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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수실기(野叟實記) 유사록, 발


    남당회맹단 의병대장 채홍국장군 야수실기 게시 연재

    野 叟 實 記




    有司錄 高宗九年壬申(1872) 印行時

     

    유림(儒林)


    도유사(都有司) 전주사(前主事) 고순진(高舜鎭)

    유사(有司) 직원(直員) 이병풍(李秉豊)

    총무(總務) 김영래(金永來) 이정섭(李鼎燮)

    교정(校正) 이선구(李璿九) 김구현(金九鉉) 백락찬(白樂贊)

    정서(正書) 김병식(金秉植)

    감인(監印) 이상기(李相淇)

     

    본손(本孫)


    도유사(都有司) 채술영(蔡述永)

    감인(監印) 채학묵(蔡學黙)

    부유사(副有司) 채동윤(蔡東允) 채영묵(蔡令黙)

    장재(掌財) 채진영(蔡秦永) 채영기(蔡永基) 무안송산(務安, 松山)

    채병양(蔡柄永) 채중현(蔡重鉉) 낙안(樂安)

    도총무(都總務) 채동한(蔡東熯)

    교정(校正) 채경렬(蔡京洌)

    부총무(副總務) 채양영(蔡陽永) 채동휘(蔡東輝) 채시영(蔡始永)

    정서(正書) 채기영(蔡基永) 채동락(蔡東洛) 채병묵(蔡秉黙)

    채동섭(蔡東燮) 채동주(蔡東柱)




    (8) 乙丑年(1925) 影印本發行時

     

    此 我十三世祖贈資憲大夫兵曹判書野叟府君實記 而族大父秦永氏之所蒐輯 而印行於壬申者也. 嗚乎府君之貞忠大義 炳史乘 昭乎日星 而未得闡揚 一如當日諸公之爲職 由子姓零替之故 何言何言. 往在癸卯 知郡申祥雨之樹紀績碑于盟壇也 長劒五柄 矢鏃三升 冑·玉纓·酒瓦器·當日遺物 出現于壇中 乙巳 胡伐峙戰績碑 指定地方紀念物 癸亥 副郡守崔仗範 周圍鐵銏 盟壇又賴士友之 發掘史蹟 注力乎文化財 而顧力拙者之所難必也 但刊行之久 印本稀貴 難以副讀者之求 於是 囑慎友思範 畧正誤落 幷四卷 影印爲一糾 以廣其傳吾祖之績 庶因此而益著于世乎否. 不揆僭㑀畧識所感于卷尾如右云.

    乙丑梧秋節 後孫 奎燮 謹識

          

     

    발문() (8) 을축년(1925) 영인본 발행시

     

    이것은 우리 13세조(世祖)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야수부군(贈資憲大夫兵曹判書野叟府君)의 실기(實記)이며, 족조(族祖) 진영씨(秦永氏)가 수집(蒐輯)하여 임신년(1872)에 인행(印行)한 것이다.

    아아, 부군(府君)의 정충대의(貞忠大義)는 사승(史乘)에 빛나서 밝기가 해와 별 같은데, 천양(闡揚)하지 못한 것은 한 결 같이 당일(當日) 제공(諸公)의 직유(職由)와 자손들이 영체(零替)한 때문이니 무슨 말을 하랴.

    지난 계묘년(1903)에 지군(知郡, 郡守) 신상우(申祥雨)가 회맹단(會盟壇)에 기적비(紀績碑)를 세울 때, 장검(長劒) 다섯 자루와 살촉 석 되[3갑주(甲冑옥영(玉纓주와기(酒瓦器) 등 당일(當日)의 유물(遺物)이 단() 가운데서 나왔다. 을사년(1905)에 호벌치전적비(胡伐峙戰績碑)가 지방기념물(地方記念物)로 지정(指定)되었다. 계해년(1923)에 부군수(副郡守) 최장범(崔仗範)이 둘레에 철책(鐵柵)을 둘렀다. 회맹단(會盟壇)은 또 사우(士友)의 발굴(發掘)에 힘입어 사적(史蹟)을 문화재(文化財)로 만들려고 주력(注力)하고 있는데, 힘이 없음을 돌아볼 때 기필(期必)하기는 어렵다.

    다만 간행(刊行)한 지가 오래되어, 인본(印本)이 의귀(稀貴)하여 독자(讀者)의 요구에 부응(副應)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에 친구 신사범(慎思範)에게 부탁하여 대략 오류(誤謬)와 누락(漏落)을 바로잡아 모두 4 ()으로 한 규()를 만들어 우리 조상의 업적(業績)을 널리 전하려고 하며, 이로 인하여 더욱 세상에 저명(著名)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참람(僭濫)함을 헤아리지 않고 대략 소감(所感)을 권미(卷尾)에 이상과 같이 적는다.

    을축년(乙丑年, 1925) 오추절(梧秋節, 7)

    후손(後孫) 규섭(奎燮)이 삼가 기록함.




    발문() (9) 경인년(2010) 번역본 발행시

     

    야수실기 번역본을 내면서

    후손 면묵 (冕黙)

     

    우리 민족이 반만년 영고성쇠(榮枯盛衰)의 역사 속에서도 굳건히 맥을 이어 오는 것은 순국한 열사와 의사들의 조국수호에 대한 충절에 연유함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제패(制覇)의 야망(野望)을 품고 대륙인 중국(中國) 명나라를 친다는 구실로 한반도를 교두보(橋頭堡)로 삼으려고 하는 일본이 국력이 허술한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한 만행이었다.

     

    유구(悠久)한 역사를 통하여 우리나라에서 수없이 겪은 난()가운데 가장 처절(悽絶)했던 난()은 임진왜란이다. 이는 난리 성격의 난이 아니고 전쟁이었다. 그 시대의 세계사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대규모의 대군이 독립 국가를 무조건 일방적으로 침략한 이 난()은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이르기까지 장장 7년 동안 계속되었고 끝내는 조선이 명예롭고 완벽하게 승리를 하였다.

    이 전쟁의 승리 주역은 다름 아닌 우국충정(憂國衷情)에 봉기(蜂起)한 임란의병 공신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임란공신은 대개 후하게 나라의 녹()을 먹은 높은 양반들이 아니라,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닦은 산림(山林)의 선비가 농민(農民)과 공인(工人), 사노(私奴), 관노(官奴)와 하급관리(下級官吏)를 거느리고 의거(義擧)하였던 것이며, 목숨은 빼앗겨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편단심(一片丹心)의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몸을 던져 진충보국(盡忠報國)한 의군(義軍), 임란공신의 충성심은 우리 민족 고유의 충효사상(忠孝思想)에서 비롯되었고 그 충효정신은 강상(綱常)을 중요시하는 위기지학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임란으로 국운의 위태로움이 백척간두에 있을 때, 이 고장의 뜻 있는 선비 야수(野叟) 채홍국(蔡弘國)과 고덕붕(高德鵬), 조익령(曺益齡), 김영년(金永年) 등이 회동, 이곳 흥덕면 남당리(興德面南塘里) 장등에서 의병을 조직 야수 채홍국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짐승의 피를 마시며 동맹할 때, 의병장이 말하기를 나의 육신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에 임금님도 부모와 같다. 우리의 국운이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에 있으니 우리는 자식된 도리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는 각오(覺悟)로 임전(臨戰) 진명보국 한다.”라고 역설하니 모두가 이에 동의하고 맹서를 하였다.

    이렇게 혈맹한 의사가 92명이며 이 분들을 92의사라 한다. 이어 왜적 토벌 전을 전개, 전남 순천까지 진군하여 추적, 토벌하였는데 명나라 원군(援軍)과 왜군의 화의로 휴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득이 회군(回軍)하니, 억울함에 통곡하였다. 귀로(歸路) 순창(淳昌) 적성강두(赤城江頭)에 이르러 억분표충(抑憤表忠)하는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시()를 지어 마음을 달래며 전북 정읍(全北井邑)에 이르러 해산하였다.

     

    5년 후 정유년 왜적이 재침하니 의병장 야수 채홍국은 향사도감 김영년과 참모관 조익령과 숙의하여 나라 운명이 전날보다 배나 어려워 경악할 뿐이니, 신하된 도리에 어찌 밤낮을 편히 보낼 것인가. 의로운 정신을 발휘, 전날의 동지와 재회맹(再會盟)하기로 하며 92의사를 다시 불러 모아 동맹하니 의승(義僧) 5인을 비롯, 35인이 추가로 동맹하고 그 후에도 가맹하는 의사(義士)가 이어져 세력이 막강 하였다.

    드디어 1597(정유년) 323일 왜적이 흥덕(興德)에 침략했다는 소식에 우리 의군(義軍)은 즉시 출병, 흥덕에 이르니 먼저 와서 싸우는 영암(靈岩)과 해남(海南)의 의병과 합세하여 함께 토벌하여 격전(激戰)하는 가운데 아군(我軍)이 많이 전사하였으나 적은 패퇴 산주(敗退散走)하였다. 이 싸움이 흥덕 배풍령(興德排風嶺)전투이다.

    며칠 후, 부안 변산(邊山)의 위반동(蝟蟠洞)으로 싸움이 이어져 우리 의군(義軍)은 징을 치며 진군추격(進軍追擊)하여 상략치(上掠峙) 장등에 이르니, 갑자기 왜적의 수가 급증하면서 적과의 접전(接戰)은 대전(大戰)으로 번져 연일 혈전이 거듭되어 향사도감 김영년(餉士都監 金永年)이 전사하고 맹주장 고덕붕(盟主將 高德鵬)은 적에 사로잡히니, 의병장 채홍국(義兵將 蔡弘國)은 강한 전의(戰意)와 궁술(弓術)로 탄력항전(殫力抗戰)을 거듭하다가 활을 쏜 양 손가락이 절단되고 화살은 다하니 최후에는 육박전으로 몸을 던져 싸우다 적봉에 비운의 최후를 맞았다. 이 때, 참모관 조익령(參謀官曺益齡)도 전사하였다.

    이 참상(慘狀)을 목도(目睹)한 아들 명달(命達)과 경달(慶達)이 울분과 복수심에 급히 구원(救援)하려 하였으나 과부적중(寡不敵衆)으로 급기야 전사하니 참으로 비극의 참상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 전투에서 채씨 한 집안 33인이 전몰(戰歿)하고 혈맹(血盟)92명 의군을 비롯하여 무수한 의병이 전사하였고 왜적은 전사한 의병의 코()와 귀()를 베어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실로 비참한 임진, 정유왜란 상략치전(上掠峙戰)의 모습이었다. 통분의 싸움이고 천추의 한이 서린 이곳을 그 후 호벌치(胡伐峙)”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이 때, 베어 간 코와 귀를 무덤으로 간직 해둔 일본국 교도(京都)와 오카야마(岡山)현 비젠(備前)시 교외 야산 기슭에서 19931126, 39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잘렸던 그 현장인 호벌치에 코 무덤을 천장(遷葬)하고 추모하며 보존하고 있다.

    일본에 묻혀 있던 이 무덤은 부산외국어대학교 일어과 김문길(金文吉) 교수가 처음 발견했고 이를 비총 환국 안장 추모사업 위원회”(鼻塚還國安葬追慕事業委員會) 위원장이며 부산 자비사 주지인 박삼중(朴三中) 스님이 적극적으로 주선(周旋)하여 고국에 봉환한 것이다. 진정 이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당시 흥덕의 배풍령 싸움과 부안 호벌치 전투에 참전하여 순의(殉義)한 의군의 발상지(發祥地) 회맹단 자리는 커다란 흙무덤으로 축단되어 있고 일명 ()무덤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현재 고창군 향토 문화유산 제 4(高敞郡鄕土文化遺産第4)로 지정하고 있다.

    또 당시의 유적을 기리는 임진창의 남당 회맹단 기적비”(壬辰倡義南塘會盟壇紀蹟碑)를 세웠는데, 이 기적비를 세울 때 출토된 유물이 있다. 이 유물은 당시 의군이 쓰던 병기로 보이는 1) 철검(鐵劍) 4자루(길이 88cm), 2) 시족(矢鏃: 화살촉) 다수, 3) 구슬 갓끈(玉纓) 100여 점, 4) 옹기항아리(甕器) 1점 등이며 국립전주박물관(당시 전주박물관설립위원회)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흥덕면 흥덕리에도 호남흥성창의비를 세워 숭모하고 있다.

     

    이러한 의병활동의 사실에 대하여, 오래 전에 일기로 생생하게 기록한 야수 실기”(野叟實記)의 복사본을 우연히 우리 대종회 고 채 갑병, 전회장으로부터 입수하였고, 또한 의병장 채 홍국에게 조정에서 병조판서로 증직한 사안(事案)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 실기 내용은 모두 한자(漢字)로 기록하였으므로 읽기가 매우 어려워 종친들과 같이 임란 역사를 이해하고 또 이를 좀 더 널리 알리고자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시대적 필요에 따라 현대문(現代文)으로 번역, 출간하려던 차에 동방연서회 백곡 김대현(東方硏書會 白谷 金大顯)선생님의 천거로 낙원동에 계시는 한문 번역 전문가인 김희동(金禧東) 선생을 수차례 방문하여 현대문(現代文)으로 번역을 요청하여 완역(完譯), 출간하는 것이다.

     

    이 기록은 300여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편집(編輯)하였으나, 틀림없는 사실의 기록으로 더 없이 소중(所重)한 것이다.

    또한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야수실기(野叟實記)의 이해에 도움이 될까 하여 필요한 사진과 교지, 영정 등과 함께 당시 고제봉 선생의 수초본(手草本)으로 보이는 복사본 격문(檄文), 유품(遺品) 일부를 추가하고, 원문 글씨를 정확히 바로잡기 위해 타자하여 번역문 앞에 싣고 원문사진(原文寫眞)을 부록으로 복사, 첨부하였다.

     

    이 한글 번역본의 편찬에 있어 감사를 드려야 할 분들이 많다. 특히, 백곡 김대현(金大顯)선생님, 김희동(永嘉文化社 金禧東)선생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그리고 야수실기를 주신 고 채갑병 (蔡甲秉)전회장님, 본 임란 회맹 92의사를 제향(祭享)하는 모충사(慕忠祠)의 이전중건(移轉重建)과 이 사업에 헌신(獻身)해 주신 흥덕(興德)의 신사범(愼思範)선생님 그리고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당질(堂姪) 규섭(蔡奎燮)에게 고맙고 감사하며 자료 정리에 협조한 아우 양수(蔡良秀)와 족제인 안묵(蔡安黙) 그리고 당질(堂姪) 상진(蔡相鎭)과 번역발간에 협찬을 아끼지 않은 야수 직계 후손과 여러 유사에게도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끝으로 본 야수실기를 통해 우리의 가슴 아픈 과거사와 약소국가의 쓰라린 애사(哀史)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의로운 우리 선조(先祖)의 삶을 본받아 혼탁한 현대 사회에 충효의 기틀을 다지고 세우며, 나아가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후대를 위한 교육에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발문을 마친다.

    2010(庚寅) 7 월 일

    야수공(野叟公) 12대손 면묵(冕黙)이 삼가 발문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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