕면 남당마을에서 혈맹창의(血盟倡義)하여 왜적과 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도 많은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순절하자 그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고창군 흥덕면 동사리에 세운 창의비이다.
    1883년(순조32년)에 처음 세워졌다고 하는 문헌상의 기록이 있고 1938년에 일본제국주의 강점기에 창의비는 다시 세워졌으며, 1968년 글씨가 마멸되어 자획이 분별키 어렵다하여 다시 비(碑)를 세워 흥성창의비는 현재 3기가 세워져있다.

    당시 일본제국주의 치하의 강점기였음에도 1924년 남당회맹단 설단과 모충사 건립, 1932년 <야수실기> 간행, 1938년 흥성창의비 건립 등을 돌아보면 당시 호남의 사림(士林)이 남당회맹단 채홍국 의병이 왜적을 상대로한 충의대절을 사실 그대로 기록한 간행물을 발간하고, 누구나 볼 수 있게 비(碑)를 세워 창의기록을 새겨 놓았으니 당시의 士林의 강개한 의지가 결코 간단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흥성창의비는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동사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옆에는 배풍령(배풍산)이 있다. 배풍령은 남당회맹단 채홍국의병이 정유년에 왜적과 격전을 벌여 물리쳤던 곳이다. 1597 정유년에 왜적의 침탈했다는 급보에 출전, 영암과 해남의 의병과 합세하여 왜적을 격퇴시킨 곳으로, 호벌치전투의 시작인 배풍령승전지이다. 배풍령은 형상이 배가 복주(伏奏)[엎드려 사룀]한 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배풍산은 변산지맥의 끝자락이어서 고창·부안 안팍으로 드나드는 진입로이며, 격전지였던 배풍령 흥덕 읍성은 현재 토성의 흔적만 남아있다.

    호남흥성창의비의 영어음역 Honam Heungseong Changuibi이며 영어 의미역은 Memorial Monument for Righteous Army in Honam Heungseong이다. 창의비에는 남당회맹단 임진창의92의사 의 제위가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 역사고증과 사료연구는 진행중
  • 남당회맹단 채홍국의병에 관한 기록은 <야수실기>와 <호남절의록>, <승정원일기>, <겁암일기(㤼庵日記)>, <임진창의겁암록>, <고창읍지> 등에 기록되어있으나, 상세한 전황기록은 부족한 편이다. 그러나 이후 전라지역 사림(士林)의 신원추증 청원을 담은 疏와 이에 대한 승정원 교지 등 관아의 자료가 상당수 전해져 오고 있다. 또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모충사(慕忠社), 흥성창의비 등의 건립당시에 전라지역 사림(士林)의 제문, 남당회맹단에서 출토된 유물 등이 남당회맹단 채홍국의병의 역사적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야수실기> 중 호벌치순절일기(胡伐峙殉節日記)에는 호벌치전투가 1597년(정유년) 4월로 기술되어있는 데, 정유재란 당시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패전 후에야 왜적은 순천 남원의 육로와 서해 해로로 진격하여 전주성을 점령하였으며, 전라북도 고창•부안지역에는 1597년 8~9월 쯤에 침범하였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어서, <야수실기>에 기록된 호벌치전투 시점을 임진•정유 왜란의 역사적 사료와 비교하면 약 4개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는 <야수실기>가 정유재란(1597년)으로부터 335년이 지난 1932년에야 비로소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있을 수 있는 오류이다.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야수실기>에는 정유재란 당시 부안을 침범한 왜적이 바다로 들어와 줄포에 상륙하였기 때문에 남당회맹단 채홍국 의병은 갑작스런 왜적의 침략에 급히 진영을 이동해야했다는 기록이 있는 데,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당시 채홍국의병과 격전을 벌인 왜적은 조선수군의 칠천량해전 패전후 서해 해로를 따라 북상한 왜적의 일부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호벌치전투 발생 시점을 제외하면 <야수실기>의 기록은 당시 전황과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보면 호벌치전투 시점의 차이를 기록 오류로만 볼 수 없다.
    당시 임진•정유 왜란시기에 전라지역 전황(戰況)과 의병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너무나 빈약한 상태여서 그 너머에 있는 역사적 진실을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해야겠다. 현재의 임진•정유 왜란 역사기록은 <선조실록>과 <징비록>,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 편중되어 있어서 당시 양반, 평민, 천민, 노비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순절한 애끊는 역사의 상당부분은 사실상 묻혀져 있다. 그 예가 일본과 중국의 당시 기록에는 조선수군의 일대영웅으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정작 영화 <명량>에서는 죽음이 무서워 탈영한 도망병으로 나오는 <배설 장군>이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기록에는 조선수군의 일대영웅 (一代英雄)인 배설장군을 도망병으로 기술한 것은 다름 아닌 <난중일기>인데, 배설장군은 탈영병으로 참형되었다가 후에야 그의 무공이 인정되어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된다. 배설장군은 임진·정유년간의 왜란역사기술이 간단하지 않은 굴곡이 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호벌치전적지>는 일찍이 1976년에 전라북도 지방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음에도 남당회맹단은 2004년에 비로소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어 있어, 전라북도 문화유산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남당회맹단 채홍국의병에 대한 고증과 사료 연구는 물론 우리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알리는 노력이 더욱 더 필요한 상황이다.
  • 채홍국대대 명명식과 고창군청 남당회맹단 및 모충사 보수공사
  • 남당회맹단 채홍국의병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은 최근 수년 내의 일이다.특히 2014년 11월24일 35사단 105연대 2대대(고창대대)를 <채홍국대대>로 개칭하는 명명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듬해인 2015년 3월31일 채홍국대대 현판식이 있었다. 육군의 국민친화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남당회맹단 의병장 채홍국의 충의대절을 기리기 위하여 <채홍국대대>로 개칭하게 되었다. 또한 2016년 8월에는 고창군청(군수 박우정)이 남당회맹단과 모충사에 대한 기반시설 보수공사를 완료하였다. 2016년 9월23일 고창군청은 지역주민에게 회맹단 시설보수사업 완료 설명회를 개최하였는 데, 고창군청 박우정 군수는 남당회맹단과 모충사 복원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물론 고창군청이 넉넉한 살림이 아님을 고려할 때 중앙정부와 전라북도청의 예산지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남당회맹단 채홍국의병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홍보는 물론 우리 역사를 아끼는 국민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