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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수실기(野叟實記) 창의비각 제교, 호남흥성창의비명


    남당회맹단 의병대장 채홍국장군 야수실기를 차례대로 게시합니다.

     

     

    野 叟 實 記




    야수선생채공실기(野叟先生蔡公實記)

    권지이(卷之二)

     

    題敎 倡義碑閣建設時題敎


    後世子孫 欲記先祖之倡義殉節事蹟 莫過於立碣以表 甚爲嘉尙 然而 不敢以自本官擅斷事.

    營題旣如此 爲其子孫之情理 又如是 官豈不助一方 西北二面 當定吏 出用以助 運來之役事 禮房

     

     

    제교(題敎) 창의비각(倡義碑閣)을 건설(建設)할 때의 제교(題敎)

     

    후세(後世) 자손이 선조(先祖)의 창의(倡義) 순절(殉節)한 사적(事蹟)을 기념(記念)하려고 할 때, 비갈(碑碣)을 세워 나타내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매우 가상(嘉尙)하다. 그러나 감히 본관(本官)이 마음대로 처단(處斷)할 수 없는 것이다.

    감영(監營)의 제교(題敎)가 이와 같고, 그 자손된 정리(情理)가 또한 이와 같으니, ()에서 어찌 한 방면(方面)을 돕지 않겠느냐? 서북(西北) 두 면()은 마땅히 담당하는 이서(吏胥)를 정하여 비용(費用)을 내서 운래(運來)하는 일을 도와줄 것. 예방(禮房)

     

     

    湖南興城倡義碑銘


    粤在萬曆壬辰 島夷入寇 自嶺至湖 無不瓦裂而風靡時 高霽峰·金健齋 首倡義旅 檄示列邑 方赴錦山之際 僉中樞蔡公弘國 白衣高公德鳳 叅奉曺公益齡 與李公綽 裵公守義 白衣金公永年 曺公益壽 李公益盛 縣監蔡公禹齡 生員蔡公瑺 白衣卓公祥 李公始華 金公英武 金公榮等 九十二士 亦倡義草檄 會于興德南塘 相與同盟誓曰 凡我歃血 一乃心力 如或敗盟 斬之以送 又惟我聖上 民之父母 今當父母之危 豈可怡然坐視也哉 於是衆推蔡公弘國爲義旅將 高公德鳳爲盟主 曺公益齡爲叅謀 其餘諸公 隨才任職 募丁三百餘人 諭以忠義 士氣益振 乃爲檄 輪示列邑 以作隊之意 留陣于興德之長嶝 賊兵不敢近境 六七隣邑 賴以得全 霽峯公殉節錄曰 賊薄光州 興德兩陣而防禦 陣 望風而潰 興德陣 卽九十二義士所擧陣也 權都帥慄 在水原聞倡義之報 勉之以張巡許遠 其推詡之深如此 移檄于法聖鎭 出兵糧四百石 三百石 屬義穀將奇孝曾漕納于龍灣行在所 一百石 送于嶺南郭再佑義兵所 又斬四倭 以示不可犯之意 聞霽峯戰歿錦山 倭賊 又犯順天 乃與同盟義旅 始發于長嶝 至順天之石堡 破賊留陣 發倉調餉 更爲點閱人丁 方欲赴戰 于時宋經畧主和議 蔡弘國·高德鳳·曺益齡等聞之 握手慟哭曰 我東之危 何至此極 遂還至淳昌赤城江 諸公各賦一詩 以敍忠憤之情 屯軍禦賊 而及至丁酉 島夷再猘 蔡弘國 移書於前日同盟之士 更整軍容 前日同盟之外 又有三十二義士 及義僧五人矣 時倭寇已逼興德 遂卽日點軍 與靈巖海南兵 合力禦之於排風嶺 蔡弘祖·李綽·承萬世·金榮·金永年·曺益壽 力戰而死 倭軍亦散 蔡弘國·蔡禹齡 奮突擊之時 高德鳳捕得二賊 永年之子 嚙肝復讐 是役也 蔡禹齡·李益盛·李始華死之 其餘十八義士 同日死之 蔡弘國 轉戰至扶安上掠峙 賊衆大至 弘國 素善騎射 搏戰良久 矢盡力窮 竟爲賊鋒所害 子命達·慶達 奮擊亦死之 高德鳳 霽峯公五從弟也 見諸公之死於賊鋒歎曰 旣不能與霽峯兄同死於錦山之敗 則必以賊滅而後已 厲義氣按劒挺立於矢石之所 倭賊不敢逼 歸卒于家 有二男曰守謙·處謙 後丙子之亂 與蔡弘國子英達·曺益齡孫橒·李益盛子琳 倡義如壬丁事 率軍至水原 聞已講和 慟哭而還 嗚呼偉哉 何其湖南之多義士 而義士之家 又多克肖之人也 具忠孝節行 雖唐之顔氏·晉之卞氏 未必 專美於古 而百世之下 可樹風聲 嗚呼偉哉 玆當舊甲 倡義諸公之裔 方謀伐石 而記之 以文屬不佞 不侫不敢以不文辭 謹因原狀 序次如右 繼之以銘曰,

    龍蛇之歲 島夷生心 嶺湖失守 畿甸陸沉 不有志士 孰能起義

    義士九十 矢死不貳 興城一隅 菀爲保障 飛檄輸粟 益見忠壯

    蛇豕荐食 哀我睢帥 子不旋踵 孫能繼志 瞻彼南塘 曠感隔晨

    況逢舊甲 蹟豈可湮 籃田片石 不愧爲碑 揭以短銘 匪我謏辭

    通訓大夫茂長縣監坡平尹興圭謹撰

     

     

    호남흥성창의비명 (湖南興城倡義碑銘 幷序)

     

    아아, 만력(萬曆) 임진년에 섬 오랑캐가 들어와 도적질할 때, 영남(嶺南)에서 호남(湖南)까지 기왓장처럼 깨어져서 바람에 나부끼듯 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시, 고제봉(高霽峰)1과 김건재(金健齋)2가 먼저 의군(義軍)을 주창(主倡)하여 격문(檄文)을 여러 고을에 회시(回示)하고 바야흐로 금산(錦山)으로 가려고 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채홍국(蔡弘國) ()과 백의(白衣)인 고덕봉(高德鳳) (), 참봉(叅奉)인 조익령(曺益齡) ()과 이작(李綽), 배수의(裵守義), 백의(白衣)인 김영년(金永年), 조익수(曺益壽), 이익성(李益盛), 현감(縣監) 채우령(蔡禹齡), 생원(生員) 채상(蔡瑺), 백의(白衣) 탁상(卓祥) 이시화(李始華) 김영무(金英武) 김영(金榮) 92 명의 제공(諸公)과 더불어 또한 의군(義軍)을 창도(倡導)하여, 격문(檄文)을 만들고 흥덕(興德) 남당(南塘)에 모여 함께 맹서(盟誓)하기를,

    피를 마신 우리 모두는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할 것이니, 만약에 맹서를 배반(背叛)한다면, ()하여 보낼 것이다.하고 하였고 또

    우리 임금님은 백성의 부모(父母)이시니, 지금 부모의 위급(危急)함을 당하여, 어찌 편안하게 좌시(坐視)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 여러 사람이 채홍국 공을 의려장(義旅將)으로 추대(推戴)하고, 고덕봉 공을 맹주(盟主)로 삼고, 조익령 공을 참모(參謀)로 삼고, 그 나머지 제공(諸公)을 재능(才能)에 따라 직책(職責)을 맡겼다. 장정(壯丁) 300 여명을 모집하여 충의(忠義)할 것을 타이르니, 사기(士氣)가 더욱 떨쳤다. 이어 격문(檄文)을 만들어 여러 고을에 돌려 군대를 만들자는 뜻을 보이고, ()을 흥덕 장등(長嶝)에 머물게 하니, 적병(賊兵)이 감히 경내(境內)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67 이웃 고을이 그 덕택으로 온전할 수가 있었다.

    제봉공(霽峯公)<순절록(殉節錄)>에 이르기를,

    왜적이 광주(光州)에 육박(肉薄)하니, 흥덕(興德)의 양진(兩陣)으로 방어(防禦)하였으나 진()이 바람을 바라보고 궤멸(潰滅)하였다. 흥덕진(興德陣)92 의사(義士)가 의병을 일으킨 진()이니, 도원수(都元帥) 권률(權慄)이 수원(水原)에 있으면서 창의(倡義)의 소식을 듣고, 장순(張巡)3·허원(許遠)4의 고사(故事)를 가지고 권면(勸勉)하였으니, 그 추후(推詡, 칭찬하는 것)함이 이렇게 깊었던 것이다.

    격문(檄文)을 법성진(法聖鎭)으로 보내어, 병량(兵糧) 400 ()을 내서, 300 석은 의곡장(義穀將) 기효증(奇孝曾)에게 맡겨 배로 운송(運送)하여 용만(龍灣) 행재소(行在所)에 바치도록 하고, 100 석은 영남(嶺南) 곽재우(郭再佑) 의병소(義兵所)로 보내도록 하였다.

    또 네 명의 왜적(倭賊)을 참()하여 침범(侵犯)하지 못한다는 뜻을 보였다.

    제봉(霽峯)이 금산(錦山)에서 전몰(戰歿)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왜적(倭賊)이 또 순천(順天)을 침범하니, 곧 동맹(同盟)한 의군(義軍)과 함께 비로소 장등(長嶝)을 출발하여 순천(順天)의 석보(石堡)에 이르렀다. 왜적(倭賊)을 격파(擊破)하고 진()을 머물렀으며, 창고(倉庫)를 열어 군량(軍糧)을 조달(調達)하였다. 다시 인원(人員)을 점검(點檢)하고 바야흐로 싸우러 가려고 하는데, 그 때 송경략(宋經畧, 명나라 군대의 사령관)이 화의(和議)를 주장(主張)하였다.

    채홍국·고덕봉·조익령 등이 이를 듣고, 손을 잡고 통곡(慟哭)하며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위급(危急)함이 어찌 이렇게 극도(極度)에 이르렀는가?하고, 드디어 귀환(歸還)하여 순창(淳昌) 적성강(赤城江)에 이르러 제공(諸公)이 각각 시 한 수()를 읊어 충분(忠憤)의 마음을 나타내고, 군사(軍士)를 주둔(駐屯)시켜 왜적을 방어하였다.

    그런데 정유년에 이르러 섬 오랑캐가 다시 날뛰니, 채홍국은 편지를 전일(前日) 동맹(同盟)하였던 사람에게 보내어 다시 군용(軍容)을 정비(整備)하니, 전일(前日)에 동맹(同盟)하였던 사람 외에 또 32 의사(義士)와 의승(義僧) 다섯 명이 있었다.

    그 때 왜구(倭寇)가 이미 흥덕(興德)을 핍박(逼迫)하니, 드디어 그날로 군대를 점검(點檢)하여 영암(靈巖해남(海南)의 병()과 함께 힘을 합쳐 이를 배풍령(排風嶺)에서 방어(防禦)하였다. 채홍조(蔡弘祖이작(李綽승만세(承萬世김영(金榮김영년(金永年조익수(曺益壽)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왜군(倭軍)도 또한 흩어졌다.

    채홍국과 채우령이 분기(奮起)하여 돌격(突擊)할 때, 고덕봉이 두 왜적(倭賊)을 잡았는데, 영년(永年)의 아들 헌()이 간()을 씹어 복수(復讎)하였다. 이 전역(戰役)에서 채우령(蔡禹齡이익성(李益盛이시화(李始華)가 죽고, 그 나머지 18 명의 의사(義士)가 같은 날에 죽었다.

    채홍국(蔡弘國)은 전전(轉戰)하면서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에 이르렀을 때, 왜적의 무리가 크게 이르렀다. 홍국은 원래 말 타고 활쏘기를 잘하는데, 박전(搏戰)하기를 한참 오래 하니, 화살도 다하고 힘도 다하여 결국에는 왜적(倭賊)의 칼날에 해()를 입게 되었다. 아들 명달(命達)과 경달(慶達)이 분격(奮擊)하여 또한 여기서 죽었다.

    고덕봉(高德鳳)은 제봉공(霽峯公)의 오종제(五從弟, 12)인데, 제공(諸公)이 왜적(倭賊)의 칼날에 죽는 것을 보고 한탄하기를,

    이미 제봉형(霽峯兄)과 함께 금산(錦山)의 패전(敗戰)에서 함께 죽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왜적을 토멸(討滅)하고야 말겠다.고 하며, 의기(義氣)를 격려(激勵)하여 검()을 잡고 꼿꼿하게 시석(矢石)이 난비(亂飛)하는 곳에 서 있으니, 왜적(倭賊)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두 아들이 있으니, 수겸(守謙처겸(處謙)이라고 하는데, 뒤에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채홍국의 아들 영달(英達조익령의 손자 운(이익성의 아들 림()이 임진·정유 때의 일과 같이 창의(倡義)하여 군대를 이끌고 수원(水原)에 이르렀는데, 이미 강화(講和)하였다는 말을 듣고, 통곡(慟哭)하고 돌아갔다.

    아아, 훌륭하도다! 어찌 그리 호남(湖南)에는 의사(義士)가 많았던 것이며, 의사(義士)의 집에는 또 부조(父祖)를 잘 닮은 사람이 많았던 것인가? 충효(忠孝)와 절행(節行)을 갖추었으니, 비록 당()나라의 안씨(顔氏)4나 진()나라의 변씨(卞氏)5라 하더라도 반드시 옛날이나 백세(百世)가 지난 뒤에 풍성(風聲)을 심는 데 있어서 그들만이 오로지 아름답다고는 못할 것이다.

    아아, 위대(偉大)하도다! 이에 구갑(舊甲)을 당하여, 창의(倡義)한 제공(諸公)의 후손(後孫)이 바야흐로 비석(碑石)을 세워 이를 기록(記錄)하려고 하면서, 글을 내게 부탁하니, 나는 감히 글을 못한다고 하여 사양(辭讓)하지 못하였다. 삼가 원래의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차례대로 이상과 같이 기술(記述)하고 명()을 이어 놓았다.

     

    龍蛇之歲 임진(壬辰계사(癸巳)의 해에

    島夷生心 섬 오랑캐가 감히 침략할 마음을 먹으니

    嶺湖失守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을 지키지 못하고

    畿甸陸沉 경기(京畿)와 서울도 계속 함몰(陷沒)되도다.

    不有志士 뜻있는 선비가 없다면

    孰能起義 누가 능히 의병(義兵)을 일으키랴?

    義士九十 90 명의 의사(義士)

    矢死不貳 죽음을 맹서(盟誓)하고 변절(變節)하지 않았도다.

    興城一隅 흥성(興城) 한 모퉁이를

    菀爲保障 울연(鬱然)하게 보장(保障)하였으니

    飛檄輸粟 격문(檄文)이 날고, 군량(軍糧)을 수송(輸送)하여

    益見忠壯 더욱 충성(忠誠)의 장렬(壯烈)함을 보이도다.

    蛇豕荐食 욕심 많고 포악한 놈이6 계속 상국(上國)을 침략하니

    哀我睢帥 슬프도다. 우리 군대(軍隊)를 제멋대로 하도다.

    子不旋踵 아들은 선대(先代)의 자취를 선회(旋回)하지 않고

    孫能繼志 손자는 능히 성대의 뜻을 계승(繼承)하도다.

    瞻彼南塘 저기 남당(南塘)을 보라!

    曠感隔晨 허전한 감회(感懷)는 어제 일과 같도다.

    況逢舊甲 더구나 옛날의 갑자(甲子)를 만났으니

    蹟豈可湮 유적(遺蹟)을 어찌 인멸(湮滅)할 것인가?

    籃田片石 남전(藍田) 한 조각의 돌은

    不愧爲碑 비석(碑石)을 만들기에 부끄럽지 않도다.

    揭以短銘 짧은 명()을 내 걸으니

    匪我謏辭 내가 아첨(阿諂)하는 말이 아니로다.

    통훈대부 무장현감 파평 윤흥규(尹興圭)7가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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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경명(高敬命)= 는 이순(而順). 계통은 耽羅에서 나왔다. 先世鄕貫長興으로 받아, 드디어 長興人이 되었다. 아버지 孟英은 벼슬이 大司諫에 이르렀는데, 嘉靖 癸巳(1533)敬命을 낳았다. 敬命髫年부터 의젓한 것이 成人과 같았다. 參贊 白仁傑이 한 번 보고는 稱重하고 그 遠器임을 알아보았다. 임자년(1552)進士 1등으로 합격하였다. 무오년(1558), 明宗泮宮하여 선비들을 시험하였는데 敬命이 첫째를 차지하였다. 이 해에 甲科 第一로 뽑혀, 典籍에 임명되고 正言으로 옮기고 湖堂賜暇하고 獻納·修撰·持平을 거쳐 使臣關西에 받들었다. 그가 돌아오자, 명하여 沿路에서 지은 寫進케 하였다. 名畵 62을 내려주고 명하여 를 지어 寫進케 하였다. 계해(1563)校理로 승진하였다가 가을에 左遷되어 蔚山郡守補任되었다. 赴任하기 전에 그만두고 鄕里로 돌아갔다. 家食하기를 19. 신사년(1581)에 비로소 起用되어 靈岩郡守하였다. 이어 書狀官으로 北京에 가고, 임오년(1582)瑞山郡守하였다. 당시 明使 洪憲·王敬民이 왔다. 栗谷 李珥遠接使가 되고 敬命薦擧하여 從事官을 삼았다. 栗谷은 원래 敬命을 잘 알지 못하였다. 한 번 보고는 곧 敬重하여 그가 明使唱酬함에 敬命를 가장 많이 使用하였다. 을유(1585), 宣祖, 그의 文章이 오래 下僚沈淪시킬 것이 아니라고 하여, 3를 뛰어넘어 軍資監正에 임명하였다. 그 때, 기뻐하지 않는 가 있어서 敬命은 병이 있다고 하여 辭任하고 오지 않았다. 경인년(1590), 大臣이 그 文章薦擧하여 承文院 判校에 임명하였다. 가을에 通政品階에 오르고, 東萊府使에 임명되었다. 廉直·淸白함을 스스로 지키고 티끌에 하나도 물들지 않았다. 吏民이 모두 기뻐하였다. 신묘년(1591)光國原從功臣으로 錄勳되었다. 여름에 連坐하여 罷職되고 入京하였다. 言者가 바야흐로 左相 鄭澈論罪하고, 혹은 敬命指目하여 鄭澈薦擧한 사람이라고 하는 이가 있었다. 敬命匹馬故鄕으로 돌아갔다. 壬辰亂(1592), 敬命光州 村舍에 있었는데, 我軍은 싸울 때마다 敗北(패배)하여 鳥嶺險關을 잃고, 湖南巡察을 맡은 王室捍衛(한위)할 뜻이 없다는 말을 듣고, 아들 從厚·因厚와 함께 義兵을 일으킬 것을 圖謀하였다. 이미 乘輿西幸하고 都城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는, 밤낮으로 痛哭하였다. 巡察勤王을 이끌고 錦江에 이르러 京師가 이미 陷落되었다는 말을 듣고 倉惶하여 하니 一道人心洶懼하였다. 敬命은 편지를 보내어 이를 責望하였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敬命羅州人 前府使 金千鎰(김천일)과 함께 興復을 도모하여 5戊子日潭陽府에서 만났다. 玉果人 學諭 柳彭老 등이 敬命推戴하여 盟主로 삼았다. 敬命은 늙고 병들어 軍旅가 한가롭지 않다는 이유로 辭讓하지 아니하고, 慨然하게 에 올라 檄文道內에 전하였다. 召募에 응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었다. 6월에 軍隊潭陽을 나섰다. 당시 三路의 군대가 龍仁에서 潰滅되니, 兩湖動搖하였다. 敬命全州로부터 軍旅整備하여 北上하고 礪山駐次하고 손수 檄文起草하여 諸道遞告하고 關西通達하였다. 尼山[충청도]으로 향하려고 할 때, 敵兵黃澗으로부터 錦山으로 들어가 郡守敗戰하여 죽고, 勢力猖獗하다고 듣고, 麾下軍士들이 다투어 돌아가 本道하려고 하였다. 敬命도 이를 옳다고 하여, 드디어 軍士珍山으로 옮겨 금산의 왜적을 치려고 하였다. 精銳軍士가 와서 投身하는 더욱 더 많아지고 軍聲이 크게 떨쳤다. 드디어 將士部分하여 錦山으로 들어가 防禦使 郭嶸(곽영)과 함께 左右翼을 만들었다. 敬命은 우선 精騎 數百을 보내어 곧바로 적의 巢窟로 가게 하였는데, 적의 機會 를 틈타는 바 되어 물러났다. 敬命은 북을 울려 督戰하고 軍士들은 죽기로 싸워, 적을 土城에 가두고 밖의 館舍를 불사르고 또 (, 돌쇠뇌)를 가지고 城內延燒시켜 聲勢가 매우 하였다. 적병이 죽음을 무릅쓰고 突出하였다. 義軍四面으로 포위·공격하여 殺傷한 것이 매우 많았다. 마침 해가 저물었다. 軍士를 물려 돌아와 을 쳤다. 이날 저녁, 防禦使는 사람을 보내어 내일 軍士쳐서 싸우기로 약속하였다. 이튿날, 敬命防禦使와 함께 軍士前進시켜 적에게서 5리 되는 곳에 을 쳤다. 防禦使이 서로 바라보였다. 敬命800 餘騎를 보내어 挑戰하였다. 倭兵空壁하고 나와 먼저 防禦使軍兵을 공격하였다. 防禦使軍兵潰滅하였다. 敬命이 홀로 이에 對敵하려고 하였으나 全軍崩潰하여 또 어찌할 수가 없었다. 麾下가 붙들어서 말에 태웠으나 敬命은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달아났다. 麾下儒生 安瑛(안영)이 말에서 내려 敬命에게 주고 徒走하여 이에 따랐다. 從事 柳彭老는 말이 健壯하여 먼저 脫出하였는데 從僕에게 묻기를,大將은 탈출하셨느냐?하니, 아직 못하셨다고 하였다. 彭老는 말에 채찍질하여 다시 돌아들어가서 亂兵 가운데 大將을 따랐다. 敬命이 돌아보고 말하기를,나는 畢竟 면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너는 달려 나가라.고 하였다. 彭老가 말하기를,내 어찌 大將을 버리고 차마 살 길을 찾겠는가?라고 하였다. 敵鋒이 드디어 이르니, 敬命彭老·安瑛과 함께 나란히 죽었다. 訃告가 올라가니 宣祖震悼하고 禮曹判書贈職하고, 有司에게 명하여 旌閭를 내리고 特命하여 祠堂光州에 세우고, 懸額褒忠이라고 하고, 官吏를 보내어 致祭하고 春秋祭享하도록 하였다. 諡號忠烈이라고 내렸다. 敬命은 스스로 霽峯(제봉)”이라고 自號하고, 苔軒이라고도 하였다. 風姿英偉하고 識量宏深하였다. 屈伸에 있어서는 이에 하여 裕如하였다. 平常時에 남의 短處를 말하지 않았으며 友愛가 매우 敦篤하여 臧獲(장획, 奴婢)田畝를 모두 그 아우에게 주었다. 달리 玩好하는 것은 없고, 다만 書史 數千卷, 三敎·九流의 책을 所藏하였다. 모두 그의 精究한 바로, 象數에 밝았고 文章을 지음에 가장 가 뛰어났었다. 長子 從厚는 정축년에 文科에 올랐다. 喪次에서 起兵하여 아버지의 怨讐를 갚고자 嶺外轉戰하고 倡義使 金千鎰晉州로 들어가 陷落되자 물에 投身하여 죽었다. 次子 因厚는 기축년에 文科에 올랐는데 아버지를 따라 陣中에서 죽었다. [海東名臣錄]

     

    2) 김천일(金千鎰)= 士重. 호를 健齋라고 하였다. 光州人. 어려서 父母를 잃었다. 一齋 李 恒弟子이며, 遺逸로 천거되어 持平하였다. 壬辰亂 , 車駕播越하고 서울이 陷落되었다. 당시 千鎰前府使로서 羅州에 있었는데, 편지로 高敬命朴光玉崔慶會鄭湛 등에게 하고 倡義하여 精銳兵 수백 명을 얻고 여러 사람과 同盟하여 서쪽으로 나가는데 당시 三道勤王軍龍仁에서 潰滅하였기 때문에 軍中士氣沮喪괴었다. 千鎰은 여러 사람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우리는 義擧의 군대이다. 오직 進軍만이 있을 뿐 退軍이란 있을 수 없다. 떠나고 싶은 자는 마음대로 가라.”하니 한 사람도 도망치는 자가 없었다. 湖西(忠淸道)에 이르니 무리는 數千에 이르렀다. 드디어 水原으로 들어갔다. 軍勢가 꽤 떨쳤다. 梁山璹 등에게 上疏文을 가지고 間行하여 行在所로 가게하고 군대를 이동하여 江華로 들어가서 依據하였다. 梁山璹行在所에서 돌아오고 朝命을 얻어 判決事하고 倡義使의 이름을 받았다. 敵兵이 오래도록 京城依據하여 都民들이 많이 이들과 雜處하였었다. 千鎰은 곧 決死隊를 보내어 城中으로 潛入하게 해서 順逆利害로써 이들을 깨우치니 백성들이 모두 感泣하여 정성()을 보내는 자가 數萬名에 이르렀다. 千鎰은 때때로 出兵하여 沿江諸屯抄擊하고 또 兵船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 軍兵楊花 나루에 번뜩거리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나라 提督 李如松松都進兵하였다. 千鎰道里地勢情況을 모두 갖추어 提督에게 알리고, 遊仙峰으로 나아가 屯軍하여 提督聲援하였다. 敵兵으로 물러가자, 衆人을 이끌고 入城하여 人民撫揖하였다. 朝廷에서는 追擊하라고 명하였다. 千鎰, “湖南은 나라의 根本이며, 晉州는 실로 湖南蔽障이라고 말하고, 晉州를 지켜서 湖南防禦할 것을 청하고 드디어 晉州로 들어갔다. 節度使 崔慶會黃進高從厚張允 등과 함께 死守하기로 약속하였다. 數日後에 적의 遊兵이 이미 城東에 이르렀다. 千鎰精騎를 내어 이를 擊退하였다. 얼마 후에 적의 大兵이 몰려와서 바로 城門에 육박하고 竹木을 엮어 樓盾으로 하고 그 안에 砲穴羅列하여 攻擊이 점점 급해졌다. 마침 오래 비가 온 끝이라 城土가 녹아 무너졌다. 黃進張允彈丸에 맞아 先後하여 죽고,敵兵肉薄하여 으로 기어올랐다. 城中에서는 矢石이 다 떨어졌고 겨우 竹木으로 刺擊히였다. 乘勝闌入하여 드디어 陷落되었다. 千鎰矗石樓 위에 있었는데 오직 長子 象乾梁山璹 親兵 겨우 數十名 만이 곁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들이 울면서 말하기를, “일은 글렀습니다. 장차 어찌 하시렵니까?”하니 千鎰이 태연하게 대답하기를, “擧事하던 날, 나는 이미 내가 죽기로 결심하였다라고 하고 일어나서 北向하여 望拜하고 象乾과 함께 서로 껴안고 樓下潭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 將佐 가운데 따라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일이 알려지자 宣祖震悼하고 左贊成贈職하고 弔祭를 내렸다. 湖南人士들이 羅州祠堂을 세워 享祀하니 나라에서 賜額하여 旌烈祠라 하였다.[海東名臣錄]

    3) 장순(張巡)= 당나라 남양(南陽)사람. 군서(群書)에 박통(博通)하고 전진(戰陣)의 법에 효통(曉通)하였다. 개원(開元)의 진사(進士). 벼슬은 청하령(淸河令). 뒤에 진원령(眞源令)으로 옮겼다. 천보년간(天寶年間)에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기병(起兵)하여 이를 토벌(討伐)하고, 휴양(睢陽)의 태수(太守) 허원(許遠)과 함께 성()을 지키며 적장(賊將) 윤자기(尹子琦)와 싸웠다. 천자(天子)는 조서(詔書)를 내려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임명하였다. 가끔 성()이 깨어졌으나 고수(固守)하기를 수월(數月), 임회절도사(臨淮節度使)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구원(救援)을 청하였으나 진명(進明)은 순()의 성위(聲威)를 시기(猜忌)하여 좌시(坐視)하며 구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드디어 성이 함락되고, 적장(賊將)에게 피살(被殺)되었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크게 적장(賊將)을 꾸짖고 욕하였다. 후에 양주대도독(楊州大都督)으로 추증(追贈)되었다. [唐書, 192]

    4) 허원(許遠)= 唐人. 許敬宗曾孫. 吏治에 밝았다. 仇兼瓊(구겸경)劍南鎭撫하자 辟任하여 從事가 되고, 兼瓊의 미움을 사서 高要尉左遷되었다. 安祿山하자 玄宗이 불러서 睢陽太守除授하고 防禦使累加하였다. 玄宗 張巡軍兵하여 安祿山軍兵防禦하고 包圍 당한 지 數月, 軍糧이 다하여 참새와 쥐까지 잡아먹었다. 이 드디어 함락되고 張巡과 함께 잡혀서 屈服하지 않고 殺害되었다. [唐書, 192.]

    4) 顔氏(안씨)= 唐 顔杲卿顔眞卿을 말함. 모두 安祿山屈服하지 않고 살해되었다.

    5) 卞氏(변씨)= 卞壼(변곤)을 말한다. 晉人. 의 아들. 望之. 忠貞.尙書令. 蘇峻하였을 때, 이를 防禦하여 戰死하였다.卞門忠孝라는 故事가 있다. 父子가 함께 國難殉死한 것을 말한다. [晉書, 卞壼傳] 訥重議曰, 夫事親莫大於孝. 事君莫尙於忠, 唯孝也, 故能盡敬竭誠, 唯忠也, 故能見危授命, 此在三之大節, 臣子之極行也. , 壼委質三朝, 盡規翼亮, 遭世險難存亡, 以之受顧託之重, 居端右之任, 擁衛至尊, 則有保傅之恩, 正色在朝, 則有匪躬之節, 賊峻造逆, 戮力致討, 身當矢旝, 再對賊鋒, 父子幷命, 可謂破家爲國守死勤事, 昔許男疾終, 猶蒙二等之贈, 況壼伏節國難者乎, 夫賞疑從重, 況在不疑, 可謂上準許穆, 下同嵇紹, 則允合典謨, 克厭衆望, 於是改贈壼侍中驃騎將軍開府儀同三司, 諡曰忠貞, 祠以太牢, 贈世子眕散騎侍郞, 弟旴奉車都尉, 眕母裴氏, 撫子尸哭曰, 父爲忠臣, 汝爲孝子, 夫何恨乎, 徵士翟湯, 聞之歎曰, 父死於君, 子死於父, 忠孝之道, 萃于一門.

    6) 蛇豕(사시)= 뱀과 돼지. 轉義하여 욕심 많고 暴惡한 자를 칭하는 말. 封豕長蛇. [左氏, , ] 吳爲封豕長蛇. 以荐食上國.

    7) 尹興圭(윤흥규)= 純祖 末年 때 사람으로, 이 글은 순조 32(壬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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