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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당회맹단 의병대장 채홍국장군 야수실기 게시 연재

    野 叟 實 記


    野叟實記 卷之三

     

    家狀


    贈資憲大夫兵曺判書行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府君 諱弘國 字光輔 號野叟 姓蔡氏 本平康 鼻祖高麗太師門下侍郞平章事 諱松年 諡景平 曰諱華 中書侍郞平章事 曰諱謨 中書侍郞平章事 諡寬慎 曰諱宗瑞 僉議政堂知密直判事上護軍 曰諱文弼 典理判書兼集賢殿大提學 至左右衛保勝中郞將 曰諱琇 麗運告訖 耻事二朝 杜門屛蹟 歎吟麥穗之詩 乃南下遯居于扶安 及我朝 曰諱忠敬 官禮曹判書 號槐亭 配貞敬夫人扶安金氏 京兆尹諱世英之女 及其乞退 築亭於所居址 扶安縣槐池上 日以講道修養 定()朝革邑之時 以屯田千畝 請換亭閣之基 乃曰 何必屯田 一槐池足矣云 寔府君之高祖考也. 曾祖諱居亨 忠武衛副司直 配淑夫人羅氏 牧使諱天敬女 祖諱准 號西亭生員 除軍資監叅奉 隱德不就. 考諱致義 建功將軍龍驤衛副司直 配淑夫人淸道金氏 叅奉諱千華女 嘉靖十三年甲午生府君于扶安本第 旣長 移居于興德南里 娶坡平尹氏 叅奉諱畢之女 有三男二女 長命達 娶水原白主簿千玉女 仲慶達 娶保安林某女. 季英達 娶主簿長澤高夢得女 女適金監察守仁 金觀吉. 府君 自髫齡 天性忠厚慷慨 雄略兼備 每接鄕黨朋友 以爲人生世間爲人子 而不能以孝事親非子職也 爲人臣而不能以忠事君 非臣職也 吾旣不得立身 則匡國事君 之道 固無所施 家有兩親 當盡子道而己 定省之節 甘旨之供 未嘗不至 及丁內外艱 哀毁踰節 幾至滅性 鄕黨咸稱出天之孝焉 三子皆有膂力善射 而一日從容侍坐 慨然謂曰 乃爺生長村巷 居然五十之間 尙未遂爲國效忠之願 汝輩此心無負所戒也 是府君生平講磨忠義之德 於斯可見矣. 時値萬曆壬辰 島夷猖獗 不滿二旬 犯陷都城 大駕西幸 於是 府君與金健齋·高霽峯同謀擧義 及赴錦山 霽峯公奄殉 列郡瓦解 湖南一帶 幾爲賊窟 乃慨然奮發 收散以歸 先出家僮二十餘口 與其三子及宗族三十三人 鄕隣同志六十餘員 歃血同盟於興德南塘 府君 爲義旅將 其餘諸公 各隨才任職 誓于衆曰 髮毛身體 皆是父母之遺 今我聖上卽父母也 當父母之危 爲其人子者 豈惜髮毛身體哉 玆在三綱五倫 又曰 臨于國難 死則同歸 生則同寄 若有叛盟者 以逆斬之 知此以行云 復草檄輪示列邑 不日之內 應募勇丁 乃至三百餘人矣 傾出家貲 一邊造辦兵器 一邊補充兵糧 仍作隊留陣于長嶝之原 鍊兵多日 軍威益振 賊兵不敢近於六七隣邑之境 聞風來附者 日日陸續 時本官羅公惕 助給兵糧 以勞軍務 都元帥權公慄 在水原 又遣書慰勉曰 張巡·許遠之責 不在於諸君子乎云. 乃寄檄法聖鎭 出兵糧四百石 百石 送于嶺南郭再佑義兵所 三百石 屬義穀將奇孝曾 同長子命達 漕納于龍灣 宣廟嘉之 除命達訓鍊院副正. 於是 聞賊犯順天 卽奮旅追擊 喩以忠義 鼓動三軍 所過里閭 或以蕈食 或以牛酒 爭迎勞軍 願附者亦多 乃破賊於順天石堡 斬獲數十級 到赤城江 吟韻一絶以敘忠憤之情 詩曰 山勢開新面 江流作古聲 妖氣驚黑月 義氣糾精兵 乃屯軍越嶺 時人名其峙曰屯越峙 時巡察使 以功啓聞于朝 宣廟嘉之 擢除僉中樞 又陞嘉善同樞 次子慶達 亦以軍功 除訓鍊院正 及至丁酉 書檄同志 更奮擧義 誓死國難 書畧曰 近者奸虜乘後 再猘嶺南 並進水陸 連陷州郡 國事之蒼黃 倍加於前日 驚愕之狀 一體吾心 其在臣子之道 寧安於宵旴之間哉 望須 更發奮義 與前日餘存同志諸君 合謀聚旅 以當一面 終死於矢石之所 盡命酬國豈非大丈夫之高義乎云 於是 應聲同謀者 尤倍前日 宿盟九十二士外 又有三十義士 及義僧五人 而且有靈巖·海南義陣之來附矣. 乃禦賊於興德之排風嶺 累戰累捷 賊衆連退 忽聞賊掠扶安 移軍於愚蟠洞 追擊上掠峙 斬獲無筭 俄而賊衆蟻至 府君素善射 自平明至晡時 射不停留 右手指爲决弦所斷 復以左手控弦 左指亦斷 是時矢盡手徒 賊酋以短兵突犯 乃以手當敵 大呼掩擊 抱挾賊背 賊負劒而躓 刃及府君之身 訓正公 方與賊抗戰 見其急狀 飛奔救之 己無及矣. 遂奪其劒 憤擊四突 掩殺一陣 賊衆莫知所措 東散西走. 嗚呼 丁酉四月二十日 乃府君殉義之日 而享年六十四矣 翌日訓正公 痛復讎未全 勇往斬賊 憤不顧身 仍以遇害 享年三十七. 副正公 勤王己返 亦在軍中 誓復父弟之讎 痛罵賊酋 憤突惟急 格殺無數 衆寡不敵 亦遇害於凶鋒 享年四十一. 嗚呼痛矣 府君 平日丁寧勉戒 只以忠孝二字 而在玆搶攘 若是申複 此尤大彰明交著者也 寧不有起敬怵惕之心哉? 賊退之翌日 府君長房孫應蓍與其叔父奉事公 泣血腥塵叢中 求屍收歛 返葬于扶安乾先面朝家洞酉坐原 配貞夫人坡平尹氏祔左. 收副正公屍 葬于同面花田洞後麓庚坐原 配淑夫人水原白氏祔左 收訓正公屍 葬于敏堂山先塋下午坐原 配淑夫人保安林氏祔左 其時蒼黃罔措 倘復如何哉 噫 父祖也一門宗族 一時掃如 影響永絶 實謂空前慘禍矣 先塋斷絶 危如一髮 而只存叔姪單傳 以至于今日之蕃者 豈非天地祖靈 黙佑於冥冥中而然歟. 想像當日景色 自不覺心痛而肉戰也. 時有顯晦 事有昇沉 高宗壬申 贈資憲大夫兵曺判書 賜祭 命旌 復戶. 純宗甲子以士論 妥享于慕忠祠焉 長房命達子應蓍 號南谷 以孝行薦敎官 壽僉中樞 配淑夫人高興柳氏忠男女 系配淑夫人淸道金氏得榮女 有四男 長沆宣敎郞 次淹號敏堂處士 次沰贈戶議 次澄. 曰沆 子世龜 子時文 孝友著世 子得胤 子膺纘. 曰淹 有三子 長世允 仲世輝 季世說. 曰世允子 時麟 子澤夏 子膺鳳. 曰沰 有二子 長世重 次世潘贈嘉善戶判 有五子 長時興 次時英 次時雄 次時俊 次時傑 曰時興 贈嘉善同樞 子昌胤 贈嘉善 有五子長膺淙以孝行 贈秘書丞次膺吉 次膺寬 次膺龜 次膺成. 曰時英 子鳳胤 有二子 長膺賢 次膺燁. 曰時傑 贈秘書丞 子元胤 贈判尹 有三子 長膺文 以孝行贈嘉善 命旌 復戶 次膺河 次膺徇. 仲房慶達 有二子 長萬蓍 次仁蓍 曰萬 蓍子厚發 子汝泓 子允富 子以璜 有二子 長澤麟武科 次膺德. 曰仁蓍 子元尙 子壽萬 有二子 長啓重 次得重. 曰啓重 子志述 司僕寺正 有五子 長膺武 次膺垕 贈通訓掌樂院正 次膺龍 次膺沅 次膺潾. 曰得重 有二子 長志良 出系 次志遠 有二子 長膺光 次膺坤 季房英達 子有蓍 子慎後 子麟章 子時明 有二子 長洪胤 次德胤. 曰洪胤 系子膺仁. 曰德胤 贈司僕寺正 有三子 長膺仁 出系 次膺彦 贈通政 次膺道以下蕃衍不能盡記. 嗚呼 府君三父子 忠孝卓績 詳載於史氏之錄. 聖朝 贈褒之典 前後崇重 士林之公議 亦靡不勤矣 而但兵燹之餘 後仍仍替其嘉懿行 與擧義時許多可徵之文 倂皆逸泯 未免十不一二存焉 豈敢曰闡揚先烈彷彿乎半分也哉 慨亦嗟夫 族叔柄永及夏永氏 素以孝友推重 而常患愈久愈泯 博謀蒐葺 其述先之誠 亦云至矣 族叔泓述 族叔述永 族兄東熯氏 尤其同聲贊協 而屬余以狀德之文 實先獲而起余者也. 不敢以不文辭 盥手敬奉 就攷大畧 謹次如右 以備他日立言 增補萬一之資云爾.

    玄黓涒灘春分日 十一代孫 東輝 謹狀

     

     

    (家狀)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행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부군(贈資憲大夫兵曺判書行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府君)의 휘()는 홍국(弘國)이고 자는 광보(光輔)이고 호는 야수(野叟)시니, 성은 채씨(蔡氏)이고 본관(本貫)은 평강(平康)이시다.

    시조(始祖)는 고려태사 문하시랑 평장사(高麗太師門下侍郞平章事)이시니, 휘는 송년(松年)이고 시호(諡號)는 경평(景平)이시다. 휘를 화()라고 하시는 분은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내셨고, 휘를 모()라고 하시는 분도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내셨고, 시호는 관신(寬慎)이시다. 휘를 종서(宗瑞)라고 하시는 분은 첨의정당 지밀직판사 상호군(僉議政堂知密直判事上護軍)을 지내셨고, 휘를 문필(文弼)이라고 하시는 분은 전리판서 겸 집현전대제학(典理判書兼集賢殿大提學)을 지내시고 벼슬이 좌우위 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에 이르셨다. 휘를 수()라고 하시는 분은 고려의 국운(國運)이 다하려고 할 때, 두 왕조(王朝) 섬기는 것을 부끄럽다 하여 문을 닫고 종적(蹤蹟)을 감추셨다. 한탄하며 맥수(麥穗)의 시()를 읊으며 바로 남하(南下)하여 부안(扶安)에 숨어 사셨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휘를 충경(忠敬)이라고 하시는 분은 벼슬이 예조판서(禮曹判書)이시고 호가 괴정(槐亭)이시며, 배위(配位) 정경부인 부안김씨(扶安金氏)는 경조윤(京兆尹) 휘 세영(世英)의 따님이시다. 나라에 은퇴(隱退)하기를 청()하게 되었을 때, 살던 집터인 부안현(扶安縣) 괴지(槐池) 연못가에 정자(亭子)를 지으시고 날마다 강도(講道수양(修養)하셨다. 정종(定宗)이 혁읍( 革邑)할 때, 둔전(屯田) 천 묘()를 가지고 정각(亭閣)의 터와 바꾸기를 청()하면서 말씀하기를,

    둔전(屯田)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괴지(槐池) 하나면 충분하다.고 하셨다. 이 분이 부군(府君)의 고조고(高祖考)이시다.

    증조부(曾祖父)의 휘는 거형(居亨)이신데, 충무위 부사직 (忠武衛副司直)을 지내셨다. 배위 숙부인 나씨(羅氏)는 목사(牧使) 휘 천경(天敬)의 따님이시다.

    할아버지의 휘는 준()이시며, 호는 서정(西亭)이시다. 생원(生員)에 합격하여 군자감 참봉(軍資監叅奉)에 제수(除授)되셨으나 덕()을 숨기고 취임(就任)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휘는 치의(致義)시니, 건공장군 용양위 부사직(建功將軍龍驤衛副司直)을 지내셨다. 배위 숙부인 청도김씨(淸道金氏)는 참봉 휘 천화(千華)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13(1534) 갑오(甲午)에 부군(府君)을 부안(扶安) 본가(本家)에서 낳으셨다.

    자라서는 흥덕(興德) 남당리(南塘里)로 옮겨 사셨다. 파평윤씨(坡平尹氏) 참봉 휘 필()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2녀를 두셨다.

    큰아들 명달(命達)은 주부(主簿)인 수원(水原) 백천옥(白千玉)의 따님에게 장가가고, 둘째 경달(慶達)은 보안(保安) 임모(林某)의 딸에게 장가들고, 셋째 영달(英達)은 주부(主簿)인 장택(長澤) 고몽득(高夢得)의 딸에게 장가갔고, 딸들은 감찰(監察) 김수인(金守仁)과 김관길(金觀吉)에게 시집갔다.

    부군(府君)은 초령(髫齡)때부터 천성(天性)이 충후(忠厚) 강개(慷慨)하고 웅략(雄略)을 겸비(兼備)하여, 늘 향당(鄕黨)의 친구들을 대할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세상에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효성(孝誠)으로 어버이를 섬기지 못하면 아들의 직분(職分)이 아니며, 사람의 신하(臣下)가 되어서 충성(忠誠)으로 임금을 섬기지 못하면, 신하의 직분이 아니다. 나는 이미 입신(立身)을 못하였으니, 나라를 바로잡고 임금을 섬기는 도리(道理)는 애당초 베풀 곳이 없으나, 집에 양친(兩親)이 계시니, 마땅히 아들의 도리(道理)를 다할 뿐이다.

    정성(定省)의 예절(禮節)과 감지(甘旨)의 공궤(供饋, 음식을 차려 드리는 것.)가 한 번도 지극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부모님의 상()을 당하여서는 슬퍼하여 건강을 해치는 것이 절도(節度)를 넘어, 거의 생명(生命)을 잃을 뻔 하였으니, 향당(鄕黨)에서 모두 하늘이 낸 효자(孝子)라고 칭찬하였다.

    세 아들이 모두 힘이 좋아서 활쏘기를 잘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조용히 모시고 앉았는데, 슬픈 어조(語調)로 말씀하기를,

    이 아비는 촌마을에서 생장(生長)하여, 어느덧 50세가 되는 동안에, 아직도 나라를 위하여 충성(忠誠)을 바치고자 하는 원()을 이루지 못하였구나. 너희들은 이 마음을 알고 경계(警戒)하는 말을 저버리지 말아라.라고 하셨다. 이렇게 부군(府君)의 평생(平生) 강마(講磨)한 충의(忠義)의 뜻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당시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 1592)을 당하여, 섬 오랑캐가 미쳐서 날뛰니, 20일이 못되어 도성(都城)을 범()하여 함락(陷落)시키고 대가(大駕)는 서행(西幸)하였다.

    이 때에, 부군(府君)께서는, 김건재(金健齋고제봉(高霽峯)과 함께 의병(義兵) 일으키기를 동모(同謀)하고, 금산(錦山)으로 갔으며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제봉공(霽峯公)이 갑자기 순절(殉節)하니 열군(列郡)이 와해(瓦解)되고 호남일대(湖南一帶)가 거의 왜적의 소굴(巢窟)이 되다시피 하였다.

    이에, 개연(慨然)히 분발(奮發)하여, 흩어진 군병(軍兵)을 수습(收拾)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먼저 가동(家僮) 20여 명을 내놓고, 그 세 아들과 종족(宗族) 33 (), 고향의 이웃 동지(同志) 60여 명과 더불어 피를 마시고 흥덕(興德) 남당(南塘)에서 동맹(同盟)을 하였다. 부군(府君)이 의려장(義旅將)이 되고, 그 나머지 제공(諸公)이 각각 재주에 따라서 직책을 맡았다. 여러 사람에게 맹서(盟誓)하기를,

    발모(髮毛)와 신체(身體)는 모두 이것이 부모가 남겨준 것이고, 지금 우리 임금님은 곧 부모이니, 부모의 위급함을 당하여 그 사람의 아들 된 자가 어찌 발모(髮毛)와 신체(身體)를 아끼겠느냐? 여기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있다.

    고 하셨고, 또 말씀하기를,

    국난(國難)에 임하여, 죽으면 같이 돌아갈 것이고 살면 같이 부쳐 살 것인데, 만약 동맹을 배반(背叛)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이를 참()할 것이다. 이것을 알고 행하여라.

    고 하셨다.

    다시 격문(檄文)을 지어 열읍(列邑)에 보이니, 며칠 사이에 응모(應募)한 용기(勇氣) 있는 장정(莊丁)이 곧 300여 인()에 이르게 되었다. 집의 재산(財産)을 기울여 내놓고 한편으로는 병기(兵器)를 마련하고 한편으로는 병량(兵糧)을 보충(補充)하고 이어 대오(隊伍)를 만들어 장등(長嶝)의 언덕에 진영(陣營)을 두고 여러 날 군병(軍兵)을 훈련(訓鍊)하니, 군대(軍隊)의 위엄(威嚴)이 더욱 떨쳤다. 적병(賊兵)들은 감히 67 이웃 고을 경계(境界)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풍문(風聞)을 듣고 와서 합류(合流)하는 자가 나날이 계속되었다.

    당시 본관(本官) 나척(羅惕) 공이 병량(兵糧)을 도와주며 군무(軍務)를 위로하였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공이 수원(水原)에 있으면서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면려(勉勵)하기를,

    장순(張巡허원(許遠)의 책임(責任)이 제군(諸君)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격문(檄文)을 법성진(法聖鎭)으로 부쳐, 병량(兵糧) 400 ()을 내어, 100 ()은 영남(嶺南) 곽재우(郭再佑)의 의병소(義兵所)로 보내고, 300 ()은 의곡장(義穀將) 기효증(奇孝曾)과 같은 의곡장(義穀將)인 큰아들 명달(命達)에게 딸리게 하여 바다로 조운(漕運)하여 용만(龍灣)으로 바치게 하였다. 선조대왕이 이를 가상(嘉尙)하다 하여, 명달(命達)을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에 제수(除授)하였다.

    이때, 왜적이 순천(順天)을 침범(侵犯)한다는 말을 듣고, 곧 군려(軍旅)를 추격(追擊)하였다. 충의(忠義)로 타이르며 삼군(三軍)을 고동(鼓動)하니, 지나는 마을마다 혹은 도시락을 만들고, 혹은 쇠고기와 술로 다투어 맞이하며 군대를 위로하였고, 따라가기를 원하는 자도 또한 많았다. 곧 순천(順天) 석보(石堡)에서 왜적을 격파(擊破)하여, ()하거나 사로잡은 것이 수십급(數十級)이나 되었다.

    적성강(赤城江)에 이르러, () 한 절구(絶句)를 읊어 충분(忠憤)의 마음을 나타내었다. ()에 이르기를,

     

    山勢開新面 산세(山勢)는 새로운 면목을 열고

    江流作古聲 강류(江流)는 예스런 소리를 내도다.

    妖氣驚黑月 요기(妖氣)가 검은 달을 놀라게 하고

    義氣糾精兵 의기(義氣)는 정수한 군사를 규합(糾合)하도다.

     

    라고 하였다.

    곧 군사(軍士)를 주둔(駐屯)시키고 영()을 넘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 고개를 둔월치(屯越峙)라고 하였다.

    당시 순찰사(巡察使)가 공훈(功勳)을 장계(狀啓)로 조정(朝廷)에 알려, 선조대왕이 이를 가상(嘉尙)하다 하여 뽑아서 첨중추(僉中樞)에 제수(除授)하였고, 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올렸다. 차자(次子) 경달(慶達)도 군공(軍功)으로 훈련원정(訓鍊院正)을 제수(除授)하였다.

    정유년에 이르러, 동지(同志)들에게 격문(檄文)을 써서 다시 분기(奮起)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국난(國難)에 죽기를 맹서하였다. 글에 대략 이르기를,

    근자(近者), 간사한 오랑캐가 다시 영남(嶺南)에서 미친개처럼 날뛰며, 수륙(水陸)으로 병진(並進)하여 연달아 주군(州郡)을 함락(陷落)시키니, 나라 일의 허둥대는 것은 전일(前日)의 경악(驚愕)한 모습보다 배()나 더하다. 내 마음과 일체(一體)라면, 그 신자(臣子)의 도리(道理)에 있어서 어찌 조석(朝夕) 사이에 편안할 수가 있겠는가? 바라건대, 다시 의기(義氣)에 발분(發奮)하여 전일(前日)에 살아남은 동지(同志) 제군(諸君)과 함께 군대(軍隊) 모집(募集)하기를 도모하여, 하나의 방면(方面)을 담당하고, 끝내 시석(矢石)이 쏟아지는 곳에서 죽어, 목숨이 다하도록 나라에 보답한다면 어찌 대장부의 높은 의기(義氣)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소리에 응낙(應諾)하여 동모(同謀)한 자가 전일(前日)보다 배()나 더 많았으니, 옛날에 맹약(盟約)92 의사(義士) 외에도 30 의사(義士)와 의승(義僧) 다섯 사람이 있었고, 또 영암(靈巖)과 해남(海南)의 의진(義陣)이 와서 합류(合流)하였다.

    곧 흥덕(興德)의 배풍령(排風嶺)에서 왜적을 방어(防禦)하여 여러 번 싸워 여러 번 승리(勝利)하니 왜적의 무리가 연달아 물러났다.

    문득 왜적이 부안(扶安)을 약탈(掠奪)한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우반동(愚蟠洞)으로 이동(移動)하고 상략치(上掠峙)로 추격(追擊)하여 참()하고 사로잡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갑자기 왜적의 무리가 개미떼처럼 몰려 왔다. 부군(府君)은 원래 활을 잘 쏘아, 동틀 때부터 저녁 무렵까지 활쏘기를 멈추지 않으니, 오른손 손가락이 활시위를 당기면서 끊어졌고, 다시 왼손으로 활시위를 당겨 왼 손가락도 끊어졌다. 이때 화살도 다 없어지고 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적장(賊將)이 단병(短兵)으로 돌진(突進)하여 범()하니, 곧 손으로 적()을 상대(相對)하여, 크게 부르짖고 엄격(掩擊)하여 왜적의 등을 껴안으니, 왜적은 검()을 지고 넘어졌는데 칼날이 부군(府君)의 몸에 미쳤다. 훈정공(訓正公, 둘째 아들)이 바야흐로 왜적과 항전(抗戰)하다가 그 위급(危急)한 상태를 보고, 나는 듯이 달려서 이를 구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미치지 못하였다. 드디어 그 검()을 빼앗아 분격(憤擊)하여 사방으로 충돌(衝突)하며 일진(一陣)을 엄살(掩殺)하니, 왜적의 무리가 어쩔 줄을 몰라 동()으로 흩어지고 서(西)로 달아나곤 하였다.

    아아, 정유년 420일은 바로 부군(府君)께서 순의(殉義)하신 날이며, 향년(享年)64세이시다.

    그 다음날 훈정공(訓正公)은 복수(復讎)를 온전하게 못한 것을 슬퍼하여 용기(勇氣) 있게 가서 왜적을 죽이는데 분()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어 해()를 당하니 향년(享年)37세이시다.

    부정공(副正公, 큰아들)은 근왕(勤王)하고 돌아와 역시 군중(軍中)에 있었는데, 아버지와 아우의 원수(怨讐) 갚기를 맹서하고 왜적(倭賊)의 우두머리를 호되게 꾸짖으며 급히 분돌(憤突)하여 수 없이 격살(格殺)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또한 흉봉(凶鋒)에 해를 입으니 향년(享年)41 세였다.

    아아, 슬프도다. 부군(府君)은 평일(平日)에 면려(勉勵)하고 경계(警戒)함이 정녕(丁寧)하셨는데, 단지 충효(忠孝) 두 글자로 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때에 이와 같이 신복(申複)하였으니 이것이 더욱 크게 창명(彰明)하여 번갈아 저술(著述)할만한 것이다. 어찌 경의(敬意)와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왜적이 물러간 다음날, 부군(府君)의 장방손(長房孫) 응시(應蓍)와 그 숙부(叔父) 봉사공(奉事公)이 피눈물로 울면서 비린내 나는 전진(戰塵) 무더기 속에서 시체(屍體)를 찾아 거두어 염습(殮襲)하고, 부안 건선면 조가동 유좌(扶安乾先面朝家洞酉坐)의 언덕에 반장(返葬)하고,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를 왼쪽에 합장하였다. 부정공(副正公)의 시신(屍身)을 거두어 같은 면() 화전동(花田洞) 뒷기슭 경좌(庚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고 배위 숙부인(淑夫人) 수원백씨(水原白氏)를 왼쪽에 합장하였다. 훈정공(訓正公)의 시신을 거두어 민당산(敏堂山) 선영(先塋) 아래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사하고 배위 숙부인 보안임씨(保安林氏)를 왼쪽에 합장하였다. 그 당시에 허둥대고 어쩔 줄 몰랐던 일을 다시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아아, 아버지와 할아버지, 일문(一門)의 종족(宗族)이 한꺼번에 비로 쓸어버린 듯이 되어 모습과 소리가 영영 끊어졌다. 실로 전에 없던 참화(慘禍)였으니, 선영(先塋)의 제사가 단절(斷絶)될 위태로움이 마치 하나의 머리카락에 매달린 것 같았다. 그러나 단지 숙질(叔姪)이 단전(單傳)으로 남아 있어서 오늘날 번연(蕃衍)하기에 이른 것은, 어찌 천지(天地)와 조상(祖上)의 신령(神靈)이 명명(冥冥)한 가운데 가만히 도와주셔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당일의 경색(景色)을 상상(想像)하면, 저절로 마음이 아프고 살이 떨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다.

    때에 현회(顯晦)가 있고 일에 승침(昇沉)이 있는 것이라, 고종 임신년(1872)에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曺判書)로 증직(贈職)되고 사제(賜祭)하고 정려(旌閭)를 명하고 복호(復戶)하였고, 순종(純宗) 갑자년(1924)에 사론(士論)으로 모충사(慕忠祠)에 향사(享祀)를 모시게 되었다.

     

    장방(長房) 명달(命達)의 아들 응시(應蓍)는 호가 남곡(南谷)인데, 효자로 교관(敎官)에 천거되었고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하였다. 배위 숙부인 고흥류씨(高興柳氏)는 충남(忠男)의 따님이며, 계배(系配) 숙부인 청도김씨(淸道金氏)는 득영(得榮)의 따님이니 4남을 두었는데, 맏이 항()은 선교랑(宣敎郞)이고 다음 엄()은 호가 만당처사(敏堂處士)이며, 다음 탁()은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다음은 징()이다.

    (應蓍의 맏아들) ()의 아들은 세구(世龜)이고, 그 아들 시문(時文)은 효우(孝友)로 세상에 알려졌고, 그 아들은 득윤(得胤)이고, 그 아들은 응찬(膺纘)이다.

    (應蓍의 둘째 아들) ()은 세 아들이 있으니, 맏이는 세윤(世允)이고 둘째는 세휘(世輝)이고 셋째는 세열(世說)이다. 세윤(世允)의 아들은 시린(時麟)이고 그 아들은 택하(澤夏)이고 그 아들은 응봉(膺鳳)이다.

    (應蓍의 셋째 아들) ()은 두 아들이 있으니, 맏이는 세중(世重)이고 다음 세반(世潘)은 증가선대부 호조판서(戶曹判書)이니 다섯 아들이 있다. 맏이를 시흥(時興), 다음을 시영(時英), 다음을 시웅(時雄), 다음을 시준(時俊), 다음을 시걸(時傑)이라고 한다. 시흥(時興)은 증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아들 창윤(昌胤)은 아들이 다섯인데, 맏이 응종(膺淙)은 효행(孝行)으로 비서승(秘書丞)이 증직되고, 다음은 응길(膺吉)이고 다음은 응관(膺寬)이고 다음은 응구(膺龜)이고 다음은 응성(膺成)이다. 시영(時英)의 아들 봉윤(鳳胤)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맏이는 응현(膺賢)이고 다음은 응엽(膺燁)이다. 시걸(時傑)은 비서승(秘書丞)에 증직되었는데 아들 원윤(元胤)은 판윤(判尹)에 증직되었다. 세 아들이 있으니 맏이 응문(膺文)은 효행(孝行)으로 가선대부에 증직되고 정려를 명하고 복호(復戶)하였다. 다음은 응하(膺河)이고 다음은 응순(膺徇)이다.

     

    중방(仲房) 경달(慶達)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맏이는 만시(萬蓍)이고 다음은 인시(仁蓍)이다. 망시(萬蓍)의 아들은 후발(厚發)이고 그 아들은 여홍(汝泓)이고 그 아들은 윤부(允富)이고 그 아들은 이황(以璜)이니 두 아들이 있는데 맏이 택린(澤麟)은 무과(武科)를 하였고 다음은 응덕(膺德)이다. 인시(仁蓍)의 아들은 원상(元尙)이고 그 아들 수만(壽萬)은 두 아들이 있으니 맏이는 계중(啓重)이고 다음은 득중(得重)이다. 계중(啓重)의 아들 지술(志述)은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는데 다섯 아들이 있으니, 맏이는 응무(膺武)이고 다음 응후(膺垕)는 통훈대부 장악원정(掌樂院正)이 증직되었고, 다음은 응룡(膺龍)이고 다음은 응원(膺沅)이고 다음은 응린(膺潾)이다. 득중(得重)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맏이 지량(志良)은 출계(出系)하였고 다음 지원(志遠)은 두 아들이 있으니 맏이를 응광(膺光)이라 하고 다음은 응곤(膺坤)이다.

     

    계방(季房) 영달(英達)의 아들은 유시(有蓍)이고 그 아들은 신후(慎後)이고 그 아들은 인장(麟章)이고 그 아들 시명은 두 아들이 있으니 맏이는 홍윤(洪胤)이고 다음은 덕윤(德胤)이다. 홍윤(洪胤)의 계자(系子)는 응인(膺仁)이다. 덕윤(德胤)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는데 세 아들이 있으니, 맏이 응인(膺仁)은 출계(出系)하였고 다음 응언(膺彦)은 통정대부에 증직되었고 다음은 응도(膺道)이다.

    이하는 번연(蕃衍)하여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아, 부군(府君) 삼부자(三父子)의 충효(忠孝)가 뛰어난 것은 역사가(歷史家)의 기록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성조(聖朝)에서 증직하고 포상(襃賞)한 전례(典禮)가 전후(前後)로 융숭(隆崇)하였고 사림(士林)의 공의(公議)가 또한 부지런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다만 병화(兵禍)를 겪은 나머지, 후손(後孫)들이 계속하여 그 아름답고 떳떳한 행실(行實)이 쇠퇴(衰退)하였고, 의병을 일으켰을 때의 허다(許多)하게 징빙(徵憑)할 문헌(文獻)이 거의 모두 잃어버리고 흩어져, 열에 하나둘도 남아있지 못하는 상황을 면치 못하니, 어찌 감히 선열(先烈)을 반분(半分)이나마 비슷하게 천양(闡揚)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슬프고 슬프도다. 족숙(族叔) 병영씨(柄永氏)와 하영씨(夏永氏)가 원래 효우(孝友)로 추중(推重)을 받으며, 오래 될수록 더욱 흩어져 없어질 것을 늘 근심하여, 널리 수즙(蒐葺)할 것을 꾀하니 그 선대(先代)를 계승(繼承)하는 정성이 또한 지극하다고 하겠다.

    족숙(族叔) 홍술(泓述), 족숙(族叔) 술영(述永), 족형(族兄) 동한씨(東熯氏)는 더욱 그것을 동성찬협(同聲贊協)하여 내게 장덕(狀德)의 글을 쓰라고 하니, 실로 먼저 내 마음을 알고 나를 일으키는 것이니, 감히 글 못한다고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손 씻고 삼가 받들어 대략을 고증(考證)하여 삼가 이상과 같이 따라 지어서 후일(後日)의 입언(立言)에 대비(對備)하니, 만에 하나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현익군탄(玄黓涒灘, 壬申, 1872) 춘분일(春分日)

    11대손 동휘(東輝)가 삼가 가장(家狀)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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