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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수실기(野叟實記) 흥의소일기


    남당회맹단 의병대장 채홍국장군 야수실기를 차례대로 게시합니다.

    野 叟 實 記



    興義所日記

    謹按會盟錄及日記舊本 盖義旅將僉中樞蔡公弘國·盟主將高公德鳳·參謀官曺公益齡·典糧都監李公敏復與同志諸公草檄 請會于興德北面南塘 歃血同盟 而檄文失傳爾.

    萬曆壬辰八月十一日 爲檄輪示列邑 以請倡義.

    十二日 曉頭 曺益齡 率丁十八人而來. 次第 曺益壽攝後而來. 右日巳時 高德鳳 率丁十五人而至. 右日午未之間 李大俊·李大榮來. 俄而 金景德 率丁七人而來. 右日黃昏 李敏復·李敏德·李敏敷三兄弟來. 右日戌亥間 林機·林樞·林大樹·林大一·林世章來. 右日夜半 李蕃·金守仁至. 又鷄鳴時 成潤 率丁三十人而至.

    十三日 寅卯間 吳夢瑞·李時華至. 辰巳間 尹興殷 帥丁十二人至. 申酉間 崔彦琛·吳封壽至. 黃昏 金景章·朴永東至. 夜半 生員蔡瑺與蔡大亨·蔡大臨·崔有靑·羅起寅·羅起宗·金應兌·蔡鳳·吳松壽·金尙秋·金尙弼·尹興壽·李蕃衛等至. 俄而 卓祥·蔡德良·金邦弼至.

    十四日 蔡致元與田始秋·田始春等至. 午時 黑雲蔽天 日氣森昏 蔡仁達與利達至. 酉初 寒雨暴注. 蔡弘國與諸君 定所村舍. 戌時 任啓元·金以振 冒雨至. 頃之 吳弼壽 結縛一髠者而來納之 觸而鞠問 右髡者所告 言不辨信 高德鳳 書以問之 右髡 亦書以示曰 伊豫州 大阪城人云 左右諸君欲殺之. 蔡弘國·高德鳳·曺益齡謂左右曰 若殺此髡 未知賊情 姑置幕邸 詳問賊之智勇與兵機云. 左右諾.

    十五日 朝 蔡球與姜載八·黃得中·許得天·許燮至. 金以鳴 蓬矢五百三十六介來納. 蔡琨與蔡英·蔡瑋來謂曰 賊勢方熾 且梁大博 智如孔明 局如子房 可赴云已而 蔡禹齡 自綿城至.

    十六日 李寅永與子澤龍·弟寅發 聞風至. 路被凶獰人之所害 子澤龍見死而來.

    十七日 雨 道路泥濘.

    十八日 雨 不霽.

    十九日 雨 小晴. 令李綽·蔡慶達·吳封壽 移檄本邑 兵糧十六石轉來已 而鄭淹率一百人至 一軍皆疑 問之所從()

    二十日 李得春 以喪身至. 蔡弘國慰溯曰 君曳衰而至 雖可感 軍中衰衣 古無兵法 且國家若此脫衰無妄云.

    二十一日 雨來電見.

    二十二日 雨不霽. 旗下朴昌大 收隣里牛二隻而來.

    二十三日 雨不晴. 至夜快晴.

    二十四日 點考人丁 則三百五十九人.

    二十五日 旗下金尙兌·吳天壽·朴啓元等來 編行伍.

    二十六日 始設操練.

    二十七日 始射定步 始炮定貫.

    二十八日 柳男伊·鄭洛·崔以三·方元哲·金太石來. 編行伍.

    二十九日 點閱人丁 則三百六十七人.

    三十日 餉士.

    九月初一日 吳夢瑞 竹箭二百九十四箇來納.

    初二日 金景章 聞母喪 卽赴.

    初三日 細雨終日.

    初四日 有山裂海湯之聲 諸君皆驚 蔡命達 出視入告曰 怪哉 籠巖剖中成雙 是何怪哉?

    初五日 旗下李孟喆·金介仁·朴道孫·吳鳴天等 矢箭五百四十箇來納 編伍.

    初六日 餉士. 前村朴同知 持牛酒食而來貢.

    初七日 又爲檄書 輪示列邑 以作隊之意 會于長登六七隣邑 賴以得全.

    初八日 點閱人丁 則三百七十二人.

    初九日 蔡命達 急告曰 城南錄沙磴 無名大兵() 蔡弘國·高德鳳·曺益齡·李大俊 寄檄探知 乃金弼善之義兵 然動靜的未知 布令陣隊守後 時時放炮 以定各隊.

    初十日 宋玏來. 俄而雨來.

    十一日 雨晴. 操鍊·習射 軍威益壯.

    十二日 金弼善送檄曰 今國家不幸被寇 臣子之道 孰無慨憤哉 此亦遂忠之日也. 然而 彈丸小邑 軍兵未滿百數 糧米亦未充百餘斛 將何以廣覓嬴餘 以補萬一云.

    十三日 金弼善 率家僮與善義人金英武·裵守義·朴致德·朴慶德等百餘來廳 蔡弘國曰 爲國殉躬之忠 弼善是也. 卽推爲餉士都監.

    十四日 習射.

    十五日 () 聞賊犯全州 非常操鍊.

    十六日 蔡弘國 兵糧十二石 兵鐵百五十斤 以補軍用.

    十七日 高德鳳曰 軍用不足 移檄扶邑 請用云. 左右皆曰可. 卽日移書 兵糧五石 弓矢等物 受用.

    十八日 歃血同盟 軍容肅然.

    十九日 點閱人丁.

    二十日 李成春來 參盟錄.

    二十一日 金以振 以寒疾 身死軍中 高德鳳·曺益齡 以油紙裹屍 出殯兎項南麓.

    二十二日 雨雹

    二十三日 操鍊. 各用才略. 蔡弘國 騎馬走射 人無() 高德鳳曰 壯哉將軍 必得軍功.

    二十四日 點考人丁. 戰卒七人 元數外 加存金()

    二十五日 分定任事.

    二十六日 閭里人 以牛隻來納 餉士終日.

    二十七日 細雨至暮不霽. 金榮與子貴福·廷立 冒雨來.

    二十八日 雨小晴. 李益盛來. 卽推爲監浦官.

    二十九日 李綽 軍糧二石自納以補軍用.

    十月初一日 操鍊.

    初二日 曺益齡 兵糧八石 片箭三百箇來納.

    初三日 朱蕃吉 自秋風嶺 馬一牛三 健僕六十名 欲赴() 中路 聞興德義將來 以軍禮進見. 令參謀官曺益齡迎接曰 將軍以龍巖之子也 堂堂忠義 必是殉國 天以將軍送于此也. 卽推突擊先鋒.

    初四日 水原山城 權都帥慄 始聞興德倡義 傳書慰勉曰 張巡許遠之責 其不在諸君子乎.

    初五日 習射終日 推金榮 爲監浦官.

    初六日 使金弼善 作檄書 寄法聖鎭令曰 鄙廳 兵多糧足 廣出兵糧四百石. 三百石 屬義穀將奇孝 會同餉士 副監蔡命達 漕納于龍灣行在所. 百石 送于嶺南郭再佑義兵所.

    初七日 得倭七名 斬四名 以示不可犯之意. 縱三名 歸俾傳恩威之令.

    初八日 朱蕃吉 聞鳥嶺之戰 請行兵赴之. 義旅將蔡弘國曰 器機今姑未備 士卒不習戰場 必有不利 此不如留軍私習. 蕃吉 突出直走.

    初九日 洪繼勳 自燕岐來 傳言曰 賊奴充塞道路 殺畧閭里 不可猝爾進兵.

    初十日 風雨大作 不通道路.

    十一日 小雨. 前後隊 合陣操鍊.

    十二日 有一人 牽黃猴而來 此非東人 必是倭賊捕殺 鞠問乃倭賊 立斬之.

    十三日 李敏德來言曰 平壤南宮涀罷職.

    十四日 初雪

    十五日 曺益壽 請行兵赴晉州()

    十六日 勇劒終日

    十七日 金見田始春流涕責曰 國家安危若此 戮力匡復 臣子之義道 今君流涕 此非遠猷也.

    十八日 雪

    十九日 雪

    二十日 金尙同傳言曰 平壤倅南宮涀復職.

    二十一日 扶安義軍朴昌大 以侵掠居民之罪 斬首以徇. 軍中 又捕亡卒七名 懸頭陣門 一軍悚懼 不敢遷動.

    二十二日 吳封壽入告曰 俄間朴雲之言, 邊以中 屯兵水原·安城之地 兵可進矣()

    二十三日 犒軍.

    二十四日 點考人丁

    二十五日 義旅將與同盟諸員數百人 義穀一百石 始發于南塘長嶝. 宿井邑川原.

    二十六日 習射

    二十七日 到長城四街里.

    二十八日 到潭陽邑邸.

    二十九日 至谷城木寺洞

    三十日 至順天雙巖

    十一月初一日 金弼善 發石堡倉穀 留軍調餉甚均 蔡弘國曰 今之弼善 古之蕭何.

    初二日 以雨滯軍.

    初三日 移軍朱巖 富有七日留軍. 私習(自初四日至十日缺)

    十一日 點閱人丁() 兵討謀義之際 聞李提督克服平壤 又聞提督失利於碧蹄云 宋經略主和議() 蔡弘國·高德鳳·曺益齡·李大俊·蔡禹齡等相向慟哭曰 我東時危 何至此極 今則食盡兵罷 留此無益() 不如還陣. 卽發.

    十二日 率兵到南原.

    十三日 至赤城江頭 諸君 各吟一韻 以暢其憤然之情.

    十四日 至淳昌. 點考人丁. 戰卒七名. 或死或逃云.

    十五日 到賊峙 二日留屯 合陣越嶺 時人 名之呼曰屯越嶺.

    十六日 留陣

    十七日 到井邑. 餉士

    十八日 仍各罷歸

    十九日 金弼善與高德鳳·曺益齡·李綽等 又謀兵粟. 右日 記得於㤼巖金公後孫膺泰家 末端書云 萬曆丁酉九月初九日 謄書于參謀官墓宇. 盖當日 本記在於曺公家 而失傳悲夫. 間多字() 或有未詳覽者 恕究焉.




    흥의소일기(興義所日記)


    삼가 회맹록(會盟錄)과 일기(日記) 구본(舊本)을 살피건대, 대개 의려장(義旅將)은 첨중추(僉中樞) 채홍국(蔡弘國) 공이고, 맹주장(盟主將)은 고덕봉(高德鳳) 공이고, 참모관(參謀官)은 조익령(曺益齡) 공이고, 전량도감(典糧都監)은 이민복(李敏復) 공인데, 동지제공(同志諸公)과 더불어 격문(檄文)을 기초(起草)하여 흥덕 북면 남당(興德北面南塘)에 모일 것을 청하여,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하였는데, 격문(檄文)은 실전(失傳)하였다.

    만력(萬曆) 임진(壬辰) 811. 격문을 열읍(列邑)에 돌려 보이고 창의(倡義)할 것을 청하였다.

    12. 꼭두새벽에, 조익령(曺益齡)이 장정(壯丁) 18인을 데리고 왔다. 차례로 조익수(曺益壽)가 뒤따라 왔다. 이날 사시(巳時, 오전 10시 전후), 고덕봉(高德鳳) 장정 15인을 데리고 왔다.이날 오시(午時미시(未時) 사이에, 이대준(李大俊이대영(李大榮)이 오고, 금방 김경덕(金景德)이 장정 7인을 데리고 왔다. 이날 황혼(黃昏) 무렵에 이민복(李敏復이민덕(李敏德이민부(李敏敷) 3형제가 왔다. 이날 술시(戌時해시(亥時) 사이에 임기(林機임추(林樞임대수(林大樹임대일(林大一임세장(林世章)이 왔다. 이날 한밤중에 이번(李蕃김수인(金守仁)이 오고 또 닭이 울 때 성윤(成潤)이 장정 30인을 데리고 왔다.

    13. 인시(寅時묘시(卯時) 사이에 오몽서(吳夢瑞이시화(李時華)가 오고, 진시(辰時사시(巳時) 사이에 윤흥은(尹興殷)이 장정 12인을 거느리고 오고, 신시(申時유시(酉時) 사이에, 최언침(崔彦琛오봉수(吳封壽)가 오고, 황혼(黃昏)에 김경장(金景章박영동(朴永東)이 오고, 한밤중에 생원 채상(蔡瑺)과 채대형(蔡大亨채대림(蔡大臨최유청(崔有靑나기인(羅起寅나기종(羅起宗김응태(金應兌채봉(蔡鳳오송수(吳松壽김상추(金尙秋김상필(金尙弼윤흥수(尹興壽이번위(李蕃衛) 등이 왔다. 좀 있다가 탁상(卓祥채덕량(蔡德良김방필(金邦弼)이 왔다.

    14. 채치원(蔡致元)과 전시추(田始秋전시춘(田始春) 등이 왔다. 오시(午時),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날씨가 음삼(陰森)하고 어두웠다. 채인달(蔡仁達)과 채이달(蔡利達)이 왔다. 유시(酉時) 초에, 찬비가 폭주(暴注)하였다. 채홍국은 제군(諸君)과 함께 촌사(村舍)에다 소(, 興義所)를 정하였다. 술시(戌時)에 임계원(任啓元김이진(金以振)이 비를 무릅쓰고 왔다. 얼마 있다가 오필수(吳弼壽)가 하나의 머리 깎은 자를 결박(結縛)하여 바쳤다. 때리면서 국문(鞠問)하니 이 머리 깎은 자가 고()하는 것은 말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고덕봉이 글씨를 써서 물으니, 이 대머리도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아요(伊豫州) “오사카(大阪城) 사람이라고 하였다. 좌우의 제군이 이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채홍국·고덕봉·조익령이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만약 이 대머리를 죽이면, 적정(賊情)을 알 수 없으니, 잠시 막저(幕邸)에 놓아두고 왜적(倭賊)의 지용(智勇)과 병기(兵機)를 자세하게 물어보자고 하니 좌우에서 좋다고 하였다.

    15일 아침. 채구(蔡球)와 강재팔(姜載八황득중(黃得中허득천(許得天허섭(許燮)이 왔다. 김이명(金以鳴)이 봉시(蓬矢) 536 개를 가지고와서 바쳤다. 채곤(蔡琨)과 채영(蔡英채위(蔡瑋)가 와서, 적세(賊勢)가 바야흐로 치열(熾烈)하다고 말하고, 또 양대박(梁大博)은 지모(智謀)가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고 간국(艱局)이 장자방(張子房)과 같으니 그리로 가야 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채우령(蔡禹齡)이 금성(綿城=羅州)으로부터 왔다.

    16. 이인영(李寅永)과 아들 택룡(澤龍아우 인발(寅發)이 풍문을 듣고 오는데, 길에서 흉악(凶惡)한 사람의 해()를 입어 아들 택룡(澤龍)이 죽는 것을 보고 왔다.

    17. 비오다. 도로(道路)가 진흙창이 되었다.

    18. 비가 개이지 않았다.

    19. 비가 조금 개였다. 이작(李綽채경달(蔡慶達오봉수(吳封壽)를 시켜 격문(檄文)을 본읍(本邑)으로 옮겼다. 병량(兵糧) 16 섬을 전운(轉運)하여 왔을 뿐이다. 정엄(鄭淹)이 일백인(一百人)을 이끌고 왔다. 일군(一軍)이 모두 의심하여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니, (缺落)

    20. 이득춘(李得春)이 상복(喪服)을 입은 몸으로 왔다. 채홍국이 위로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상복(喪服)을 입고 와 준 것은 비록 감사하지만, 군중(軍中)에서 상복을 입는 것은 옛날부터 병법(兵法)에 없다. 또 나라가 이 지경이니, 상복을 벗어도 망녕(妄侫)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21. 비 오고 번개도 보였다.

    22. 비가 개이지 않았다. 기하(旗下)의 박창대(朴昌大)가 이웃 마을의 소 두 마리를 거두어 왔다.

    23. 비가 개이지 않았다. 밤이 되어서야 쾌청(快晴)하였다.

    24. 인정(人丁)을 점고(點考)하니 359 ()이었다.

    25. 기하(旗下)에 김상태(金尙兌오천수(吳天壽박계원(朴啓元) 등이 와서 행오(行伍)에 편입(編入)하였다.

    26. 비로소 조련(操練)을 실시하였다.

    17. 비로소 사()에 보()를 정하고, 비로소 포()에 관()을 정하였다. (훈련하는 규정을 정한 것이다.)

    28. 유남이(柳男伊정락(鄭洛최이삼(崔以三방원철(方元哲김태석(金太石) 등이 와서 행오(行伍)에 편입(編入)하였다.

    29. 인정(人丁)을 점렬(點閱)하니 367 ()이었다.

    30. 군사(軍士)를 향응(饗應, 잘 먹이는 것)하였다.

    9월 초1. 오몽서(吳夢瑞)가 죽전(竹箭) 294 개를 가지고와서 바쳤다.

    2. 김경장(金景章)이 어미의 상()을 듣고 바로 달려갔다.

    3. 가랑비가 종일 왔다.

    4. 잔이 쪼개지고 바다가 진탕(震蕩)하는 소리가 있어서 여러 사람이 모두 놀랐다. 채명달(蔡命達)이 나가서 보고 들어와 말하기를,괴상하도다. 농암(籠巖)이 가운데서 쪼개져서 두 개가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괴변인가?라고 하였다.

    5. 기하(旗下)에 이맹철(李孟喆김개인(金介仁박도손(朴道孫오명천(吳鳴天) 등이 화살 540 개를 가지고 왔다. 행오(行伍)에 편입시켰다.

    6. 군사(軍士)를 향응(饗應)하였다. 앞마을의 박동지(朴同知)가 쇠고기와 술과 밥을 가지고와서 바쳤다.

    7. 또 격서(檄書)를 만들어 군대를 만든다는 뜻으로 열읍(列邑)에 돌려 보였다. 67 이웃 고을이 장등(長登)에 모였다. 그 덕으로 온전할 수가 있었다.

    8. 인정(人丁, 人員)을 점열(點閱)하니 372 사람이었다.

    9. 채명달(蔡命達)이 급히 알리기를, 성남(城南) 녹사등(錄沙磴)에 이름 없는 대병(大兵)...(결락) 채홍국·고덕봉·조익령·이대준이 격문(格文)을 보내고 탐지(探知)하니 바로 김필선(金弼善)의 의병(義兵)이었다. 그러나 동정(動靜)을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진대(陣隊)는 뒤를 지키라고 포령(布令)하고 때때로 방포(放炮)하여 각대(各隊)를 안정시켰다.

    10. 송륵(宋玏)이 왔다. 갑자기 비가 왔다.

    11. 비가 개였다. 조련(操鍊습사(習射)를 하였다. 군대의 위용(威容)이 더욱 씩씩해졌다.

    12. 김필선(金弼善)이 격문을 보내어 말하기를,지금, 국가(國家)가 불행하여 도적들의 침공(侵攻)을 받으니, 신자(臣子)의 도리(道理)에 누군들 슬프고 분한 마음이 없겠는가? 이는 또한 충성(忠誠)을 다할 날인 것이다. 그러나 탄환(彈丸, 작다는 표현)처럼 작은 고을(김필선이 의거한 고을을 말함.)이라, 군병(軍兵)이 백명(百名)에도 차지 못하고, 양미(糧米)도 백여곡(百餘斛)에 차지 못하니, 장차 어떻게 널리 남아있는 것(양미(糧米)를 말함)을 찾아내어 만분의 일이라도 보충(補充)할 것인가? ... 라고 하였다.

    13. 김필선(金弼善)이 가동(家僮)과 의()를 좋아하는 사람 김영무(金英武배수의(裵守義박치덕(朴致德박경덕(朴慶德) 등 백여 명을 이끌고 의청(義廳)으로 왔다. 채홍국이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칠 충신은 바로 필선(弼善)과 같은 그런 사람이다.라고 하고 곧 추대하여 향사도감(餉士都監)을 삼았다.

    14. 습사(習射, 활쏘기 훈련)를 하였다.

    15. (결락) 왜적(倭賊)이 전주(全州)에 침범(侵犯)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비상조련(非常操鍊)을 하였다.

    16. 채홍국이 병량(兵糧) 12 (), 병철(兵鐵) 150 ()을 군용(軍用)으로 보충하였다.

    17. 고덕봉이 말하기를,군용(軍用)이 부족하니, 격문을 부안읍(扶安邑)으로 보내서 청()하여 쓰자.고 하였다. 좌우가 모두 좋다고 하였다. 즉일(卽日)로 편지를 보내어 병량(兵糧) 5(), 궁시(弓矢) 등의 물건을 받아서 썼다.

    18. 피 마시는 의식(儀式)으로 동맹(同盟)을 하니, 군용(軍容)이 엄숙(嚴肅)해졌다.

    19. 인정(人丁)을 점열(點閱)하였다.

    20. 이성춘(李成春)이 와서 동맹록(同盟錄)에 참가하였다.

    21. 김이진(金以振)이 한질(寒疾)로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고덕봉·조익령이 유지(油紙)로 시체(屍體)를 싸서 토항(兎項, 地名 토끼머리) 남쪽 기슭에 내다가 임시로 매장(埋葬)하였다.

    23. 훈련을 하였다. 각각 재략(才略)을 사용하였다. 채홍국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았다. (결락) ...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고덕봉이 말하기를, 씩씩하구나, 장군(將軍)이여! 반드시 군공(軍功)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24. 인정(人丁)을 점고(點考)하였다. 전사(戰死) 7. 원수(元數) 외에, () ... (결락) 등이 더 남아 있다.

    25. 맡을 일을 분정(分定)하였다.

    26. 마을 사람이 소 한 마리를 끌고 와서 바쳤다. 종일(終日) 군사(軍士)들을 향응(饗應)하였다.

    27. 가랑비가 저물도록 개이지 않았다. 김영(金榮)과 아들 귀복(貴福정립(廷立)이 비를 무릅쓰고 왔다.

    28. 비가 좀 개였다. 이익성(李益盛)이 왔다. 곧 추대하여 감포관(監浦官)을 삼았다.

    29. 이작(李綽)이 군량(軍糧) 200 ()을 스스로 바쳐, 군용(軍用)에 보충하였다.

    10월 초1. 조련(操鍊= 훈련)을 하였다.

    2. 조익령(曺益齡)이 병량(兵糧) 8 (), 편전(片箭) 300 개를 가지고와서 바쳤다.

    3. 주번길(朱蕃吉)이 추풍령(秋風嶺)으로부터 말[] 하나, [] , 건장(健壯)한 노복(奴僕) 60 명을 거느리고 (결락) [조령(鳥嶺)]으로 가려고 하다가, 중로(中路)에서 흥덕(興德)의 의병장(義兵將)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군례(軍禮)로 나와서 신고(申告)하였다. [야수선생은] 참모관 조익령으로 하여금 영접하게 하며 말씀하기를,장군은 용암(龍巖)의 아들이니, 충의(忠義)가 당당(堂堂)하여 반드시 여기서 순국(殉國)할 것이다. 하늘이 장군을 여기에 보낸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곧 추대하여 돌격선봉(突擊先鋒)을 삼았다.

    4. 수원산성(水原山城)에서 도원수(都元帥) 권률(權慄)이 비로소 흥덕(興德)의 창의(倡義)를 듣고, 편지를 전하여 위면(慰勉)하기를, 장순(張巡허원(許遠)의 책임이, 제군(諸君)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5. 종일 습사(習射)를 하였다. 김영(金榮)을 추대하여 감포관(監浦官)을 삼았다.

    6. 김필선(金弼善)을 시켜 격서(檄書)를 만들어, 법성진(法聖鎭)에 부쳐 영()을 내리기를,우리 의청(義廳)에는 군사가 많고 군량(軍糧)이 충분하다. 널리 병량(兵糧) 4 백석을 내놓아, 3 백석은 의곡장(義穀將) 기효(奇孝)에게 맡겨, 향사부감(餉士副監) 채명달(蔡命達)과 회동(會同)하여, 조운(漕運)하여 용만(龍灣= 義州) 행재소(行在所)에 바치고. 일백 석()은 영남(嶺南) 곽재우(郭再佑)의 의병소(義兵所)로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7. 왜놈 7명을 얻었다. 4명은 참()하여 침범(侵犯)하지 못한다는 뜻을 보이고, 3명은 놓아주어 돌아가서 은위(恩威)의 군령(軍令)을 전하도록 하였다.

    8. 주번길(朱蕃吉)이 조령(鳥嶺, 새재)의 싸움에 대하여 듣고, 군병(軍兵)을 이쪽으로 이동할 것을 청()하였다. 의려장(義旅將) 채홍국이 말하기를,기기(器機)가 지금 아직 미비(未備)하고, 사졸(士卒)이 전장(戰場)에 익숙하지 못하니, 반드시 불리(不利)할 것이다. 이는 군대를 머물게 하여 각자 무술을 연마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니 번길은 돌출(突出)하여 곧바로 달아났다.

    9. 홍계훈(洪繼勳)이 충청도 연기(燕岐)로부터 왔다. 말을 전하기를, 왜놈들이 도로(道路)에 꽉 차서 여염(閭閻, 마을)에서 사람을 죽이고 약탈(掠奪)하니 빨리 진병(進兵)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10. 비바람이 크게 일었다. 도로(道路)를 다닐 수 없었다.

    11. 비가 조금 왔다. 전후대(前後隊)를 합진(合陣)하여 훈련하였다.

    12. 어떤 사람이 갈색(褐色)의 원숭이를 끌고 왔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니, 필시(必是) 왜적(倭賊)이면 잡아 죽여야 한다. 국문(鞠問)하니 왜적이었다. 그 자리에서 이를 참()하였다.

    13. 이민덕(李敏德)이 와서 말하기를,평양(平壤)의 남궁견(南宮涀)이 파직(罷職)되었다.고 하였다.

    14. 첫눈이 왔다.

    15. 조익수(曺益壽)가 군대를 이동하여 진주(晉州)로 가기를 청하였다. (결락)

    16. 종일 검술(劍術)을 연마(鍊磨)하였다.

    17. 김헌이, 전시춘(田始春)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국가의 안위(安危)가 이와 같은데, 힘을 다하여 광복(匡復)하는 것이 신자(臣子)의 옳은 도리(道理)이거늘, 지금 그대는 눈물을 흘리니, 이는 멀리 꾀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8. 눈이 왔다.

    19. 눈이 왔다.

    20. 김상동(金尙同)이 말을 전하기를, 평양(平壤)의 남궁견(南宮涀)이 복직(復職)되었다.고 하였다.

    21. 부안(扶安)의 의군(義軍) 박창대(朴昌大), 거주민(居住民)을 침략(侵掠)하였다는 죄로 군법(軍法)으로 참수(斬首)하였다. 군중(軍中)에서 또 도망병(逃亡兵) 7명을 잡아 진문(陣門)에 머리를 걸어 놓으니, 전군(全軍)이 벌벌 떨고, 감히 왔다갔다 움직이지 못하였다.

    22. 오봉수(吳封壽)가 들어와서 고()하기를, 아까 박운(朴雲)의 말이, 변이중(邊以中)이 수원(水原안성(安城) 땅에 둔병(屯兵)하고 있어서 진군(進軍)이 가능하다... (결락)고 하였다.

    23. 군사(軍士)를 호궤(犒饋, 잘 먹이는 것)하였다.

    24. 인정(人丁)을 점고(點考)하였다.

    25. 의려장(義旅將)이 동맹(同盟)한 제원(諸員) 수백인(數百人)과 의곡(義穀) 일백석(一百石)과 함께 비로소 남당(南塘) 장등(長嶝)을 출발(出發)하여 정읍(井邑) 천원(川原)에서 숙영(宿營)하였다.

    26. 습사(習射)를 하였다.

    27. 장성(長城) 사거리(四街里)에 도착하였다.

    28. 담양(潭陽) 읍저(邑邸)에 도착하였다.

    29. 곡성(谷城) 목사동(木寺洞)에 이르렀다.

    30. 순천(順天) 쌍암(雙巖)에 이르렀다.

    11월 초1. 김필선(金弼善)이 석보창(石堡倉)의 곡식(穀食)을 열어, 군사(軍士)를 머물게 하고 조향(調餉)을 매우 균평(均平)하게 하였다. 채홍국이 말하기를,지금의 필선(弼善)은 옛날의 소하(蕭何)로다.라고 하였다.

    2. 비가 와서 진군(進軍)을 멈추었다.

    3. 군대를 주암(朱巖)으로 이동(移動)하였다. 넉넉히 7일간 군사를 멈추어 개별적으로 훈련(訓練)하였다. (4일부터 10일까지의 일기는 결락되었다.)

    11. 인정(人丁, 壯丁)을 점열(點閱)하였다. (결락) 군사(軍事)를 토의(討議)할 때, 즉 작전회의(作戰會議)를 할 때, 이제독(李提督, 중국의 提督 李如松을 말함.)이 평양(平壤)을 극복(克服)하였다는 말을 듣고, 또 제독(提督)이 벽제(碧蹄)에서 불리(不利, 敗戰)하였다고 하고, 송경략(宋經略)이 왜적과의 화의(和議)를 주장(主張)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결락) 채홍국·고덕봉·조익령·이대준·채우령 등이 서로 마주 보며 통곡(慟哭)하고 말하기를, 우리나라 시국(時局)의 위태로움이 어찌 이렇게 지극하기에 이르렀는가? 이제는 먹을 것이 다하고 군대를 파()하게 되니, 여기 머무는 것은 무익(無益)하다. (결락) 환진(還陣)하는 것이 좋겠다.하고 곧 출발하였다.

    12. 군병(軍兵)을 이끌고 남원(南原)에 도착(到着)하였다.

    13. 적성강(赤城江) 강두(江頭)에 이르러 제군(諸君)이 각각 한 수()씩 시를 읊고 그 분()한 마음을 달래었다.

    14. 순창(淳昌)에 이르러 인정(人丁)을 점고(點考)하였다. 전사(戰死)7명이었다. 혹은 죽고 혹은 도망하였다고도 한다.

    15. 적치(賊峙)에 도착하여 이틀을 머물러 주둔(駐屯)하였다. 합진(合陳)하여 영()을 넘었다. 여기에 머물다가 영()을 넘었가고 하여, 당시 사람들이 이름 지어 부르기를, 둔월령(屯越嶺)이라고 하였다.

    16. 유진(留陣)하였다.

    17. 정읍(井邑)에 이르러 군사(軍士)를 잘 먹였다.

    18. 이어 각자 파귀(罷歸)하였다.

    19. 김필선과 고덕봉·조익령·이작 등은 또 병량(兵糧)을 상의(相議)하였다. 이날의 기(), 겁암(㤼巖) 김공(金公)의 후손 집에서 얻었는데, 말단(末端)에 쓰기를, 만력 정유(丁酉) 9월 초9일 참모관(參謀官)의 묘우(墓宇)에서 베껴 썼다.고 하였으니, 개개 당일(當日)에는 이 기()가 조공(曺公, 曺益齡)의 집에 있었던 것인데, 실전(失傳)되었으니 슬프도다.

    글 사이에 결자(缺字)가 많고, 더러는 자세하지 않은 것도 있으니 이것을 보는 사람은 용서(容恕)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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