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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수실기(野叟實記) 발


    남당회맹단 의병대장 채홍국장군 야수실기 게시 연재

    野 叟 實 記



    (1)

     

    吾夫子曰 微管仲 吾其被髮左袵 若無義旅 則亦未免左袵 而三千里禮儀之國 混入於夷狄禽獸之域矣. 我國 當龍蛇之變 國勢扤揑 危如毫髮之輕 民情騷擾 畏其首尾之禍 狂炎熾天 鼎沸江淮之勢 腥血汚地 瓦解金陵之城 聖上憂之 按五節而分憂 命喩新伯 仗金策而間罪 慰遣元戎 往汝勉之 共扶社稷之命 其時也 野叟蔡先生 素有忠孝 奮不顧身忘己 輸忠與宗族及同志九十二賢 設壇南塘 歃血同盟 不謀而成 不期而會 誰無起倡之心 同聲相應 同氣相求 咸有斥倭之議 刻日誓衆 期月捷再 適値厄運星 殞於胡伐峙扶安地 父死於國 子死於忠 心切報國 立節一世 公之三父子 可謂死得其所矣. 噫 後之君子 覽公之實記 而父子三人同地殉節 則豈不驚服興感哉. 不佞 畏添有司之任 一而慕先生之忠 一而仰先生之風 然而以寡謏 豈足以知公之所蘊哉. 今於文字剞劂之役 不敢以不文辭 謹爲之撰.

    壬申五月下澣後學全州李鼎燮謹書

     

    발문() (1)

     

    우리 부자(夫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관중(管仲)이 없었더라면, 나도 그렇게 오랑캐 풍속인 피발좌임(其被髮左袵)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만약 의려(義旅, 義兵)가 없었더라면 역시 오랑캐 풍속인 좌임(左袵)을 면치 못하고 삼천리 예의지국(禮儀之國)이 이적(夷狄, 오랑캐)이나 금수(禽獸, 새나 짐승)의 구역(區域)으로 혼입(混入)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용사(龍蛇)의 변()을 당하여 나라의 형세(形勢)가 불안(不安)하였고 위태롭기가 터럭의 가벼운 것 같았으며, 민정(民情)은 소요(騷擾)하여 그 수미(首尾, 始終)의 화()를 두려워하였고, 미친 불꽃은 하늘을 태울 듯 치열(熾烈)하여 큰솥이 강회(江淮)에서 끓는 기세(氣勢)로 되고, 비린내 나는 피는 대지(大地)를 더럽혀 금릉지성(金陵之城)이 와해(瓦解)되니, 성상(聖上, 임금님, 선조대왕)께서는 이를 우려(憂慮)하여 다섯 안절사(按節使)를 임명하여 근심을 나누고, 새로운 감사(監司)들에게 유시(諭示)하여 금책(金策)을 잡고 문죄(問罪)하라 명하시고, 원융(元戎, 都元帥)을 위로(慰勞)하여 파견(派遣)하며너는 가서 힘써서 함께 사직(社稷)을 붙들어 세워라.하는 명()을 내리셨다.

    그러한 때에, 야수(野叟) 채선생(蔡先生)은 원래 충효(忠孝)가 있으시니, 분기(奮起)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自身)을 망각(忘却)하여 종족(宗族)과 동지(同志) 구십이현(九十二賢)과 함께 충성을 바쳤다. 남당(南塘)에 단()을 만들어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하니 도모(圖謀)하지 않고도 이루었고 기약(期約)하지 않고도 모였으니, 누군들 창의(倡義)할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겠는가. 동성(同聲)으로 서로 응()하고 동기(同氣)로 서로 구()하니, 모두 왜적을 물리칠 의논(議論)이 있어서 날마다 맹서(盟誓)하는 사람이 많았고 달을 기()하여 두 번이나 승리(勝利)하였다.

    마침 액운(厄運)의 별이 호벌치(胡伐峙, 扶安땅이다.)에 떨어질 때를 당하여 아버지는 나라를 위하여 죽고 아들은 충성(忠誠)을 위하여죽었다. 마음은 나라에 보답(報答)하기에 간절(懇切)하여 절의(節義)를 일세(一世)에 세웠으니, ()의 삼부자(三父子)는 당연히 죽을 곳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아, 후세(後世)의 군자(君子)는 공의 실기(實記)를 보고 부자(父子) 세 사람이 같은 땅에서 순절(殉節)하였으니 어찌 경복(驚服흥감(興感)하지 않겠는가. 불녕(不佞, 謙稱)은 외람(猥濫)되게 유사(有司)의 소임(所任)에 보태져서 한편으로는 선생의 충의(忠義)를 사모(思慕)하고 한편으로는 선생의 풍모(風貌)를 우러러보았다. 그러나 아유(阿諛)가 적은 것으로 어찌 충분히 공이 온축(蘊蓄)하신 것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문자(文字)를 간행(刊行)하는 일에 있어서, 감히 글을 잘 못한다는 것으로 사양할 수 없어, 삼가 이렇게 지은 것이다.

    임신년(壬申年, 1872) 5월 하순에

    후학(後學) 전주(全州) 이정섭(李鼎燮)이 삼가 쓰다.



    (2)

     

    嗚呼 此野叟蔡先生實記也. 先生以草野韋布 當島夷凌踏宗社傾覆之秋 決心殉國 會義士而血盟於南塘之上 整軍旅而肉戰于列邑之中 剪伐斬獲 軍功特著 於是乎 方伯褒啓 聖主增秩 權元帥慄 亦以書勉之以巡遠之責 盖先生義而且勇 有可仗之材故也. 若夫討賊之文·義所之書 赤城之吟 其忠肝義膽 凜然於辭氣之表 而屯越峙之稱 胡伐峙之名 亦皆出於時人之口 則于以見先生忠義之高 行陣之實也. 但天不助 順使先生未獻捷書 遽然殞首於賊鋒之下 而二子亦從以殉焉. 此所以志士英雄之淚 至今未乾也. 然論人於千載之下者 只取其盡義而己 成敗利鈍不須論也. 則先生之精忠大節 雖與日月爭光可也. 噫 今日何日 先生不可得見 所可見者惟此記在焉. 慕仰先生忠義者 觀於此 則亦可以知興起之端矣. 今禮鎭 亡國賤俘 有靦面目 苟且偸活 其於先生實記之役 何敢容喙 然重違其請遂以數言塵穢卷末焉.

    壬申五月下澣後學長澤高禮鎭謹跋

     

    발문() (2)

     

    아아, 이것은 야수 채선생(野叟蔡先生)의 실기(實記)이니, 선생께서는 초야(草野)의 위포(韋布)로 섬 오랑캐가 종묘·사직을 짓밟고 엎어버리려는 때를 당하여, 나라를 위하여 죽을 것을 결심하고 의사(義士)들을 모아 남당(南塘)에서 피로 맹서(盟誓)하고 군려(軍旅)를 정돈(整頓)하여 열읍(列邑) 가운데서 육전(肉戰)하여 전벌참획(剪伐斬獲)한 군공(軍功)이 특히 현저(顯著)하였다.

    이렇게 되어 방백(方伯, 監司)이 포계(褒啓)를 올리고 성상(聖主)께서 증질(增秩, 官秩品階를 올리는 것)을 명하시고 원수(元帥) 권률(權慄)이 또한 편지로 장순(張巡허원(許遠)과 같은 책임이 있다.”는 말로 면려(勉勵)하였다. 대개 선생께서 의롭고 용감(勇敢)하여 의지(依支)할만한 인재(人材)이기 때문이었다. 그 토적지문(討賊之文), 의려소(義旅所)의 서찰, 적성강(赤城江)에서 읊은 시는 그 충의(忠義)의 간담(肝膽)이 늠연(凜然)하게 사기(辭氣)에 나타났으며, 둔월치(屯越峙)의 호칭(呼稱)이나 호벌치(胡伐峙)의 이름이 또한 모두 당시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으니, 이것으로 선생의 충의(忠義)가 높으셨다는 것과 행진(行陣)의 실제(實際)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하늘이 순리(順理)로 돕지 않아, 선생께서는 첩서(捷書)를 바치지도 못하고 갑자기 적봉(賊鋒) 아래 돌아가셨으며 두 아들도 또한 따라서 순절(殉節)하였다. 이 때문에 지사(志士영웅(英雄)의 눈물이 지금까지도 마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천년 후에 사람을 논할 때는 다만 그 절의(節義)를 다한 것을 취할 뿐이지, 성패(成敗)나 이둔(利鈍)은 꼭 논할 것이 못 된다. 곧 선생의 정충대절(精忠大節)은 비록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툰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아아, 오늘날은 어떠한 날인가. 선생은 뵐 수 없으며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실기(實記)가 있을 뿐이다. 선생의 충의(忠義)를 우러러 사모(思慕)하는 사람은 이것을 보면 또한 흥기(興起)의 실마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예진(禮鎭, 자신)은 나라 없는 천한 포로(捕虜)로 면목(面目)이 부끄럽고 구차(苟且)하게 생명(生命)을 도둑질하고 있으니, 선생의 실기(實記)를 간행(刊行)하는 일에 어찌 감히 입을 놀릴 것인가. 그러나 거듭 그 청()을 어기다가 드디어 몇 마디 말로 권말(卷末)을 더럽히는 것이다.

    임신년(壬申年) 5월 하순

    후학(後學) 장택(長澤) 고예진(高禮鎭)이 삼가 발문을 쓰다.



    (3)

     

    鄭文獻一蠹先生題頭流詩曰 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流 只有此數句 倡明理學 儘爲百世宗師矣. 今於野叟先生實蹟 有赤城江詩曰 山勢開新面 江流作古聲 妖氣驚黑月 義氣糾精兵 此雖寂寥數語 然其辭意之淡泊 忠義之悃愊 寔出秉彛 何嘗與文藻家浮餙華巧之態可比哉. 然則一羽知全鳳之毛 一臠知全鼎之味 執此可知先生之爲先生矣. 嗚呼 是日何日 懷襄滔天 三綱旣淪 九法亦斁可謂世級極矣. 若使先生在於今日 頑夫可以知愧 今日之刊行 於此編者 無乃一線陽脈不墜之眹歟. 不侫 於編摩之役 未嘗不相不顧湔劣 以續貂之譏 穢于佛頭 倘免我我之誚乎. 畧敘梗槩以書.

    歲舍壬申流火月光山金永來謹跋

     

    발문() (3)

     

    정문헌 일두선생(鄭文獻一蠹先生)이 지은 두류시(頭流詩)에 이르기를,


    부들에 부는 바람 엽렵(獵獵)하여 가볍고 부드럽게 희롱하는데

    사월화(四月花)는 피었고 보리는 이미 가을이구나.

    두류산(頭流山) 천만첩(千萬疊)을 다 구경하고서

    외로운 배는 또 대강(大江)의 흐름을 내려가네.


    風蒲獵獵弄輕柔 풍포엽렵롱경유

    四月花開麥已秋 사월화개맥이추

    看盡頭流千萬疊 간진두류천만첩

    孤舟又下大江流 고주우하대강류


    라고 다만 이 몇 구절(句節)이 있어 거리낌 없이 이학(理學)을 창명(倡明)하고 백세(百世)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여기 야수선생실적(野叟先生實蹟)에는 적성강시(赤城江詩)가 있으니 이르기를,


    산세(山勢)는 새로운 면목을 열고

    강류(江流)는 예스런 소리를 내도다.

    요기(妖氣)가 검은 달을 놀라게 하고

    의기(義氣)는 정수한 군사를 규합(糾合)하도다.


    山勢開新面 산세개신면

    江流作古聲 강류작고성

    妖氣驚黑月 요기경흑월

    義氣糾精兵 의기규정병

    라고 하였다.

    이것은 비록 적료(寂廖)한 수어(數語)이다. 그러나 그 사의(辭意)가 담박(淡泊)하고 충의(忠義)가 곤핍(悃愊, 정성스러움)하니, 이는 병이(秉彛)에서 나온 것이라, 어찌 문조가(文藻家)의 부화(浮華)하고 교묘하게 꾸민 문태(文態)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하나의 깃털로 전체 봉황(鳳凰)의 터럭을 알 수 있고 한 조각의 고깃덩어리로 전체 솥의 국 맛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선생의 선생다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아, 이 날이 무슨 날인가. 회양(懷襄)이 하늘에 사무치고 삼강(三綱)도 이미 윤락(淪落)하였으며 구법(九法)도 혼탁(混濁)하게 되어 가위(可謂) 세급(世級)이 극도(極度)에 달했다고 하겠다. 만약 선생이 오늘날에 살아 계셨다면 완악(頑惡)한 자들은 부끄러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편집(編輯)하여 오늘날 간행(刊行)하는 것은 바로 일선(一線) 양맥(陽脈)이 추락(墜落)하지 않을 조짐(兆朕)인가?

    나는 편마(編摩)하는 일에 있어서 미상불(未嘗不) 서로 전열(湔劣)함을 돌아보지 않고 속초(續貂)라는 비방(誹謗)을 가지고 불두(佛頭)를 더럽히니, 어쩌면 아아(我我)의 꾸지람을 면할 수 있을 것인가. 경개(梗槩, 大綱)를 약술(略述)하여 쓰다.

    임신년(壬申年) 7월 광산(光山) 김영래(金永來) 지음




    (4)

     

    易曰 貞蠱足以幹事 傳云 善繼志而述事 然自顧不肖淺薄誠意 安能幹蠱而繼述哉. 已於族從祖諱膺纘·諱膺文及諱泓覲 繼以纂述 槩可備矣. 恭惟十世祖諱弘國號野叟府君 當宣廟壬辰之亂 忠憤起激 敵王所愾 命其子三人與兄弟叔姪三十餘人及鄕隣同志六十餘人 會盟倡義 望風響應 累戰累捷 以樹大勳. 長子諱命達 早登武科 國亂西赴扈駕 丁酉再猘 陪從父陣 與弟諱慶達訓正公 同地殉節 其貞忠大義 凜若霜雪 昭載竹帛 百世之下 孰不欽仰 當時文蹟不爲不多 兵燹之後 屢㥘滄桑 則存者無幾 曷勝慨嘆 獎節樹風 朝家之常典 高宗壬申 贈資憲大夫兵曺判書 賜祭 命旌 復戶 享慕忠祠. 歲薦俎豆之禮. 嗚呼 古昔君子 於先賢之文 雖片言隻字 愛好如尺蔡拱璧 况吾先祖 日星炳節 金石原稿 散在各家 閱數百餘禩 迄未刊行 雲仍之齎恨儻何如耶. 懼夫愈久而愈渙散矣. 天理人常 昭乎不昧 儒論復起於湮沒之餘 是乃太陽發輝於積陰 砥柱特立於頹波耳. 儒林金永來·李鼎燮·金九鉉·李璿九諸氏 及余一言 余雖不肖 存心已久 敢不唯命 協議于族弟秦永·族姪東熯詢謀 僉同蒐葺文稿 付於剞劂 刊成二冊 此非徒吾門私分之慶幸 實是士林景賢之誠意也. 盥手奉讀 先祖英靈 洋洋乎如在當年義節 瞭瞭然隔晨 何感如斯 願我諸宗 益加慕先底丹衷 盍爲寶藏而永壽 其傳也夫.

    歲壬申端陽節十代孫前參奉述永百拜謹跋




    발문() (4)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정고(貞蠱)하여 충분히 일을 주간(主幹)한다.”(貞蠱足以幹事)고 하였고 전()에 으르기를, “뜻과 일을 잘 계승(繼承)한다는 것.(善繼志而述事)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내 성의(誠意)가 천박(淺薄)함을 돌아볼 때, 어찌 능히 간고(幹蠱)하여 계술(繼述)할 것인가? 이미 족종조(族從祖) 휘 응찬(膺纘휘 응문(膺文) 및 휘 홍근(泓覲)께서 계속 찬술(纂述)하여 거의 완비(完備)되어 있다.

    삼가 10세조 휘 홍국 호 야수부군(十世祖諱弘國號野叟府君)을 생각하건대, 선조대왕 임진년의 난리를 당하여 충분(忠憤)이 격발(激發)하고 왕실의 적()에게 분개(憤慨)하셨다. 그 아들 세 사람과 형제·숙질 30여 인() 및 향린(鄕隣)의 동지(同志) 60여 인()에게 명하여 모여서 맹서하고 의병을 일으키니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향응(饗應)하였고 여러 번 싸워 승리(勝利)하여 큰 공훈(功勳)을 세우셨다.

    장자(長子) 휘 명달(命達)은 일찍이 무과(武科)에 올라, 국란(國亂)에 서쪽으로 가서 임금의 가마를 호종(扈從)하였고 정유(丁酉) 재란(再亂)에는 아버지 진영(陣營)에 배종(陪從)하여 아우님 휘 경달(慶達) 훈정공(訓正公)과 함께 같은 땅에서 순절(殉節)하였으니, 그 정충대의(貞忠大義)는 늠름하기가 상설(霜雪)과 같고 밝게 죽백(竹帛, 歷史)에 올라, 백세(百世)가 내려간 뒤에라도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을 것인가?

    당시의 문적(文蹟)이 많지 않다고 할 수는 없으나 병화(兵火)를 겪은 뒤에 오랜 시간이 흘러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니, 어찌 개탄(慨嘆)하지 않겠는가.

    절의(節義)를 장권(獎勸)하고 풍기(風紀)를 세우는 것이 나라의 떳떳한 전례(典禮)이니, 고종황제 임신년(1872)에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曺判書)를 증직(贈職)하고, 사제(賜祭)하고, 정려(旌閭)를 명하고, 복호(復戶)하고, 모충사(慕忠祠)에서 해마다 조두(俎豆)의 예()를 지내도록 하였다.

    아아, 옛날의 군자(君子)는 선현(先賢)의 글을 비록 편언척자(片言隻字, 짧은 문장)라도 애호(愛好)하기를 마치 척채공벽(尺蔡拱璧)처럼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선조(先祖)의 해와 별처럼 빛나는 절의(節義)의 금석(金石)같은 원고(原稿)가 여러 집에 산재(散在)하여 수백년(數百年)을 지나오면서 아직까지 간행(刊行)하지 못하였으니, 먼 후손들의 한탄(恨歎)하는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그것이 더 오래될수록 더 흩어질 것이 두려웠다.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윤상(倫常)이 밝고 어둡지 않아, 인몰(湮沒)한 나머지의 유론(儒論)이 다시 일어났으니, 이는 곧 오랫동안 날이 흐렸던 끝에 태양(太陽)이 빛나는 것과 같으며, 무너지는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지주(砥柱)가 우뚝 서 있는 것과 같다.

    유림(儒林) 김영래(金永來이정섭(李鼎燮김구현(金九鉉이선구(李璿九) 제씨(諸氏)가 내 한 마디 말을 위해 왔다. 나는 비록 변변치 못하지만 마음에 둔 지는 오래되었으니 감히 명()을 응낙(應諾)하지 않겠는가. 족제(族弟) 진영(秦永족질(族姪) 동한(東熯)과 협의(協議)하고 여러 사람과 순모(詢謀)하여 문고(文稿)를 수집(蒐葺)하여 기궐(剞劂, 刊行)에 부쳤다. 간행(刊行)하여 두 책으로 만들었다. 이는 다만 우리 가문(家門)의 경사(慶事), 다행(多幸)일 뿐만 아니라, 실로 이는 사림(士林)이 현인(賢人)을 높이 우러러보는 성의(誠意)인 것이다. 손 씻고 받들어 읽으니, 선조(先祖)의 영령(英靈)이 양양(洋洋)하게 계신 듯 하고 당년(當年)의 의절(義節)이 명료(明瞭)하게 어제의 일과 같으니, 무슨 감회(感懷)가 이와 같겠는가?

    우리 제종(諸宗)에게 원하건대, 더욱 선조(先祖)를 추모(追慕)하는 붉은 마음을 더하여 어찌 이를 보장(寶藏)하여 오래오래 전하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임신년(壬申年) 단양절(端陽節)

    10대손 전 참봉 술영(述永)이 백배(百拜)하고 삼가 발문을 지음



    (5)

     

    此 我九世祖判書野叟府君 在昔壬丁之變 擧義事實所記者也. 余固惟當年事實 昭載於會盟錄 而盟錄之刊行于世者 已有積年矣. 其貞忠炳節 可與日月爭光 山嶽並峙 無容更贅 而今又以名實記何也. 盖中昔以來 聖朝贈褒之典 已有崇重 而列郡士林 及道繡宗伯薦達之狀 又於前賢撰德·撰誌等 許多文字 前後成軸 久鬱藏篋 塵垕蠹蝕 將未免一煤爛古紙 可勝悶然 懼夫隨火隨泯 謀於士林 恊于宗族 圖以鋟梓 收合散漫 若于成篇 於是乎 實記二冊 渙然復新矣. 然則今此是役 亦不可無也 顧今世級滄桑 彛倫墮地 滔滔皆是 嗚呼 願我宗族 恒念先祖事業 不出於忠孝之外 孜孜兢兢 以課忠責孝 俾靑氊 則先祖之靈 必於冥冥中 欣欣然 以爲我有好子孫. 世必有有是祖有是孫之稱矣. 其於闡揚先烈 豈不善且美哉. 以若鹵莽猥添校正之任 恐未承當 不可無一言勉戒 而自警云爾.

    歲壬申榴夏上澣九代孫京洌謹跋

     

    발문() (5)

     

    이것은 내 9세조(世祖) 판서(判書) 야수부군(野叟府君)께서 옛날 임진·정유의 변란(變亂) 때 의거(義擧)하신 사실(事實)을 기록한 것이다.

    나는 진실로 당년(當年)의 사실을 생각할 때, 명백(明白)하게 회맹록(會盟錄)에 실려 있으며 회맹록(會盟錄)이 세상에 간행(刊行)된 것이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니, 그 곧은 충성(忠誠), 빛나는 절의(節義)는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툴 수 있으며 산악(山嶽)과 같이 높아서 다시 췌언(贅言)이 필요하지 않은데, 지금 또 이름을 실기(實記)”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중석(中昔) 이래(以來)로 성인(聖人)의 조정(朝廷)에서 증포(贈褒)하는 전례(典禮)가 이미 융숭(隆崇)함이 있었지만, 열군(列郡)의 사림(士林) 및 도백(道伯, 도의 監司수의(繡衣, 御史종백(宗伯, 禮曹判書)이 천달(薦達)한 장계(狀啓)와 또 앞서의 현인(賢人)이 지은 장덕(狀德지문(誌文) 등 허다(許多)한 문자(文字)가 앞뒤로 축()을 이루었는데 오랫동안 답답하게 협사(篋笥)에 소장(所藏)되어 먼지가 쌓이고 좀이 먹어 장차 한낱 끄슬리고 썩은 고지(古紙)를 면치 못할 것이니 민망(憫惘)함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 화재(火災)를 만나는 대로 없어질 것이 두려웠다.

    사림(士林)과 상의하고 종족(宗族)과 협의하여 판각(板刻)하기를 도모(圖謀)하였다. 흩어져 있던 것을 수합(收合)하여 약간의 편집(編輯)을 이루었다.

    어시호(於是乎, 이렇게 되어) 실기(實記) 두 책이 환연(渙然)하게 다시 새롭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 이 역사(役事)가 또한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세상이 창해상전(滄海桑田)의 시대(時代)에 해당한 것을 돌아볼 때 떳떳한 인륜(人倫)이 땅에 떨어지고 도도(滔滔)한 것이 모두 이러하다.

    아아, 우리 종족(宗族)에게 바라건대, 항상 선조(先祖)의 사업(事業)이 충효(忠孝)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여, 자자(孜孜) 긍긍(兢兢)하여 충성(忠誠)과 효도(孝道)에 힘쓰도록 하여 청전(靑氊)을 늘린다면, 선조(先祖)의 혼령(魂靈)이 반드시 명명(冥冥)한 가운데 흔흔(欣欣)하게 기뻐하시며,나는 좋은 자손이 있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이고, 세상에서는 반드시이러한 조상(祖上)이 있으니 이러한 손자가 있구나.하는 칭찬(稱讚)이 있을 것이다. 그 선열(先烈)을 천양(闡揚)함에 어찌 좋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노망(鹵莽)한 사람으로 외람(猥濫)되게 교정(校正)의 소임(所任)을 맡아, 승당(承當)하지 못할 것이 두려우나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없어서 면계(勉戒)하며 또 스스로를 경계(警戒)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임신년(壬申年) 유하(榴夏, 5) 상순(上旬)

    9대손(代孫) 경렬(京洌)이 삼가 발문을 쓰다.




    (6)

     

    夫 先祖有仁 知而不傳 是后孫之不仁 而先祖之嘉行·懿蹟 繼而述之 且莫非后孫之責乎. 盖文者傳道之器 而道者卽仁之本體也. 然則其繼述之道 不過曰以文傳仁於百世之下矣. 嗚呼 萬曆壬丁之燹尙忍言哉. 島夷猖獗 大駕播越 宗社濱危 國家岌嶪之勢 可謂迫在朝夕. 時惟我湖南 則金文烈健齋·高忠烈霽峯 先倡義旅 吾先祖野叟公 繼起糾衆 累樹巍勳 掃淸河垈 而天不祚宋 矗石之樓 錦山之役 健齋·霽峯 殉身就義 胡峙之役 野叟之三父子 爲君捐身 其道學節義 不無差殊之異 然其葵日之忱 何其相孚 可謂志同而地異矣. 其他事蹟 朝家之贈典 諸賢之讚述 已陳何可贅說哉. 嗚呼 世級寢降 雲仍漸微 前後狀德 不以鋟傳者已有年所 不但烟燻蠹侵 字刓部缺 幾爲湮沒無傳 故優助出義 粧成二㢧 倘或免不仁之誚乎. 不肖雖人微學淺 不忍含黙 不揆僣率 畧敘顚末 如此云爾

    歲壬申梧秋之月旣望十代孫柄永盥手謹跋

     

    발문() (6)

     

    무릇 선조에 어지신 분이 계신데 알고도 전하지 않으면 후손이 어질지 못한 것이며, 선조의 아름다운 행실과 떳떳한 업적을 계승하여 이를 이어 나가는 것은 또한 후손의 책임이 아닌 것이 없다.

    대개, 글이라는 것은 도()를 전하는 그릇이며, ()란 바로 인()의 본체(本體)이다. 그러니 그것을 계술(繼述)하는 도리(道理)는 글로 인()을 백세(百世)의 후대(後代)에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아아, 만력(萬曆) 임진·정유년의 병화(兵火)를 오히려 차마 말하겠는가? 섬 오랑캐가 날뛰어 임금님의 대가(大駕)가 파월(播越, 피난)을 가시고 종묘·사직이 위기(危機)에 처하고 국가(國家)의 위태로운 기세(氣勢)가 그야말로 조석(朝夕)사이에 박두(迫頭)하였다고 할 만 하였다.

    그때 오직 우리 호남(湖南)에서는 문열공(文烈公) 김건재(金健齋, 千鎰)와 충열공(忠烈公) 고제봉(高霽峯, 敬命)이 먼저 의려(義旅)를 일으키고 우리 선조(先祖) 야수공(野叟公)이 계속(繼續)하여 일어나 여러 사람을 규합(糾合)하고 여러 번 높은 공훈(功勳)을 세웠으며, 황하(黃河)와 태산(泰山)을 청소(淸掃)하였는데 하늘이 송()나라에게 복을 내려주지 않았다. 촉석루(矗石樓)와 금산(錦山)의 전역(戰役)에서 건재(健齋)와 제봉(霽峯)이 몸을 죽여 절의(節義)를 성취(成就)하였고, 호벌치(胡峙伐)의 전역(戰役)에서 야수(野叟)의 삼부자(三父子)가 임금을 위하여 몸을 버린 것은, 그 도학(道學)과 절의(節義)에 있어서 조금 다른 점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그 해를 향하는 해바라기의 참마음이 어찌 그렇게 진실(眞實)하였던가. 뜻은 같으나 처지(處地)만이 달랐다고 할 만하다.

    그 밖의 사적(事蹟)에 대하여는, 나라에서 증직(贈職)한 전례(典禮)와 제현(諸賢)의 찬술(讚述)에서 이미 진술(陳述)하였으니 어찌 군더더기의 이야기를 하랴.

    아아, 세대(世代)의 등급(等級)이 침강(寢降)하고 후손(後孫)들은 점점 미약(微弱)해져서 전후(前後)의 장덕(狀德)을 간행(刊行)하여 전하지 못한 것이 이미 여러 해가 되는 바, 다만 연기에 끄슬리고 좀이 먹을 뿐만 아니라, 글자가 닳아 없어지고 부수(部數)가 결락(缺落)되어 거의 인몰(湮沒)하여 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넉넉하게 찬조금(贊助金)을 내어 두 권()을 장성(粧成, 꾸며서 만듬.)하였으니, 어쩌면 혹 인()하지 않다는 꾸지람을 면할 것인가. 나는 비록 사람이 미천(微賤)하고 학문(學問)이 천박(淺薄)하지만,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참솔(僣率)함을 헤아리지 않고 대략 전말(顚末)을 이와 같이 서술(敍述)하는 것이다.

    임신년(壬申年) 오추지월(梧秋之月, 7) 기망(旣望, 16)

    10대손 병영(柄永)이 관수(盥手)하고 삼가 발문을 쓰다.



    (7)

     

    皇明萬曆壬辰年間 海東擧國擧義之士 冒白刃·塗肝腦 不惴不悔 視死如歸 光爭日月 凜乎秋霜 若趙重峯·高霽峯·金健齋之義烈忠貞 而我先祖野叟公 亦其一也. 於乎 龍蛇之變 尙忍言哉. 島夷入寇 彌滿郊畿 大駕蒙塵 生民魚肉 士生斯世 有死之心 無生之氣 義理之心 不畜積於中 豈能辨死生於危急之濱乎. 府君 際搶攘之時 與子姪及鄕里同志者 灑血登壇 爲義旅將 此是衆公所推也. 都元帥權公慄聞之 勉之以巡遠之責 巡察使啓聞于朝 宣廟嘉之 卽除同中樞 其時推詡褒賞極矣 至於丁酉再猘 公馳檄赴敵 轉戰于扶安上掠峙 勢窮不利 與長子諱命達·次子諱慶達 捨命報國 府君之一家所成就 豈不亦卓絶鮮覯哉. 高宗朝壬申 特贈兵曹判書 賜祭文 命旌 復戶. 純宗甲子 以士論建祠設享于南塘會盟舊址 而名其祠號曰慕忠 府君之行狀·實記 藏于家中 經灰燼 間有蠹敗 常用慨歎矣. 族叔述永·奏永氏 與士林相議 摭其事實與贈職·命旌顚末 壇廟祝辭 儒林贊述 彚爲一秩二冊 方欲入梓 不肖手抄口讀 不覺涕淚潛潛 噫 先祖之功之烈 綱紀百世垂裕後昆 焜燿史乘 雲仍蕃息 盖足以見遺澤之愈久而愈不斬矣. 嗟 我同裔 盍相敦勉也哉

    壬申端陽月十一代孫東熯謹跋



    발문() (7)

     

    명나라 만력(萬曆) 임진년간(壬辰年間, 1592)에 해동(海東) 온 나라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킨 선비로서 백인(白刃)을 무릅쓰고 간뇌(肝腦)를 땅에 쏟아내면서도 두려워하거나 뉘우치지 않고, 죽음 보기를 돌아가듯이 하여, 빛은 일월(日月)과 다투고 늠름(凜凜)하기가 추상(秋霜)과 같았던 이는, 조중봉(趙重峯고제봉(高霽峯김건재(金健齋)의 의열충정(義烈忠貞)이 있는데, 우리 선조(先祖) 야수공(野叟公)도 또한 그러한 분이시다.

    아아, 용사(龍蛇)의 변()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섬 오랑캐가 입구(入寇)하여 교기(郊畿, 京畿道 近郊)에 꽉 들어차니 임금의 대가(大駕)가 몽진(蒙塵, 티끌을 뒤집어쓰다, 피난을 말함.) 백성들은 어육(魚肉)이 되고, 이 세상에 태어난 선비들은 죽을 마음은 있어도 살려는 기색(氣色)은 없었다. 의리(義理)의 마음이 속에 축적(蓄積)되지 않았다면 어찌 위급(危急)함이 임박하였을 때에 사생(死生)을 능히 분간(分揀)할 수 있겠는가. 부군(府君)께서는 창양(搶攘)하는 때를 만나, 자질(子姪) 및 향리(鄕里)의 동지자(同志者)와 더불어 피를 뿌리고 등단(登壇)하여 의려장(義旅將)이 되시니, 이는 바로 여러 사람이 공()을 추대(推戴)한 것이다.

    도원수(都元帥) 권률공(權慄公)이 이를 듣고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책임이 있다고 하며 면려(勉勵)하였다. 순찰사(巡察使)가 조정(朝廷)에 장계(狀啓)하여 알리니, 선조대왕(宣祖大王)이 이를 아름답다하여 곧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除授)하여 그 당시의 추후(推詡)와 포상(褒賞)이 지극하였다.

    정유년(丁酉年)에 이르러 왜적이 다시 날뛰니, ()은 격문(檄文)을 띄우고 적진(敵陣)으로 달려가셨다.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로 전전(轉戰)하였을 때, 형세(形勢)가 궁()하고 불리(不利)하여 장자(長子) 휘 명달(命達차자(次子) 휘 경달(慶達)과 함께 목숨을 버려 나라에 보답하였으니, 부군(府君)의 일가(一家)가 성취(成就)한 것은 어찌 또한 탁절(卓絶)하여 보기드믄 것이 아니겠는가.

    고종황제 임신년(1872)에 특별히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하고, 제문(祭文)을 하사(下賜)하고, 정려(旌閭)를 명하고, 복호(復戶)하였으며, 순종(純宗) 갑자년(1924)에 사론(士論)으로 남당(南塘) 회맹(會盟)하였던 옛터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제향(祭享)을 베풀었는데, 그 사당(祠堂)의 이름을 모충사(慕忠祠)라고 부른다.

    부군(府君)의 행장(行狀실기(實記)를 집에 소장(所藏)하였었는데, 화재(火災)를 겪고 간간(間間)이 좀먹고 썩어 늘 개탄(慨嘆)하여 왔다. 족숙 술영(述永진영씨(奏永氏)가 사림(士林)과 상의하고 그 사실(事實)과 증직(贈職명정(命旌)의 전말(顚末)과 단묘(壇廟)의 축사(祝辭), 유림찬술(儒林贊述)을 주워 모아 한 질() 두 책으로 만들어 바야흐로 인쇄(印刷)에 붙이려고 하여, 내가 손으로 짚으며 입으로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아, 선조(先祖)의 공렬(功烈)은 백세(百世)에 강기(綱紀)를 세우고, 후손(後孫)에게 넉넉함을 내려 주시며, 사승(史乘)에 번쩍번쩍 빛나고, 운손(雲孫)과 잉손(仍孫)이 번식(蕃息)하니, 어찌 유택(遺澤)이 오래 될수록 더욱 끊어지지 않는 것을 충분히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아아, 우리 같은 후손(後孫)들은 어찌 서로 돈면(敦勉)하지 않겠는가?

    임신년(壬申年) 단양월(端陽月, 5)

    11대손(代孫) 동한(東熯)이 삼가 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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