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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수실기(野叟實記) 야수선생채공실기서문(2)(3)


    남당회맹단 의병대장 채홍국장군 야수실기를 차례대로 게시합니다.



    野 叟 實 記





    野叟先生蔡公實記序 (2)

    昔我宣廟壬丁之厄 可勝言哉. 宗社生靈幾乎亡滅 而僅存太半 是忠義之士忘身殉國之力. 吳城之野叟先生蔡公 則其一也. 嗚呼 今去先生之歾 殆三百有餘年矣 其精忠大節 炳炳若日星 可泯滅不得 而但一部實記 藏在巾衍 尙未刊行於世 雖緣子姓之單寒 其在士林 亦不得辭其責也. 日 本孫秦永與士林 以所藏草本 將登諸繡梓 問弁文於余 辭不獲已. 遂復之曰 先生忠義之實 固不待此記之刊行而自如也. 然 將欲傳諸久遠 非此莫之能也. 何哉? 此記之作 始焉而會盟義士 中焉而轉戰斬獲 終焉而先生三父子同地戰亡之實 無不備錄. 今讀其記·觀其事 則先生當日奮義敵愾之風 凜凜然在目也. 後之人 將欲講先生於百世之下 捨是記何以哉? 然則是篇之行 不獨先生之跡昭然著見于世 其所以立人紀而補世敎者 曷云淺尠. 因此而復有所感. 嗚呼 今之世與先生之世有間矣 如使先生在今日 目見今日之事 則忠憤所激 必不但己出而勤王 則庶使宗社有恢復之機 生靈有蘇息之望 而九原難 復作悲夫.

    壬申五月下澣後學前主事長澤高舜鎭 謹序 

     

    야수선생 채공 실기 서문(2) (野叟先生蔡公實記序)

    전주사 장택 고순진(高舜鎭)

    옛날, 우리 선조대왕 임진·정유년의 불행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종묘(宗廟사직(社稷)과 백성들의 산목숨이 거의 다 멸망할 뻔 하였다가 겨우 그 태반(太半) 만이 살아남았는데, 이것은 충의(忠義)의 선비들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죽은 힘인 것이다.

    흥성(興城, 興德의 별명. 원문에吳城으로 돼 있으나 興城誤植이다.)의 야수선생(野叟先生) 채공(蔡公)은 그런 분 가운데 한 분이다.

    아아, 지금 선생께서 돌아가신지 거의 300여 년이 되었다. 그 정충대절(精忠大節)은 해와 별처럼 번쩍번쩍 빛나니, 뒤섞이거나 없어질 수 없는 것인데, 다만 일부(一部) 실기(實記)만이 건연(巾衍) 가운데 소장(所藏)되어 있을 뿐, 아직도 세상에 간행(刊行)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비록 자손들이 고단(孤單)하고 빈한(貧寒)한 때문이지만, 그것은 사림(士林)에게도 그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어느 날, 본손(本孫) 진영(秦永)이 사림(士林)과 함께 와서 소장(所藏)한 초본(草本)을 화려하게 출판하려고 하면서 내게 서문을 써달라고 하기에,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드디어 대답하여 말하기를,

    선생께서 충의(忠義)하신 사실(事實)은 굳이 이 실기(實記)의 간행(刊行)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자여(自如)한 것이지만, 그러나 오래오래 전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아니고는 능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실기(實記)의 작편(作編)이 처음에는 회맹(會盟)한 의사(義士)를 낱낱이 적었고, 중간에는 전전(轉戰)하면서 왜적을 죽이고 포로로 잡은 것을 적었고 마지막에는 선생 삼부자(三父子)가 같은 땅에서 전사(戰死)한 사실을 적었으니, 갖추어 기록하지 않음이 없다.

    지금 그 실기(實記)를 읽고 그 사적(事蹟)을 보면, 선생께서 당일(當日)에 분의(奮義적개(敵愾)하신 모습의 늠름(凜凜)함이 눈으로 보는 듯하다. 후대(後代) 사람들이, 백세(百世)가 내려간 다음에 선생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려면, 이 실기(實記)가 없고서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러니 이 편()의 간행(刊行)은 다만 선생의 자취를 세상에 환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기강(紀綱)을 세우고 세상을 교육(敎育)하는 데 보탬이 되는 것이니, 어찌 사소(些少)한 일이라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다시 소감(所感)이 있다.

    아아, 지금 세상은 선생께서 살아 계시던 세상과는 차이가 있으니, 선생께서 오늘날에 살아계셔서 눈으로 오늘날의 일을 보신다면, 충분(忠憤)에 격동(激動)되어 반드시 몸소 나서서 근왕(勤王, 왕실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하실 뿐만이 아닐 것이니, 종묘·사직으로 하여금 회복(恢復)의 기회(機會)가 있고, 생령(生靈)들이 다시 소생(蘇生)할 희망(希望)이 있을 것인데, 구원(九原, 저승)의 길이 어려우니, 다시 슬퍼하는 것이다.

    임신년(壬申年, 1932) 5월 하순에

    후학 전 주사 장택 고순진(高舜鎭)이 삼가 서문을 쓰다.



    野叟先生蔡公實記序 (3)

    功勳異於學問. 功勳取則學問掩矣. 吾先祖野叟先生 當龍蛇之亂 以林下遺逸 奮起草野 累立奇勳 而不肖自齠齡 嘗見興義討賊文·赤城江題詠及傳檄文 其它興義所完議與日記 手澤尙新 凜凜若當時聽命 而不啻其忠義攸激 其文體之絡繹 詩句之華麗 可擬於經術才行 只以功勳之烈爀 掩其學問之深造 豈非後來之遺憾哉. 然生於百歲之後 想其百歲之前 先生之平日著述 不爲不優 必爲兵燹之餘 無人掇拾 所存於篋笥者 只此數條件而已. 噫 惟竢財力之富贍 置諸巾衍之藏 弆不以鋟梓 傳後 愈懼夫愈失其眞 儒論與門議 不謀脗合 以先生之所著略干文爲原編 以朝家之贈褒·士林之薦軸爲附錄 編成上下 付諸剞劂 然不肖 識見淺昧 眞贋相雜 訛謬必居 後之覽此者 庶或免知我罪我之責否. 古人曰 一鬣髮不似 便是別人樣 何敢誇美闡揄 畧敍功勳之大槩·學問之萬一 弁于卷首.

    歲舍壬申流火之月下澣 十世孫秦永 盥手謹書



    야수선생 채공 실기 서문(3) (野叟先生蔡公實記序)

    19세손 진영(秦永)

    공훈(功勳)은 학문(學問)과 다른 것이니, 공훈을 취하면 학문이 가려지게 됩니다. 내 선조 야수선생(野叟先生)은 용사지난(龍蛇之亂, 壬辰倭亂)을 당하여, 산림(山林)에 사는 유일(遺逸)의 몸으로 초야(草野)에서 분기(奮起)하시어, 여러 번 뛰어난 공훈(功勳)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불초(不肖)78세 어린 시절부터 흥의토적문(興義討賊文적성강제영(赤城江題詠)과 전격문(傳檄文), 그 밖의 흥의소(興義所)의 종의(宗議)와 일기(日記)를 본 적이 있는데, 손때가 아직 새로웠으며, 당시에 청명(聽命)함이 늠름(凜凜)하였으며, 그 충의(忠義)가 격렬(激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문체(文體)의 낙역(絡繹)과 시구(詩句)의 화려(華麗)함이 경술(經術)과 재행(才行)으로 이름난 사람과 비교될 만 하였는데, 다만 공훈(功勳)이 열렬(烈烈) 혁혁(赫赫)하였기 때문에 그 학문의 깊은 조예(造詣)가 가려졌으니, 어찌 후래자(後來者)가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100년 뒤에 태어나, 100년 전의 일을 생각할 때, 선생의 평일(平日)의 저술(著述)이 넉넉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필시(必是) 병란(兵亂)을 겪은 나머지, 수습(收拾)하는 사람이 없어서 협사(篋笥, 상자)에 남아있는 것이 이 몇 가지 문건(文件) 뿐인 것입니다.

    아아, 오직 재력(財力)이 넉넉해지기를 기다려, 건연(巾衍)에 감추어두고 거두어 출판(出版)하지 않는다면, 뒤에 전할수록 더욱 그 참모습을 잃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유림(儒林)에서 (출판하자는) 여론이 일어나고, 문중에서의 의논이 꾀하지 않고도 딱 합치(合致)되어, 선생께서 지으신 약간의 글을 원편(原編)으로 하고, 국가에서 내린 증직(贈職)과 포상(褒賞), 사림(士林)의 천축(薦軸)을 부록으로 하여 상하(上下)로 편성(編成)하여 출판(出版)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초(不肖)는 식견(識見)이 얕고 어두워서, 진짜와 가짜가 서로 섞이고 잘못된 점이 있을 것이라, 후세(後世)에 이것을 보는 사람이, 혹 내 죄를 알고도 내 책임을 면해 주기를 바랍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수염이나 머리카락 한 가닥이라도 비슷하지 않으면 곧 딴 사람의 모양이 된다고 하였는데, 어찌 감히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잘 했다고 하겠습니까? 간단히 공훈의 대개(大槪)와 학문의 만분(萬分)의 일()을 서술하여 책머리의 서문으로 하는 바입니다.

    임신년(壬申年, 1932) 7월 하순에,

    10세손 진영(秦永)이 손 씻고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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