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메뉴
  • 역사자료실
  • 갤러리
  •   야수실기(野叟實記) 유장


    남당회맹단 의병대장 채홍국장군 야수실기 게시 연재

    野 叟 實 記


    野叟實記 卷之四

     

    扶安儒狀


    右敬通事 旌忠褒烈 有國之常典 多士之公議也. 貴郡 故義旅將平康蔡公野叟先生諱弘國 禮曹判書諱忠敬號槐亭玄孫 司正諱致義子也 素以鄙郡山川之鍾毓 世修懿德 天資雄偉 當壬辰亂 見高霽峯檄文 募義旅 赴錦山 及高公敗歿 收散卒以歸 先出家僮二十餘人 兵糧十二石 兵鐵百五十斤 與三子及宗族三十餘人 鄕隣同志高公德鵬·曺公益齡·蔡公禹齡等六十餘人 歃血同盟於興德南塘 公爲義旅將 誓死國亂 約于衆曰 髮毛身體 受之父母 今我聖上 卽父母也 當父母之危 豈惜髮毛身體乎 玆在三綱五倫 知此以行 又輪檄列邑 聞風來附者 惟日愈衆 軍容凜凜 六七隣邑 賴以得全 時 權元帥諱慄 以書慰之 勉以張巡·許遠之責 又檄於法聖鎭 出兵糧四百石 三百石 納于龍灣行朝 百石送于嶺南郭再佑義陣 於是 聞賊犯順天 急奮義旅而追赴 斬賊數十級 時巡察使 擧實狀聞 宣廟嘉之 除同中樞焉. 丁酉更倡 寄書於金永年曰 合謀聚衆 以當一面 終死於矢石之所 盡命酬國 豈非大丈夫高義乎. 期爲更倡義 及同盟者 與他同聲響應者 尤倍於前日 仍伐賊於長嶝 連破於上掠峙 賊衆大至 公素善射 發矢累百 右手指爲决絃所斫 更以左手彎弓 左指亦斷 矢盡手徒 公以手擊倭 倭酋自刺其胸負公而躓 刃及公身 長子命達 次子慶達 方與賊戰 急趨救之 已無及矣 憤突擊倭 俱爲所害 仍以同地殉節 後人名其峙曰胡伐峙. 聖上壬申 贈資憲兵判 賜祭 命旌 復戶. 事載節義錄 以士論方擬建祠 世級滄桑 未遑停止 先是 貴郡東門 有倡義閣 九十二賢遺蹟 炳如日星 年久頹廢 判書公後孫東熯 協議宗族 碑以守舊址 閣以移建于貴郡南塘 素是會盟之地 雲仍所居村之左也 朔參望謁 克遵禮制 其慕先慕賢之誠 非不篤矣 如許卓犖之忠節 尙欠俎豆之禮享 實爲士林之齎恨 故玆以仰告 惟願 僉章甫 特爲發論 刱設壇享 一以慰忠魂於冥府 二以副輿望於列郡之地 千萬幸甚.

    癸亥十月 日

    扶安鄕校多士朴衡緖 高濟奎 崔炳郁

    直員金日載 尹元求 沈相舜

    掌議李東述 高在豊 金鳳述 崔東翊 李基絃

    具容書 李彩基 金容坤 裵鍾恂

     

    興德鄕校儒林 僉座下

     

     

    부안유장(扶安儒狀)


    이는 삼가 통지하는 것입니다. 충렬(忠烈)에 대하여 정포(旌褒)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떳떳한 전례(典禮)이며 많은 선비들의 공의(公議)입니다.

    귀군(貴郡)의 고 의려장 평강채공 야수선생(故義旅將平康蔡公野叟先生)의 휘는 홍국(弘國)이니, 예조판서 휘 충경(忠敬) 호 괴정(槐亭)의 현손(玄孫)이며 사정(司正) 휘 치의(致義)의 아들이니, 원래 저희 군() 산천(山川)의 기()를 타고나 자라서, 대대로 아름다운 덕을 닦고, 하늘에서 타고난 자질(資質)이 웅위(雄偉)하셨습니다.

    임진란(壬辰亂)을 당하여, 고제봉(高霽峯)의 격문(檄文)을 보고,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금산(錦山)으로 갔습니다. 고공(高公)이 패몰(敗歿)하자, 흩어진 군졸(軍卒)을 수습하여 돌아갔습니다. 먼저 가동(家僮) 20여 인과 병량(兵糧) 12 (), 병철(兵鐵) 150 ()을 내고, 세 아들과 종족(宗族) 30여 인(), 고향 이웃의 동지(同志)인 고덕붕(高德鵬)·조익령(曺益齡채우령(蔡禹齡) 60여 인()과 더불어 피를 마시고 흥덕(興德) 남당(南塘)에서 동맹(同盟)을 하고, 공이 의려장(義旅將)이 되어 국란(國亂)에 죽기를 맹서(盟誓)하고 여러 사람에게 맹약(盟約)하기를,

    발모(髮毛)와 신체(身體)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 지금 우리 임금님은 곧 부모이니, 부모의 위급함을 당하여 어찌 발모(髮毛)와 신체(身體)를 아끼겠느냐? 여기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있다. 이것을 알고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격문(檄文)을 여러 고을에 돌리니 소식을 듣고 와서 합류하는 자가 날로 점점 많아졌습니다.

    군대(軍隊)의 위용(威容)이 늠름(凜凜)하여 67 이웃 고을이 덕택으로 온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공이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장순(張巡허원(許遠)의 책임(責任)이 있다고 하며 면려(勉勵)하였습니다.

    또 법성진(法聖鎭)으로 격문(檄文)을 보내어 병량(兵糧) 400 ()을 내어 300 ()은 용만(龍灣) 행조(行朝)에 바치고, 100 ()은 영남(嶺南) 곽재우(郭再佑)의 의진(義陣)으로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이때에, 왜적이 순천(順天)을 침략(侵略)한다는 말을 듣고, 급히 의려(義旅)를 분기(奮起)시켜 쫓아가서 왜적을 참()한 것이 수십급(數十級)이나 되었습니다. 당시 순찰사(巡察使)가 사실을 들어 장계(狀啓)를 올려 위에 알리니, 선조대왕(宣祖大王)이 이를 가상(嘉尙)하다 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除授)하였습니다.

    정유년(1597)에 다시 의병(義兵)을 일으킬 때, 심영년(金永年)에게 편지를 부쳐 말씀하기를,

    함께 도모(圖謀)하여 여러 사람을 모아 한쪽 방면(方面)을 담당하고 마침내 시석(矢石)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죽어, 목숨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報答)한다면, 어찌 대장부(大丈夫)의 높은 의리(義理)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기약하여 다시 창의(倡義)하니, 그 때에 맞추어 동맹한 사람과 그 밖에 동성(同聲)으로 향응(響應)한 사람이 전일(前日)보다 배()나 많았습니다. 이어 왜적을 장등(長嶝)에서 토벌하고, 연달아 상략치(上掠峙)에서 격파(擊破)하는데, 왜적의 무리가 크게 이르렀습니다.

    공은 원래 활쏘기를 잘하여, 화살 쏘기를 수백(數百) 번 하니, 오른손 손가락이 활시위에 찢어져 끊어졌고, 다시 왼손으로 활을 당겨 왼손가락도 끊어져서, 화살도 다하고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공은 손으로 왜놈을 공격하니 왜추(倭酋)가 스스로 그 가슴을 찌르고 공을 업고 넘어졌으며 칼날이 공의 몸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큰아들 명달(命達)과 둘째 경달(慶達)이 바야흐로 왜적과 싸우고 있다가 급히 달려가 구()하였으나 이미 미치지 못하였습니다.()하여 왜적에게 돌격(突擊)하여 함께 해()를 당하여 바로 한 곳에서 순절(殉節)하였으니, 후인(後人)들이 그 고개의 이름을 호벌치(胡伐峙)라고 하였습니다.

    성상(聖上, 지금의 임금님) 임신년(1872),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하고 사제(賜祭)하고 정려(旌閭)를 명하고 복호(復戶)하였으니, 사적(事蹟)은 절의록(節義錄)에 실려 있습니다. 사론(士論)이 바야흐로 사당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세상이 창해상전(滄海桑田)하는 것과 같아서, 겨를이 없어 정지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귀군(貴郡) 동문(東門)에 창의각(倡義閣)이 있어, 구십이현(九十二賢)의 유적(遺蹟)이 환하게 해와 별처럼 밝은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고 황폐(荒廢)하였으니, 판서공(判書公)의 후손 동한(東熯)이 종족(宗族)과 협의(協議)하여, ()는 옛 자리를 지키고, ()은 귀군(貴郡) 남당(南塘)에 옮겨 세우기로 하니, 남당은 원래 회맹(會盟)한 곳이고, 먼 후손들이 마을 왼쪽에 살고 있어서, 초하루·보름에 참배(參拜)하며 잘 예제(禮制)를 지키며 그 조상과 현인(賢人)을 사모(思慕)하는 정성이 모두 돈독(敦篤)합니다.

    이렇게 충절(忠節)이 뛰어난데, 아직도 조두(俎豆)의 예향(禮享)이 없으니, 실로 사림(士林)의 한()이 되어왔습니다.

    이에 바라건대 여러 선비께서 특별히 발론(發論)하여 단향(壇享)을 창설하여 한편으로는 명부(冥府)의 충혼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열군(列郡)의 여망에 부응하도록 해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계해(1923) 10월 일 부안향교

    다사(多士) 박형서(朴衡緖) 고제규(高濟奎) 최병욱(崔炳郁)

    직원(直員) 김일재(金日載) 윤원구(尹元求) 심상순(沈相舜)

    장의(掌議) 이동술(李東述) 고재풍(高在豊) 김봉술(金鳳述)

    최동익(崔東翊) 이기현(李基絃) 구용서(具容書)

    이채기(李彩基) 김용곤(金容坤) 배종순(裵鍾恂)

    흥덕향교 유림 여러분 좌하



    本郡儒狀


    右文爲敬通事 噫 天下之不可誣者公議也 百世之不可泯者亦公議也 山嶽華大 久而仰其高峻 日星照臨 遠而知其光明 則事有顯晦 時或早晩 雖不無後人之齎嘆 而天下百世之不可誣者 亦自有公議之難泯者也 鄙郡義旅將平康蔡先生 諱弘國 號野叟 公卽禮判諱忠敬 號槐亭公之玄孫 生員諱准 號西亭公之孫 司正諱致義之子也 皇天眷顧 我東土降生 蔡公器局弘遠 智謀卓越 世襲德義 日事忠孝 雄韜大畧 世罕其儔 時人許以謂國之干城矣. 天運不幸 變出龍蛇 往見霽峯高先生 飛檄倡義 望風應募者 如雲龍風虎 卽赴錦山 戮力從事 時不利兮國步艱難 高公敗沒 復合散卒而歸 先出二十餘家僮 十二石粮 百五十斤鐵 以助軍用 與其三子及兄弟叔姪三十餘人 鄕隣同志高公德鵬·曺公益齡·金公永年·縣監蔡公禹齡·李公綽·縣令金公景德·生員蔡公瑺·裵公守義等 六十餘人 歃血同盟於南塘 公爲義旅將 而誓死國難 約于義團曰 身體髮膚 受之父母 則今我聖上 卽父母也 豈惜髮毛身體乎 傳曰 仁者不以盛衰改節 義者不以存亡易心 禮記曰 殺身成仁 圖國忘死 當此危急存忘之秋 豈可不盡命竭力 忠君愛國乎 輪檄列邑 聞風赴義者 惟日愈衆 軍容凜凜 六七隣邑 賴以得全 方其時也 權元帥諱慄 勉以巡遠之責 旋卽走檄于法聖鎭 出兵糧四百石 而三百石 納于龍灣行朝 百石 送于嶺南郭先生再佑義陣 而忽聞賊兵犯順天 急行軍旅 直發淳昌石堡倉穀 餉軍討賊之際 聞天將宋經畧之主和 相向痛哭 及到赤城江 敘述忠憤之句語 屯軍越嶺 時人名其峙曰屯越峙 于其時也 觀察使擧實狀聞 宣廟嘉之 特除同中樞 迨至丁酉 益復振旅 與書金永年曰 主辱臣死 義固當然 合謀聚衆 庶當一隅 則君臣幸矣. 國家幸矣. 天若運否而時窮 則仗義立死於矢石之中 報國盡命 此豈非古今天下大義 時節者哉 以是而東西望風 南北響應 同盟復起 捨生就義 誓死效忠者 尤倍前日 乘勝長驅 賊遇敗逃 嘗兵乎興德之排風嶺·長嶝 而又戰其北 掃淸一隅 引兵出扶安上掠峙 賊衆大至 矢盡道窮 賊酋抱劒 負公而躓 刃及公身 長子諱命達 次子諱慶達 急趨救之 已無及焉 憤突 追擊 俱爲賊衆所害 公之三父子 同時殉節 後人名其峙曰胡伐峙 節彼卓忠 炳如日星 自古忠臣烈士何代無之 未聞有如公之三父子同地殉節者也 樹風莊節 朝家之常典 闡幽揚美 士林之公議也 而聖上壬申 贈資憲兵判 賜祭 命旌 而雖後裔之遺落殘孑者 特爲除復 事載湖南節義錄. 如此卓世忠良 其可曰砥柱孤星 誠非溢美之辭也. 宜有千百世不祧之典 當時士林 方擬建祠 百六滄桑之餘 世遠人亡 迨今未遑者也. 先是 郡之東 刱立倡義閣 則九十二賢貞忠太義 與日月爭光無忝. 嗚呼 歲月滋久 風雨磨洗 荒頹無餘 先生後孫東熯君 特 出慕先崇賢之誠義 協議宗族 鳩合資力 碑則仍舊 閣則新建于本郡南塘 卽倡義當日會盟之地也 姓孫今日所居之村也. 朔日望朝 士林·本孫 齊會于此 以行叅謁之儀 則其在尊慕之地 禮誠雖曰彌篤 義無可據 禮無足徵 以若先生之孤忠大節 尙欠俎豆之薦享 則忠魂義魄 應有遺感 而後儒裔孫 孰無齋鬱者哉. 今若使先生炳日之忠義 竟未能建祠妥享 則後之視今者 其將謂今人有公議乎 否乎. 大抵書院之建設 本爲藏修而崇德報功之典. 故必求鄕先生 可爲後學矜式者 立祠致敬 以興起多士 希賢之志 故國於忠良 已有褒彰之典 士於儒賢, 亦有闡揚之議. 故本郡儒論齊發, 博採時議 敢玆敬告 伏願 僉君子 勿以人棄言 起敬褒尙之義 而特垂一言之重 使之刱 擧祭社之儀 以得士林歸仰之所 而扶植綱常 秉彛好德之地 千萬幸甚.

    甲子 正月 日

    興德鄕校

    多士 朴勝旭 李鍾台 高濟萬 白樂允

    直員 李棕九 金守鉉 安秉榮 李暻澤

    掌議 白賢洙 宋根淑 金永來 金琪會

    叅奉 李綱洙 高昕相 白南碩 柳鍾澤 高泓鎭

    朴炯源 高河鎭 李恒九

    司果 柳熙甲 吳濟棹 李鼎燮 金衡中

    主事 高舜鎭 李秉豊 金九鉉 李相淇 金英植

    白南璇 李璿九 金秉植 黃鍾寬 李奎薰

    白樂贊

    列郡 僉章甫 座下

     

     

    본군유장(本郡儒狀)

     

    이 글은 삼가 통지하는 것입니다.

    아아, 천하에 속일 수 없는 것이 공의(公議)이며, 백세(百世)를 내려가도 민몰(泯沒)될 수 없는 것이 또한 공의(公議)입니다. 산악(山嶽)은 빛나고 커서 오래도록 그 높은 것을 우러러보고, 일성(日星)은 내려 비추니 멀어도 그 광명(光明)을 압니다. 그러니, 일이 드러나는 것이 있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 있으며, 때가 더러 이른 때가 있으며 늦는 때가 있어서, 비록 후인(後人)들이 탄식하게 되는 일이 없지 않으나, 천하(天下백세(百世)에 속일 수 없는 것은 역시 공의(公議)가 민몰(泯沒)될 수 없는 것이, 자연히 있는 것입니다.

    저희 고을 의려장(義旅將) 평강(平康) 채선생(蔡先生)은 휘가 홍국(弘國)이고 호가 야수(野叟)이니, 공은 바로 예조판서(禮曹判書) 휘 충경(忠敬), 호 괴정공(槐亭公)의 현손이며, 생원 휘 준(), 호 서정공(西亭公)의 손자이며, 사정(司正) 휘 치의(致義)의 아들이니, 하늘이 돌보아주시어 우리나라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채공(蔡公)은 기국(器局)이 넓고 원대(遠大)하며 지모(智謀)가 탁월(卓越)하여 대대로 덕()과 의()를 계승(繼承)하여 날로 충()과 효()를 일삼으며, 웅대(雄大)한 도략(韜畧)은 세상에 그 짝 될 만한 사람이 드물어, 당시 사람들이 나라의 간성(干城)이라고 하기를 허락(許諾)하였습니다.

    천운(天運)이 불행하여 임진·계사년의 변란(變亂)이 일어나니, 가서 고제봉(高霽峯) 선생을 뵙고, 격문(檄文)을 날려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멀리서 우러러보고 응모(應募)하는 자가 구름속의 용()이나 바람속의 범과 같았습니다. 바로 금산(錦山)으로 달려가 힘을 다하여 종사(從事)하였는데, 때가 이()롭지 못하여 나라의 운명이 어려워지려고 하니, 고공(高公)이 패()하여 죽었습니다.

    다시 흩어진 군졸(軍卒)을 수합(收合)하여 고향으로 돌아와서 먼저 20여 명의 가동(家僮)12 ()의 병량(兵糧), 150 ()의 병철(兵鐵)을 내고, 그 세 아들과 형제(兄弟) 숙질(叔侄) 30여 인(), 고향 이웃의 동지(同志)인 고덕붕(高德鵬조익령(曺益齡김영년(金永年현감(縣監)인 채우령(蔡禹齡이작(李綽현령(縣令)인 김경덕(金景德생원인 채상(蔡瑺배수의(裵守義) 60여 인과 피를 마시고 남당(南塘)에서 동맹(同盟)을 하고, 공이 의려장(義旅將)이 되어 국란(國亂)에 죽기를 맹서(盟誓)하고 의단(義團)에게 맹약(盟約)하기를,

    발모(髮毛)와 신체(身體)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 지금 우리 임금님은 곧 부모이니, 어찌 발모(髮毛)와 신체(身體)를 아끼겠느냐? 경전(經傳)에 이르기를, “인자(仁者)는 성쇠(盛衰)로 절의(節義)를 바꾸지 아니하고, 의자(義者)는 존망(存亡)으로 마음을 바꾸지 아니한다.”고 하였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살신성인(殺身成仁)하고 나라 일을 도모(圖謀)하여 죽음을 잊는다.”고 하였으니, 이 위급(危急)하여 존망(存亡)이 달린 때를 당하여, 어찌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하셨습니다.

    격문(檄文)을 여러 고을에 돌리니, 소문을 듣고 의군(義軍)에 참가하는 자가 날로 많아져서 군대(軍隊)의 위엄(威嚴) 있는 모습이 늠름(凜凜)하니, 67 이웃 고을이 덕택으로 온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그때에,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공이 장순(張巡허원(許遠)의 책임(責任)으로 면려(勉勵)하였습니다.

    곧 법성진(法聖鎭)으로 격문(檄文)을 보내어 병량(兵糧) 400 ()을 내어 300 ()은 용만(龍灣) 행조(行朝)에 바치고, 100 ()은 영남(嶺南) 곽재우(郭再佑) 선생의 의진(義陣)으로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갑자기, 왜적이 순천(順天)을 침략(侵略)한다는 말을 듣고, 급히 의려(義旅)를 행군(行軍)하여 바로 순창(淳昌) 석보(石堡)로 출발하여 창곡(倉穀)으로 군사(軍士)들을 먹이며 왜적을 토벌(討伐)할 때, 천장(天將)인 송경략(宋經略)이 화의(和議)를 주장(主張)하였다는 말을 듣고, 서로 마주보며 통곡(痛哭)하고, 적성강(赤城江)에 이르러 충분(忠憤)의 시구(詩句)를 서술(敍述)하고 군사를 주둔하였다가 영()을 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 고개를 둔월치(屯越峙)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다고 합니다. 관찰사(觀察使)가 실적(實績)을 들어 장계(狀啓)로 위에 알려, 선조대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除授)하였습니다.

    정유년에 이르러, 또 다시 의려(義旅)를 떨칠 때, 김영년(金永年)에게 부친 편지에 말씀하기를,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가 죽는 것은, 의리(義理)가 원래 당연한 것이니, 함께 도모하여 많은 사람을 모아 한 구석을 담당하게 된다면 군신(君臣)이 다행하고 국가(國家)가 다행할 것인데, 만약 천운(天運)이 비색(否塞)하고 때가 궁()할 것 같으면, 의리(義理)를 의지하여 시석(矢石)이 쏟아지는 가운데 서서 죽어, 목숨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면, 이 어찌 고금(古今) 천하(天下)에 대의(大義) 세울 시절(時節)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동서(東西)에서 망풍(望風, 소문을 듣고)하고 남북(南北)에서 향응(響應)하여, 동맹(同盟)이 다시 일어나 사는 것을 버리고 의리(義理)의 길로 나아가, 죽음을 맹서하고 충성을 바치려는 자가 전일(前日)보다 배()나 더 많았던 것입니다.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왜적은 만나는 대로 패()하여 도망(逃亡)하였습니다. 흥덕(興德)의 배풍령(排風嶺장등(長嶝)에서 싸웠으며, 또 그 북쪽에서 싸워 한 방면을 깨끗이 쓸어버렸습니다.

    군병(軍兵)을 이끌고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로 나갔을 때, 왜적의 무리가 크게 이르렀고, 화살이 다하고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왜적의 우두머리가 검()을 안고 공()을 업고 엎어지니, 칼날이 공의 몸에 미쳤습니다. 큰아들 명달(命達)과 둘째아들 경달(慶達)이 급히 가서 구하였으나 이미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하여 돌진(突進) 추격(追擊)하여 모두 왜적의 무리에게 해()를 당하였습니다. 공의 삼부자(三父子)가 동시에 순절(殉節)하였으니, 후인(後人)이 이름을 지어 그 고개를 호벌치(胡伐峙)라고 하였습니다.

    충절(忠節)이 저처럼 높아, 해와 별처럼 환하게 빛납니다. 예부터 충신(忠臣) 열사(烈士)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마는, 공의 삼부자(三父子)처럼 한 곳에서 순절(殉節)한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풍기(風紀)를 세우고 절의(節義)를 장()하게 여기는 것은 나라의 떳떳한 전례(典禮)이며, 그윽한 것을 드러내고 아름다움을 천양(闡揚)하는 것은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입니다.

    성상(聖上) 임신년(1872),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하고 사제(賜祭)하고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며, 비록 후예(後裔) 가운데 누락(漏落)되어 못 사는 자[遺落殘孑者]라도 특별히 복호(復戶)가 되었습니다. 사적(事蹟)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실려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뛰어난 충량(忠良)은 그야말로 지주고성(砥柱孤星)”이라고 하더라도 참으로 지나치게 미화(美化)한 말이 아니니, 마땅히 천백세(千百世) 불조(不祧)의 전례(典禮)가 있어야만 합니다.

    당시 사림(士林)에서 바야흐로 사당(祠堂)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백육회(百六會)의 창상(滄桑, 滄海桑田의 준말)을 겪은 나머지, 세대(世代)는 멀어지고 사람은 죽어,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앞서, () 동쪽에 창의각(倡義閣)을 창립(刱立)하였으니, 92()의 정충태의(貞忠太義)가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투기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아아, 세월(歲月)이 꽤 오래 되어, 비바람에 갈리고 씻겨, 황폐(荒廢) 퇴락(頹落)하여 남은 것이 없습니다. 선생의 후손 동한군(東熯君)이 특별히 선조를 사모하는 성의(誠義)를 내어, 종족(宗族)과 협의(協議)하고, 자력(資力)을 모아 비()는 예대로 두고, ()은 새로 본군(本郡) 남당(南塘)에 지으려고 하니, 바로 창의(倡義)한 당일(當日)에 회맹(會盟)한 곳이며, 성손(姓孫)이 오늘날도 살고 있는 마을이니, 초하루 보름날에 사림(士林)과 본손(本孫)이 같이 여기에 모여 참배(參拜)하는 의식(儀式)을 행하나, 존모(尊慕)하는 처지에 있어서, 예성(禮誠)은 비록 더욱 돈독(敦篤)하다고 하나, ()는 근거(根據)할 것이 없고, ()는 징빙(徵聘)할 곳이 없습니다.

    선생과 같은 고충대절(孤忠大節), 아직도 조두(俎豆)의 천향(薦享)이 없으니, 충혼(忠魂) 의백(義魄)은 응당 유감(遺憾)이 있을 것이며, 후세(後世)의 선비와 먼 후손들은 누군들 억울(抑鬱)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만약 선생은 해처럼 빛나는 충의(忠義)를 지니셨는데도 결국에 가서 사당(祠堂)을 지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후세(後世)에서 지금의 사람을 평()할 때, 지금 사람들에게 공의(公議)가 있었다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끼?

    대저(大抵) 서원(書院)의 건설(建設), 본래 장수(藏修)하며 덕()을 숭상(崇尙)하고 공훈(功勳)에 보답하는 목적(目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후학(後學)의 모범(模範)이 될 만한 향선생(鄕先生)을 구하여 사당(祠堂)을 세우고 존경(尊敬)함으로써 다사(多士)의 현자(賢者)가 되려는 뜻을 흥기(興起)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에서는 충신(忠臣양신(良臣)에 대하여 이미 포장(襃獎)하는 전례(典禮)가 있고, 선비들은 유현(儒賢)에 대하여 또한 천양(闡揚)하는 공의(公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군(本郡)에서는 유론(儒論)이 일제히 발론(發論)되어, 널리 시의(時議)를 채택(採擇)하여 감히 이에 고()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 군자(君子)께서는, 사람의 버리는 말이라 하지 마시고, 존경심(尊敬心)을 일으켜 포상(褒賞)하는 뜻으로 특별히 무게 있는 한 말씀을 내려주시어, 제사(祭社)를 창설(創設)하도록 하여 주시고 사림(士林)이 귀의(歸依)하여 숭앙(崇仰)할 수 있는 처소(處所)가 되게 하여주시며,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고 떳떳함을 지키며 덕을 좋아하도록 하여 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갑자년(甲子年, 1924) 정월 일

     

    흥덕향교(興德鄕校)

    다사 박승욱(朴勝旭) 이종태(李鍾台) 고제만(高濟萬) 백락윤(白樂允)

    직원 이종구(李棕九) 김수현(金守鉉) 안병연(安秉榮) 이경택(李暻澤)

    장의 백현수(白賢洙) 송근숙(宋根淑) 김영래(金永來) 김기회(金琪會)

    참봉 이강수(李綱洙) 고흔상(高昕相) 백남석(白南碩) 류종택(柳鍾澤)

    고홍진(高泓鎭) 박형원(朴炯源) 고하진(高河鎭) 이항구(李恒九)

    사과 류희갑(柳熙甲) 오제도(吳濟棹) 이정섭(李鼎燮) 김형중(金衡中)

    주사 고순진(高舜鎭) 이병풍(李秉豊) 김구현(金九鉉) 이상기(李相淇)

    김영식(金英植) 백남선(白南璇) 이선구(李璿九) 김병식(金秉植)

    황종관(黃鍾寬) 이규훈(李奎薰) 백락찬(白樂贊)

    열군(列郡) 여러 장보(章甫) 좌하



    全州儒狀

     

    右文爲回敬事 伏以 義旅將判書蔡公諱弘國 號野叟先生 當壬辰島夷之變 與其三子兄弟 及宗族鄕隣九十諸賢 同盟擧義 殉節於扶安上掠峙 後人名其峙曰胡伐峙. 公之三父子 同時殉節 實蹟昭載於竹帛 亘古至今 孰不敬仰. 公之貞忠大節 不參於院宇享祀 非但本孫 實爲士林之抑鬱者也. 謹承來通 先生本孫東熯 協議宗族 貴郡東門倡義閣 歲久荒頹 碑則仍舊 閣則新建于會盟舊址 奉行朔參望謁之禮 極爲欽頌 而以俎豆之意 方有發論 正所謂先獲我心 而不謀同聲 伏願僉尊 亟竣大事 以伸數百年來抑鬱之輿論 千萬幸甚

    甲子正月 日

    全州鄕校

    直員 金允坤 李康元 朴勝大 柳哲秀

    掌議 李周鎬 權文奎 沈在寬 鄭天源

    多士 柳鶴根 金昌浩 李炳仲 黃義贊

    有司 金榮薰 林秉徹 宋奉柱 蘇昌奎

     

    興德鄕校儒林 僉座下

       

     

     

     

    전주유장(全州儒狀)

    이 글은 회경(回敬)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의려장(義旅將) 판서(判書) 채홍국공(蔡弘國公)의 호는 야수선생(野叟先生)이니 임진년 섬 오랑캐의 변()을 당하여 그 세 아들 형제(兄弟)와 종족(宗族향린(鄕隣) 90 제현(諸賢)과 더불어 동맹(同盟) 의거(義擧)하여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에서 순절(殉節)하셨으니, 후인(後人)들이 그 고개의 이름을 호벌치(胡伐峙)라고 하였습니다.

    공의 삼부자(三父子)가 동시(同時)에 순절(殉節)한 실적(實蹟)은 죽백(竹帛)에 소상(昭詳)하게 실려 있어서, 옛날부터 지금까지 누군들 존경(尊敬)하며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공의 정충대절(貞忠大節)이 서원(書院)에서 향사(享祀)를 받지 못하시는 것은, 다만 본손(本孫) 뿐만 아니라 실로 사림(士林)이 억울(抑鬱)해 하는 것입니다.

    삼가 보내주신 통문(通文)을 받고, 선생의 본손(本孫) 동한(東熯)이 종족(宗族)과 협의(協議)하여, 귀군(貴郡) 동문(東門)의 창의각(倡義閣)이 세월이 오래되어 황퇴(荒頹)하였기에, ()는 예전대로 두고 각()은 회맹(會盟)한 옛터에 새로 지어 삭망(朔望)의 참배(參拜)를 봉행(奉行)하신다니, 지극히 흠송(欽頌)하오며, 조두(俎豆)의 뜻으로 바야흐로 발론(發論)이 있다니, 참으로 소위(所謂) “먼저 내 마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며, 우연(偶然)하게도 같은 소리입니다.

    여러분께 엎드려 원하옵건대, 빨리 대사(大事)를 준공(竣工)하시어 수백년(數百年) 이래의 억울(抑鬱)한 여론(輿論)을 펴 주신다면 천만(千萬)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갑자년(甲子年) 정월 일

     

    전주향교(全州鄕校)

    직원 김윤곤(金允坤) 이강원(李康元) 박승대(朴勝大) 류철수(柳哲秀)

    장의 이주호(李周鎬) 권문규(權文奎) 심재관(沈在寬) 정천원(鄭天源)

    다사 류학근(柳鶴根) 김창호(金昌浩) 이병중(李炳仲) 황의찬(黃義贊)

    유사 김영훈(金榮薰) 임병철(林秉徹) 송봉주(宋奉柱) 소창규(蘇昌奎)

     

    흥덕향교 유림 여러분 좌하

     

    羅州儒狀

     

    右文爲回諭事 義旅將判書蔡公諱弘國 號野叟先生 當龍蛇之亂 與其三子及宗族鄕隣同志九十餘賢 擧義殉節 於扶安上掠峙戰敗之日 而其實蹟昭載於湖南倡義錄 百世之下 孰不欽仰其丹忠炳節乎. 公之不參於院宇享祀 實爲輿論之抑鬱者也. 謹承來通 公之本孫東熯 貴郡東門倡義閣 協議宗族 碑則仍舊 閣則新建于會盟舊址 奉行朔參望謁之禮 且以刱設俎豆之所 聞不勝欽聳 但筳撞無力 尙未表於慕賢之誠矣. 貴郡士林 方有發論 正所謂先獲我心 而不謀同聲. 伏願僉尊 亟竣大事 以伸數百年來抑鬱之輿論 千萬幸甚

    甲子二月 日

    羅州鄕校

    多士 林綰圭 朴薰陽 鄭鍾會 羅秉集

    金琪淑 崔榮采 鄭遇慶 李敏璿

    吳弼善 羅翊煥 金權澤 柳庠烈

    直員 羅燾線 李炳植 洪承殷 李芳奎

    掌議 羅宅均 李敎會 李啓善 崔潤德

    李炳龜 朴魯庠 金永冀 鄭在浩

     

    興德鄕校儒林 僉座下

    나주유장(羅州儒狀)

     

    이 글은 유시(諭示)에 회답(回答)하는 것입니다.

    의려장(義旅將) 판서(判書) 채홍국공(蔡弘國公)의 호는 야수선생(野叟先生)이니 용사(龍蛇)의 난()에 당하여 그 세 아들 형제(兄弟)와 종족(宗族향린(鄕隣)의 동지(同志) 90여 현()과 더불어 의거(義擧)하여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에서 전패(戰敗)한 날에 순절(殉節)하셨으며, 그 실적(實蹟)은 호남창의록(湖南倡義錄)에 소상(昭詳)하게 실려 있어서 백세(百世)를 내려가도록 누군들 그 붉은 충성(忠誠)과 빛나는 절의(節義)를 흠앙(欽仰) 하지 않겠습니까?

    공이 서원(書院)에서 향사(享祀)를 받지 못하시는 것은, 실로 여론(輿論)이 억울(抑鬱)해 하는 것입니다.

    삼가 보내주신 통문(通文)을 받고, 공의 본손(本孫) 동한(東熯)이 귀군(貴郡) 동문(東門)의 창의각(倡義閣)을 종족(宗族)과 협의(協議)하여, ()는 예전대로 두고 각()은 회맹(會盟)한 옛터에 새로 세워 삭망(朔望)의 참배(參拜)하는 예()를 봉행(奉行)하신다고 하며, 또 조두(俎豆)의 처소(處所)를 창설(創設)하신다니, 듣고서 삼가 발돋움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다만 정당(筳撞)이 무력(無力)하여, 아직 모현(慕賢)의 성의(誠意)를 표시(表示)하지 못하였습니다.

    귀군(貴郡) 사림(士林)에서 바야흐로 발론(發論)이 있다고 하니, 정녕 소위(所謂) “먼저 내 마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며, 우연(偶然)하게도 같은 소리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여러분께서는 빨리 대사(大事)를 준공(竣工)하시어, 수백년(數百年) 이래의 억울(抑鬱)한 여론(輿論)을 펴 주신다면 천만(千萬)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갑자년(甲子年) 2월 일

    나주향교(羅州鄕校)

    다사 임관규(林綰圭) 박훈양(朴薰陽) 정종회(鄭鍾會) 나병집(羅秉集)

    김기숙(金琪淑) 최영채(崔榮采) 정우경(鄭遇慶) 이민선(李敏璿)

    오필선(吳弼善) 나익환(羅翊煥) 김권택(金權澤) 류상렬(柳庠烈)

    직원 나도선(羅燾線) 이병식(李炳植) 홍승은(洪承殷) 이방규(李芳奎)

    장의 나택균(羅宅均) 이교회(李敎會) 이계선(李啓善) 최윤진(崔潤德)

    이병구(李炳龜) 박노상(朴魯庠) 김영기(金永冀) 정재호(鄭在浩)

     

    흥덕향교 유림 여러분 좌하

     

    光州儒狀

    右文爲回諭事 義旅將判書蔡公諱弘國號野叟先生 當龍蛇之變 與其三子及宗族鄕隣九十諸賢 同盟擧義 殉節於扶安胡伐峙 實蹟照載於湖南節義錄 百世之下 孰不欽仰其丹忠炳節乎. 公之不參於院宇享祀 實爲輿論之抑鬱者也. 謹承來通 先生本孫東熯 貴郡東門倡義閣 協議宗族 碑則仍舊 閣則新建于會盟舊址 而奉行朔參望謁之禮 極爲欽頌 而以刱設俎豆之意 貴郡士林 方有發論 正所謂先獲我心 而不謀同聲 伏願僉尊 亟竣大事 以伸數百年來抑鬱之輿論 千萬幸甚.

    甲子三月 日 光州鄕校

    直員 朴鳳柱 李敎喆 朴夏鏞 李啓寧

    掌議 鄭淳衡 朴載元 宋在根 朴鍾崙

    多士 李秉俊 柳寅燮 崔洙華 高彦柱

    朴從圭 奇京燮 柳永稷 李承鎰

    金光植 尹宗林 鄭海均

    興德鄕校儒林 僉座下

     

    광주유장(光州儒狀)

    이 글은 유시(諭示)에 회답(回答)하는 것입니다.

    의려장(義旅將) 판서(判書) 채홍국공(蔡弘國公)의 호는 야수선생(野叟先生)이니 용사(龍蛇)의 난()에 당하여 그 세 아들과 종족(宗族향린(鄕隣)90 제현(諸賢)과 더불어 동맹(同盟의거(義擧)하여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에서 순절(殉節)하셨으니, 실적(實蹟)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소상(昭詳)하게 실려 있어서 백세(百世)를 내려가도록 누군들 그 붉은 충성(忠誠)과 빛나는 절의(節義)를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공이 서원(書院)에서 향사(享祀)를 받지 못하시는 것은, 실로 여론(輿論)이 억울(抑鬱)해 하는 것입니다.

    삼가 보내주신 통문(通文)을 받고, 선생의 본손(本孫) 동한(東熯)이 귀군(貴郡) 동문(東門)의 창의각(倡義閣)을 종족(宗族)과 협의(協議)하여, ()는 예전대로 두고 각()은 회맹(會盟)한 옛터에 새로 세워 삭망(朔望)의 참배(參拜)하는 예()를 봉행(奉行)하신다고 하며, 또 조두(俎豆)의 처소(處所)를 창설(創設)하신다니, 극히 흠송(欽頌)하오며, 조두(俎豆)를 창설(創設)하는 뜻으로 귀군(貴郡) 사림(士林)에서 바야흐로 발론(發論)이 있다고 하니, 정녕 소위(所謂) “먼저 내 마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며, 우연(偶然)하게도 같은 소리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여러분께서는, 빨리 대사(大事)를 준공(竣工)하시어, 수백년(數百年) 이래의 억울(抑鬱)한 여론(輿論)을 펴 주신다면 천만(千萬)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갑자년(甲子年) 3월 일

    광주향교(光州鄕校)

    직원 박봉주(朴鳳柱) 이교철(李敎喆) 박하용(朴夏鏞) 이계영(李啓寧)

    장의 정순형(鄭淳衡) 박재원(朴載元) 송재근(宋在根) 박종륜(朴鍾崙)

    다사 이병준(李秉俊) 유인섭(柳寅燮) 최수화(崔洙華) 고언주(高彦柱)

    박종규(朴從圭) 기경섭(奇京燮) 유영직(柳永稷) 이승일(李承鎰)

    김광식(金光植) 윤종림(尹宗林) 정해균(鄭海均)

     

    흥덕향교 유림 여러분 좌하

     

     

    綾州儒狀

    右文爲答通事 來顯忠節 士林之公議也 肯構先廬 子孫之誠意也 故判書蔡公諱弘國號野叟先生之樹勳立節 前此艶仰 而今承貴郡通章可悉 其宗族三十餘員及同志六十餘員之同殉國亂 尤不勝感嘆 噫 世劫滄桑 院宇俎豆之典 己屬先天之事也. 而幸玆極天罔墜者 秉彛士林之公議 如是鄭重 本孫之血誠 如是勤苦 倡義碑閣之在於東門外者 將移建于南塘舊址 以表尊賢之義 以伸追遠之誠 凡我冠儒服儒者 孰不奮發感慕哉. 玆以仰答 惟僉尊另加贊助 以竣大事之地 幸甚

    甲子三月 日 綾州鄕校

    直員 梁會奎 閔泳圭 奇俊燮 李正休

    掌議 文在浩 金秉厚 裵致黙 安錫煥

    校任 孫聲鏞 鄭淳昱 李喆鎬 具敎丙

    多士 洪承煥 曺秉鎰 高翊柱 梁權承

    鄭淳綱 李秉英 金正熙 文中煥

    興德鄕校儒林 僉座下

     

    능주유장(綾州儒狀)

     

    이 글은 통문(通文)에 답하는 것입니다.

    충절(忠節)을 드러내는 것은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이며, 선려(先廬)를 긍구(肯構)하는 것은 자손(子孫)의 성의(誠意)입니다.

    () 판서(判書) 채홍국공(蔡弘國公)은 호가 야수(野叟)이시니, 선생의 수훈(樹勳입절(立節)은 전부터 부러워하고 우러러보았으나, 지금 귀군(貴郡)의 통장(通章)을 받고 모두 잘 알았습니다.

    그 종족(宗族) 30여 명과 동지(同志) 60여 명이 국란(國亂)에 순절(殉節)한 것은 무엇보다도 감탄(感歎)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아, 세상은 겁나게 창상(滄桑)을 겪는데, 원우(院宇)에 조두(俎豆)하는 전례(典禮)는 이미 선천(先天)의 일에 속한 것인데, 다행하게도 이에 하늘 끝에서 추락(墜落)하지 않은 것은 떳떳함을 지키는 사림(士林)의 공의(公議)가 이같이 정중(鄭重)하고, 본손(本孫)의 혈성(血誠)이 이같이 부지런히 애 쓰니, 동문(東門) 밖에 있는 창의비각(倡義碑閣)을 남당(南塘) 옛터에 옮겨 존현(尊賢)하는 의의(意義)를 표시하여 추원(追遠)의 정성을 편다고 하니, 우리 모든 유관(儒冠)을 쓰고 유복(儒服)을 입은 자는, 누군들 분발(奮發감모(感慕)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우러러 답()하오니, 오직 여러분께서는 특히 찬조(贊助)를 가()하시어 대사(大事)를 준공(竣工)하시면 고맙겠습니다.

    갑자년(甲子年, 1924) 3월 일

    능주향교(綾州鄕校)

    직원 양회규(梁會奎) 민영규(閔泳圭) 기준섭(奇俊燮) 이정휴(李正休)

    장의 문재호(文在浩) 김병후(金秉厚) 배치묵(裵致黙) 안석환(安錫煥)

    교임 손성용(孫聲鏞) 정순욱(鄭淳昱) 이철호(李喆鎬) 구교병(具敎丙)

    다사 홍승환(洪承煥) 조병일(曺秉鎰) 고익주(高翊柱) 양권승(梁權承)

    정순강(鄭淳綱) 이병영(李秉英) 김정희(金正熙) 문중환(文中煥)

     

    흥덕향교 유림 여러분 좌하

    長城儒狀

    右文爲回敬事 義旅將判書蔡公諱弘國號野叟先生 當龍蛇之變 與其三子及宗族鄕隣同志九十餘賢 同盟擧義 殉節於扶安胡伐峙 戰敗之日 而其實蹟 昭載於湖南倡義錄 百世之下 孰不欽仰其丹忠炳節乎. 公之不參於院宇享祀 實爲輿論之抑鬱者也. 謹承來通 貴郡東門倡義閣 累經風霜 幾至頹廢 今其本孫東熯 協議宗族 碑則仍舊 閣則新建于會盟舊址 奉行朔參望謁之禮 極爲欽頌 而以刱設俎豆之意 貴郡士林 方有發論 正所謂先獲我心 而不謀同聲 伏願僉尊 亟竣大事 以伸數百年來抑鬱之輿論 千萬幸甚.

    甲子正月 日 長城鄕校

    直員 邊鎭旭 高光鏞 金堯重 白洛恒

    掌議 邊昇基 金肯鉉 邊楠淵 金鶴洙

    多士 金基尙 宋奎洛 沈能九 金漢熺

    興德鄕校儒林 僉座下

     

     

    장성유장(長城儒狀)

     

    이 글은 회경(回敬)하는 것입니다.

    의려장(義旅將) 판서(判書) 채홍국공(蔡弘國公)의 호는 야수선생(野叟先生)이니 용사(龍蛇)의 변()에 당하여, 그 세 아들과 종족(宗族향린(鄕隣)의 동지(同志) 90여 현()과 더불어 동맹(同盟의거(義擧)하여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에서 전패(戰敗)하는 날 순절(殉節)하셨으며, 그 실적(實蹟)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소상(昭詳)하게 실려 있어서 백세(百世)를 내려가도록 누군들 그 붉은 충성(忠誠)과 빛나는 절의(節義)를 흠앙(欽仰) 하지 않겠습니까?

    공이 서원(書院)에서 향사(享祀)를 받지 못하시는 것은, 실로 여론(輿論)이 억울(抑鬱)해 하는 것입니다.

    삼가 보내주신 통문(通文)을 받고, 귀군(貴郡) 동문(東門)의 창의각(倡義閣)이 여러 해 풍상(風霜)을 겪어 거의 퇴폐(頹廢)하게 되어, 지금 그 본손(本孫) 동한(東熯)이 종족(宗族)과 협의(協議)하여, ()는 예전대로 두고 각()은 회맹(會盟)한 옛터에 새로 세워 삭망(朔望)의 참배(參拜)하는 예()를 봉행(奉行)하신다고 하니 지극히 흠송(欽頌)하오며, 조두(俎豆)의 처소(處所)를 창설(創設)하신다는 뜻으로 귀군(貴郡) 사림(士林)이 바야흐로 발론(發論)이 있다고 하니, 정녕 소위(所謂) “먼저 내 마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며, 우연(偶然)하게도 같은 소리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여러분께서는 빨리 대사(大事)를 준공(竣工)하시어, 수백년(數百年) 이래의 억울(抑鬱)한 여론(輿論)을 펴 주신다면 천만(千萬)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갑자년(甲子年) 정월 일

    정성향교(長城鄕校)

    직원 변진욱(邊鎭旭) 고광용(高光鏞) 김요중(金堯重) 백락항(白洛恒)

    장의 변승기(邊昇基) 김긍현(金肯鉉) 변남연(邊楠淵) 김학수(金鶴洙)

    다사 김기상(金基尙) 송규락(宋奎洛) 심능구(沈能九) 김한희(金漢熺)

     

    흥덕향교 유림 여러분 좌하

     

    任實儒狀

    右文爲回敬事 褒忠獎節 朝家之盛典也 闡幽揚美 士林之公議也. 故義旅將判書蔡公諱弘國號野叟先生 當壬辰之亂 與其三子及宗族同志九十餘義士 同盟擧義 而至於丁酉再猘 其子兄弟叔姪宗族及前日同謀諸賢 殉節於扶安上掠峙 後人名其峙曰胡伐峙 實蹟 昭載於竹帛 而百世之下 孰不欽仰公之貞忠大節乎. 不參於院宇享祀 實爲輿論之抑鬱者也. 謹承來通 先生本孫東熯 協議宗族 貴郡東門倡義閣 累經星霜 至於頹敗之境 碑則仍舊 閣則新建于會盟舊址 奉行朔參望謁之禮 極爲欽頌 而以刱設俎豆之意 列郡章甫 方有發論 正所謂先獲我心 而不謀同聲 伏願僉尊 亟竣大事 以伸數百年來抑鬱之輿論 千萬幸甚.

    甲子二月 日 任實鄕校

    直員 李起鎬 韓喆敎 朴源忠 吳昶淵

    掌議 韓興錫 宋晩浩 金聲基 李光儀

    興德鄕校儒林 僉座下

     

    임실유장(任實儒狀)

    이 글은 회경(回敬)하는 것입니다.

    충의(忠義)에 포상(襃賞)하고 절의(節義)를 장려(獎勵)함은 나라의 성전(盛典)이며, 그윽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은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입니다.

    () 의려장(義旅將) 판서(判書) 채홍국공(蔡弘國公)의 호는 야수선생(野叟先生)이니 임진(壬辰)의 난()에 당하여, 그 세 아들과 종족(宗族동지(同志) 90여 의사(義士)와 더불어 동맹(同盟의거(義擧)하였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에서 그 아들 형제, 숙질(叔侄), 종족(宗族), 전일(前日) 동모(同謀)한 여러 사람과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에서 순절(殉節)하셨으니, 후인(後人)들이 그 고개를 호벌치(胡伐峙)라고 하였습니다. 그 실적(實蹟)은 죽백(竹帛)에 소상(昭詳)하게 실려 있어서 백세(百世)를 내려가도록 누군들 공의 정충대절(貞忠大節)을 흠앙(欽仰) 하지 않겠습니까?

    서원(書院)에서 향사(享祀)를 받지 못하시는 것은 실로 여론(輿論)이 억울(抑鬱)해 하는 것입니다.

    삼가 보내주신 통문(通文)을 받고 본손(本孫) 동한(東熯)이 종족(宗族)과 협의(協議)하여, 귀군(貴郡) 동문(東門)의 창의각(倡義閣)이 여러 해 풍상(風霜)을 겪어 퇴폐(頹廢)하는 지경에 이르러, ()는 예전대로 두고 각()은 회맹(會盟)한 옛터에 새로 세워 삭망(朔望)의 참배(參拜)하는 예()를 봉행(奉行)하신다고 하니 지극히 흠송(欽頌)하오며 조두(俎豆)의 처소(處所)를 창설(創設)하신다는 뜻으로 열군(列郡)의 선비들이 바야흐로 발론(發論)이 있다고 하니, 정녕 소위(所謂) “먼저 내 마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며, 우연(偶然)하게도 같은 소리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여러분께서는, 빨리 대사(大事)를 준공(竣工)하시어, 수백년(數百年) 이래의 억울(抑鬱)한 여론(輿論)을 펴 주신다면 천만(千萬)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갑자년(甲子年) 2월 일

    임실향교(任實鄕校)

    직원 이기호(李起鎬) 한철교(韓喆敎) 박원충(朴源忠) 오창연(吳昶淵)

    장의 한흥석(韓興錫) 송만호(宋晩浩) 김성기(金聲基) 이광의(李光儀)

     

    흥덕향교 유림 여러분 좌하

    古阜儒狀

    右文爲回諭事 伏以 義旅將判書蔡公諱弘國號野叟 當龍蛇之亂 與其三子兄弟叔姪及宗族三十三人 鄕隣九十二賢 同盟擧義 而丁酉再倡 殉節於扶安胡伐峙 公之三父子 同時殉節 實蹟昭載於湖南節義錄 百世之下 孰不欽仰其丹忠炳節乎. 公之院宇不參 實爲輿論之抑鬱者也. 謹承來通 先生本孫東熯 協議宗族 貴郡東門外倡義閣 累經風霜 幾至傾頹 碑則仍舊 閣則新建于會盟舊址 奉行朔參望謁之禮 刱設俎豆之擧 極爲欽頌 可謂先獲我心而同聲相應處也. 伏願僉君子 亟竣大事 俾伸數百年來抑鬱之輿論 千萬幸甚.

    甲子三月 日 古阜鄕校

    直員 金相雄 韓圭煥 金洛炫 柳昌大

    掌議 吳昌鎬 金煥鳳 崔益求 金在炯

    進士 鄭熙源 宋鎭秉 金泰燮 羅濟棟

    進士 殷成雨 李鍾河

    興德鄕校儒林 僉座下

     

     

    고부유장(古阜儒狀)

     

    이 글은 유시(諭示)에 회답(回答)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의려장(義旅將) 판서(判書) 채홍국공(蔡弘國公)의 호는 야수선생(野叟先生)이니 용사(龍蛇)의 난()에 당하여, 그 세 아들 형제(兄弟숙질(叔侄)과 종족(宗族) 33 (), 향린(鄕隣)92 ()과 동맹(同盟거의(擧義)하였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부안(扶安) 호벌치(胡伐峙)에서 순절(殉節)하셨으니, 공의 삼부자(三父子)가 동시(同時)에 순절(殉節)하였습니다. 그 실적(實蹟)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소상(昭詳)하게 실려 있어서 백세(百世)를 내려가도록 누군들 공의 단충병절(丹忠炳節)을 흠앙(欽仰) 하지 않겠습니까?

    공이 서원(書院)에서 향사(享祀)를 받지 못하시는 것은, 실로 여론(輿論)이 억울(抑鬱)해 하는 것입니다.

    삼가 보내주신 통문(通文)을 받고, 본손(本孫) 동한(東熯)이 종족(宗族)과 협의(協議)하여, 귀군(貴郡) 동문(東門) 밖의 창의각(倡義閣)이 여러 해 풍상(風霜)을 겪어 거의 기울고 퇴폐(頹廢)하기에 이르러, ()는 예전대로 두고 각()은 회맹(會盟)한 옛터에 새로 세워 삭망(朔望)의 참배(參拜)하는 예()를 봉행(奉行)하고 조두(俎豆)를 창설(創設)하신다니, 지극히 흠송(欽頌)하오며 참으로 소위(所謂) “먼저 내 마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며, 같은 소리로 호응(呼應)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여러분께서는 빨리 대사(大事)를 준공(竣工)하시어, 수백년(數百年) 이래의 억울(抑鬱)한 여론(輿論)을 펴 주신다면 천만(千萬)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갑자년(甲子年) 3월 일 古阜鄕校

     

    직원(直員) 김상웅(金相雄) 한규환(韓圭煥) 김낙현(金洛炫) 류창대(柳昌大)

    장의(掌議) 오창호(吳昌鎬) 김환봉(金煥鳳) 최익구(崔益求) 김재형(金在炯)

    진사(進士) 정희원(鄭熙源) 송진병(宋鎭秉) 김태섭(金泰燮) 나제동(羅濟棟)

    진사(進士) 은성우(殷成雨) 이종하(李鍾河)

     

    흥덕향교 유림 여러분 좌하

     

    樂安儒狀

    奉讀來諭 昔在龍蛇之變 興州義將野叟蔡公諱弘國 見霽峯高公之移檄 起募鄕里 急赴錦山 及高公之敗 收亡卒以歸 與其三子 提九十二 同日而盟 同事而起 其氣可以排南山 其義足以抗北斗 方是時隣郡得全. 及丁酉再猘 同謀更擧 勢孤力弱 俱被鋒鏑之患 嗚呼 當時荷戈者·杖劒者·奮袂者·張拳者 人人不同其事者何限 而一家三四父子 同時冒刃而死 有如蔡公之忠孝純備者哉 盖其前後數節 非智勇之出衆 不能爲九十之先驅 則於此可見公之爲公也. 使世之論者不知蔡公之心 請觀於霽峯欲識九十之功 請觀於倡義碑. 惜乎 列聖朝之屢褒贈 可謂盛矣 而尙欠俎豆之典 此必有待後日而然者也. 噫 彼諸公之卓犖氣節並美爭光 興士之公論 復倡於三百年久鬱之後 自此世之語公者 可謂無餘憾 然則貴郡多士之旣所欽艶 宜所不可 而况今日域中苟生而不死 凡有血氣者 孰謂不知公 而不親公也 生等 槩據野史 今觀本狀 凜然起敬不遑 以非其人辭 然所愧 事鉅筆弱 不能闡其萬一也. 竊惟僉君子 亟加闡揚之道 俾無湮沒之地 幸甚.

    甲子 二月 日 樂安鄕校

    多士 李泰一 韓斗錫 安圭休 金龍錫

    朴在東 曹勉承 朴魯燮 姜晉秀

    直員 裵泳柱 朴仁植 金昶洙 韓相俊

    掌議 申喆雨 丁翰根 林炳鎬 金永輔

    興德鄕校儒林 僉座下



    낙안유장(樂安儒狀)

     

    보내주신 유시(諭示)를 받들어 읽어보니, 옛날 용사(龍蛇)의 변(), 흥주(興州)의 의려장(義旅將) 야수(野叟) 채홍국공(蔡弘國公)은 제봉(霽峯) 고공(高公)의 격문(檄文)을 보고, 향리(鄕里)에서 의병(義兵)을 모아 급히 금산(錦山)으로 갔는데, 고공(高公)이 패()하자 흩어진 군졸(軍卒)을 수습(收拾)하여 돌아와서 그 세 아들과 92 의사(義士)가 손잡고 같은 날 맹서(盟誓)하고 같은 일로 일어서니, 그 기개(氣槪)는 그야말로 남산(南山)을 밀어내고, 그 절의(節義)는 충분히 북두(北斗)를 항거(抗拒)할만 하였으니, 바야흐로 이 때 이웃 고을이 온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정유년에 다시 왜적들이 미친개처럼 날뛰니, 함께 다시 거사(擧事)하였으나, ()가 외롭고 힘이 약하여 모두 칼끝과 살촉에 해()를 입었습니다.

    아아, 당시 창을 둘러멘 자, ()을 잡은 자, 옷소매를 떨친 자, 주먹을 벌린 자[張拳者],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게 그 일을 한 자가 어찌 한정(限定)이 있을까마는, 그러나 일가(一家) 34 부자(父子)가 동시(同時)에 칼날을 무릅쓰고 죽어서, 채공(蔡公)과 같이 충효(忠孝)를 순수(純粹)하게 갖춘 자가 있겠습니까?

    대개 그 전후의 수절(數節)은 지용(智勇)이 뛰어나지 않고서는 90 의사(義士)의 선구(先驅)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니, 여기서 공()의 공다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논자(論者)로서 채공(蔡公)의 마음을 모른다면, ()컨대 제봉(霽峯)에게서 보고 90 의사(義士)의 공()을 알려고 한다면, ()컨대 창의비(倡義碑)에서 보십시오.

    아까운 것은, 여러 임금이 여러 번 포상(襃賞)하고 증직(贈職)한 것이 성대하였다고는 하나, 아직도 조두(俎豆)의 전례(典禮)가 없습니다. 이는 필시(必是) 후일(後日)을 기다려서 그런 것일 듯합니다.

    아아, 저 제공(諸公)의 뛰어난 기절(氣節)은 모두 아름다워 광채(光彩)를 다툽니다. 흥덕(興德) 선비의 공론(公論)이 다시 300 년이나 오래 억울(抑鬱)하던 뒤에 주창(主倡)되니, 이제부터는 세상에서 공에 대하여 말하는 자는 여감(餘憾)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귀군(貴郡) 다사(多士)가 이미 흠염(欽艶)하던 것은 마땅히 불가(不可)하며 더구나 오늘날 온 나라 안의 구차(苟且)하게 살면서 죽지 않은 모든 혈기(血氣) 있는 자가 누군들 공을 모른다고 하겠으며 공과 친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 등은 대개 야사(野史)에 의거(依據)하였는데, 이제 이 유장(儒狀)을 보니, 늠연(凜然)하게 일어나 경의(敬意)를 표하고, 그 적임(適任)이 아니라고 하여 사양(辭讓)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은, 일은 큰데 붓이 미약(微弱)하여 그 만()의 하나도 천양(闡揚)할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여러분께서 빨리 천양(闡揚)하는 도리(道理)를 더하시어 인멸(湮滅)되지 않도록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갑자년(甲子年) 2월 일

    낙안향교(樂安鄕校)

    다사 이태일(李泰一) 한두석(韓斗錫) 안규휴(安圭休) 김용석(金龍錫)

    박재동(朴在東) 조면승(曹勉承) 박노섭(朴魯燮) 강진수(姜晉秀)

    직원 배영주(裵泳柱) 박인식(朴仁植) 김창수(金昶洙) 한상준(韓相俊)

    장의 신철우(申喆雨) 정한근(丁翰根) 임병호(林炳鎬) 김영보(金永輔)

     

    흥덕향교 유림 여러분 좌하

     


     

    茂長儒狀



    右文爲回敬事 伏以 爲國死節之臣從古何限 而未有如貴郡蔡氏一門三十三人之多且衆者 至今泯沒 未蒙俎豆之典 豈非士林之抑鬱者哉 竊惟興城義旅將判書蔡公諱弘國號野叟先生 當壬辰倭寇之變 與其三子及宗族鄕隣九十二諸賢 爲國誓死 而至於丁酉再猘 忽聞賊衆大至 又其三子 與前日同志者 轉戰于扶安上掠峙 强弱不敵 竟死於賊 後人名其峙曰胡伐峙. 公之三父子同地殉節 實蹟 昭載於國乘 古今天下 孰不敬仰其貞忠大節乎. 以若公之貫日之誠 未參於院宇享祀 實爲士林與本孫之抑鬱者也. 謹承來諭 貴郡東門倡義閣 歲久風霜 幾至傾頹 先生後孫東熯 與其族祖京洌協議 碑則仍舊 閣則新建于南塘舊址 奉行朔參望謁之禮 極爲欽頌 而以祭祀之意 列郡章甫 方有發論 先獲我心而不謀同聲 伏願僉尊 亟竣大事 以伸抑鬱之輿論 幸甚.

    甲子三月 日 戊長鄕校

    直員 姜鍾應 成寅修 金在憲 李元燮

    多士 吳秉植 鄭休直 吳宗煥 金根鎬

    金基煥 洪在新

    興德鄕校儒林 僉座下



    무장유장(茂長儒狀)

     

    이 글은 회경(回敬)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나라를 위하여 절의(節義)에 죽은 신하(臣下)가 옛날부터 어찌 한정(限定)이 있겠습니까마는, 귀군(貴郡) 채씨(蔡氏) 일문(一門)처럼 33 ()이라는 많은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민몰(泯沒)하여 조두(俎豆)의 전례(典禮)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사림(士林)의 억울(抑鬱)해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건대, 흥성(興城)의 의려장(義旅將) 판서(判書) 채홍국공(蔡弘國公)의 호는 야수선생(野叟先生)이니 임진년 왜구(倭寇)의 변()을 당하여 그 세 아들 형제(兄弟)와 종족(宗族향린(鄕隣) 90 제현(諸賢)과 더불어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맹서(盟誓)하고,

    정유년 재란(再亂)에 이르러, 갑자기 왜적의 무리가 크게 이르렀다고 듣고, 또 그 세 아들과 전일의 동지자(同志者)와 더불어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로 전전(轉戰)하였는데, 강약(强弱)이 부적(不敵)하여 결국 왜적에게 죽으니, 후인(後人)들이 그 고개를 호벌치(胡伐峙)라고 하였습니다. 공의 삼부자(三父子)가 같은 땅에서 순절(殉節)한 실적(實蹟)은 국승(國乘)에 소상(昭詳)하게 실려 있으니, 고금(古今) 천하(天下)에 누가 그 정충대절(貞忠大節)을 존경하여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공의 해를 꿰뚫는 충성(忠誠)을 가지고도 아직 원우(院宇)의 향사(享祀)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사림(士林)과 본손(本孫)의 억울(抑鬱)함이 됩니다.

    삼가 보내주신 유시(諭示)를 받으니, 귀군(貴郡) 동문(東門)의 창의각(倡義閣)이 세월이 오래되어 거의 쓰러져 황폐(荒廢)할 지경에 이르러, 선생의 본손(本孫) 동한(東熯)과 그 족조(族祖) 경렬(京冽)이 협의(協議)하여, ()는 예전대로 두고 각()은 남당(南塘) 옛터에 새로 지어 삭망(朔望)의 참배(參拜)를 봉행(奉行)하신다니, 지극히 흠송(欽頌)하오며, 제사(祭祀)의 뜻으로 열군(列郡)의 선비가 바야흐로 발론(發論)이 있다니, “먼저 내 마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며, 우연(偶然)하게도 같은 소리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여러분께서는 빨리 대사(大事)를 준공(竣工)하시어 억울(抑鬱)한 여론(輿論)을 펴 주신다면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갑자년(甲子年) 3월 일

    무장향교(戊長鄕校)

    직원 강종응(姜鍾應) 성인수(成寅修) 김재헌(金在憲) 이원섭(李元燮)

    다사 오병식(吳秉植) 정휴직(鄭休直) 오종환(吳宗煥) 김근호(金根鎬)

    김기환(金基煥) 홍재신(洪在新)

     

    흥덕향교 유림 여러분 좌하

     

     

    高敞儒狀


    右文爲回諭事 伏以 義旅將判書蔡公諱弘國號野叟先生 當龍蛇之變 與其三子及宗族鄕隣九十餘賢 同盟擧義 而至於丁酉再倡 其子兄弟叔姪 前日同志諸賢 殉節於扶安上掠峙 戰敗之日 而其實蹟 昭載於湖南節義錄 百世之下 孰不欽仰 其丹忠炳節乎. 如公之貞忠高義 院宇不參 實爲輿論之抑鬱者也. 謹承來通 之本孫東熯 與其族祖京洌 協謀貴郡東門外倡義閣 累經風霜 幾至傾頹 碑則仍舊 閣則新建于南塘會盟舊址 奉行朔參望謁之誠 極爲欽頌 以刱設俎豆之意 貴郡士林 方有發論 正所謂先獲我心 而不謀同聲 伏願僉尊 亟竣大事 以伸數百年來抑鬱之輿論 千萬幸甚.

    甲子三月 日 高敞鄕校

    直員 金在鍾 李孔雨 安秉勛 曺國承

    掌議 柳春錫 金在勉 林基萬 沈宜璜

    多士 金進鉉 李璘寧 金魯洙 姜信欽

    柳衍直 趙斗明 李鍾晷 徐錫煥

    申鉉佶 朴桓求 曺錫均 柳春善

    興德鄕校儒林 僉座下



    고창유장(高敞儒狀)

     

    이 글은 유시(諭示)에 회답(回答)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의려장(義旅將) 판서(判書) 채홍국공(蔡弘國公)의 호는 야수선생(野叟先生)이니 임진년 용사(龍蛇)의 변()을 당하여 그 세 아들과 종족(宗族향린(鄕隣) 90여 제현(諸賢)과 더불어 동맹(同盟) 거의(擧義)하였습니다.

    정유년에 이르러 다시 창의(倡義)하여 그 아들 형제(兄弟숙질(叔侄)과 전일의 동지(同志) 제현(諸賢)과 더불어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에서 싸움에 패()한 날 순절(殉節)하였으며, 그 실적(實蹟)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소상(昭詳)하게 실려 있으니, 백세(百世)가 내려간 뒤에라도 누가 그 붉은 충성·빛나는 절의(節義)를 존경하여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공과 같은 정충고의(政忠高義)를 가지고도 아직 원우(院宇)의 향사(享祀)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여론(輿論)이 억울(抑鬱)해 하는 것입니다.

    삼가 보내주신 통문(通文)을 받으니, 공의 본손(本孫) 동한(東熯)과 그 족조(族祖) 경렬(京冽)이 협의(協議)하여, 귀군(貴郡) 동문(東門) 밖의 창의각(倡義閣)이 여러 해 풍상(風霜)을 겪어, 거의 쓰러져 황폐(荒廢)할 지경에 이르러, ()는 예전대로 두고 각()은 남당(南塘) 회맹(會盟)한 옛터에 새로 지어, 삭망(朔望)에 참배(參拜)하는 예()를 봉행(奉行)하신다니, 지극히 흠송(欽頌)하오며, 조두(俎豆)를 창설(創設)하는 뜻으로 귀군(貴郡)의 사림(士林)이 바야흐로 발론(發論)이 있다니, 정녕 먼저 내 마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며, 우연(偶然)하게도 같은 소리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여러분께서는 빨리 대사(大事)를 준공(竣工)하시어 수백년(數百年) 내려온 억울(抑鬱)한 여론(輿論)을 펴 주신다면 천만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갑자년(甲子年) 3월 일

    고창향교(高敞鄕校)

    직원 김재종(金在鍾) 이공우(李孔雨) 안병훈(安秉勛) 조국승(曺國承)

    장의 류춘석(柳春錫) 김재면(金在勉) 임기만(林基萬) 심의황(沈宜璜)

    다사 김진현(金進鉉) 이인녕(李璘寧) 김노수(金魯洙) 강신흠(姜信欽)

    류연직(柳衍直) 조두명(趙斗明) 이종구(李鍾晷) 서석환(徐錫煥)

    신현길(申鉉佶) 박환구(朴桓求) 조석균(曺錫均) 류춘선(柳春善)

     

    흥덕향교 유림 여러분 좌하



    武城書院儒狀


    右文爲回敬事 褒忠獎節 朝家之懿典 建祠設院 士林之公議也. 伏以 野叟蔡先生 在昔龍蛇之變 首倡義旅 三父子同地殉節 偉蹟 昭載靑史 其貞忠大義 凜乎霜雪 炳乎日月矣. 百世之下 孰不欽仰哉. 已於聖朝 特蒙贈褒而 俎豆一事 尙此欠禮 凡我士林 豈非所共耻責耶. 顧念世級滄桑 未遑曾擧 而今此壇享發論 若非諸君子尊賢慕忠之至 焉能如是 不勝欽嘆萬萬 鄙等 忝在士林之厠 雖未獲參當局有司之責 豈無異日參拜之道乎. 惟願僉君子 另加宣力 克竣大事 俾爲妥享之地 千萬幸甚.

    甲子四月 日 武城書院

    多士 金思兼 朴齊大 金克中 白南鈗

    權在一 閔在鎬 宋鍾漢 高光祖

    金直述 李喜鳳 權承述 白樂一

    興德鄕校儒林 僉座下

     

     

    무성서원유장(武城書院儒狀)

     

    이 글은 회경(回敬)하는 것입니다.

    충절(忠節)에 대하여 포장(襃獎)하는 것은 나라의 아름다운 전례(典禮)이며, 사원(祠院)을 건설(建設)하는 것은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입니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야수(野叟) 채선생(蔡先生)은 옛날 용사(龍蛇)의 변()에 먼저 의병(義兵)을 일으키시고, 삼부자(三父子)가 같은 땅에서 순절(殉節)하셨으니, 훌륭한 사적(事蹟)은 청사(靑史)에 소상하게 실려 있습니다. 그 정충대의(貞忠大義)는 늠연(凜然)하기가 상설(霜雪)과 같고, 밝게 빛나기는 일월(日月)과 같으니, 백세(百世)가 지나도록 누가 흠모하며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이미 성조(聖朝)에서 특별하게 증직(贈職)과 포상(襃賞)을 받았으나, 조두(俎豆, 祭祀) 한 가지 일만은 아직도 이렇게 전례(典禮)가 없으니, 우리 사림(士林)은 모두 어찌 함께 부끄러워하고 자책(自責)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창해상전(滄海桑田)처럼 크게 변동(變動)하는 때를 당하여 일찍이 거행(擧行)할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이렇게 단향(壇享)을 발론(發論)하니, 만약 제군자(諸君子)의 존현모충(尊賢慕忠)하는 마음이 지극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되었겠습니까? 천 번 만 번 흠탄(欽嘆)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욕되게 사림(士林)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비록 국면(局面)을 담당하는 유사(有司)의 책임(責任)에는 참여(參與)하지 못하고 있으나, 어찌 후일(後日)에 참배하는 도리(道理)가 없겠습니까?

    오직 여러 군자(君子)에게 원하옵건대, 각별히 힘쓰시어 잘 대사(大事)를 준공(竣工)하시어 편안히 모시고 제향(祭享)을 올리도록 하시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갑자년(甲子年) 4월 일

    무성서원(武城書院)

    다사 김사겸(金思兼) 박제대(朴齊大) 김극중(金克中) 백남윤(白南鈗)

    권재일(權在一) 민재호(閔在鎬) 송종한(宋鍾漢) 고광조(高光祖)

    김직술(金直述) 이희봉(李喜鳳) 권승술(權承述) 백낙일(白樂一)

     

    흥덕향교 유림 여러분 좌하



    高敞鼎山齋儒狀


    謹再拜敬覆于興城校宮 僉尊執事 伏以 義旅將野叟蔡先生 敵慨之義 扶危之忠 有足振勵當世興起百代 而祭祀之禮 未遑於明時 寔是士林之遺憾也. 顧此世道陵遲 而貴郡儒論 及 時齊發 將以修前日之所未擧 以爲崇賢警俗之地 不食之果 爲陽復之漸 觀於此而可驗也. 秉夷攸同 曷不欽艶 惟願僉尊執事 益加努力 以光斯文 不勝幸甚.

    甲子四月 日

    鼎山講堂儒生

    柳致善 鄭淳榮 李孔雨 曺錫儀 金在運 柳永善

    興德校宮 僉尊執事

     

     

    고창정산재유장(高敞鼎山齋儒狀)

     

    삼가 재배(再拜)하고, 삼가 흥성교궁(興城校宮)의 여러 집사(執事)에게 답장을 올립니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의려장(義旅將) 야수(野叟) 채선생(蔡先生)의 적개심(敵愾心)에 불타는 의()와 위급(危急)한 나라를 떠받친 충성(忠誠)은 충분히 당세(當世)를 진려(振勵)하고 백대(百代) 뒤의 사람을 흥기(興起)시키는 것이 있는데, 제사(祭祀)의 전례(典禮)가 밝은 시대(時代)에도 겨를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사림(士林)의 유감(遺憾)이었습니다.

    이 세도(世道)가 능지(陵遲)한 때를 돌아볼 때, 귀군(貴郡)의 유론(儒論)이 때맞추어 함께 일어나서, 전일(前日)에 거행(擧行)하지 못한 것을 다스려, 현인(賢人)을 숭상(崇尙)하고 풍속(風俗)을 경계(警戒)하려고 하니, 박괘(剝卦)의 먹지 못할 과실(果實)에서 복괘(復卦)의 양기(陽氣)가 점점 돌아오게 되는 것을, 이것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 주역에서 온 말. 군자(君子)가 불우(不遇)한 처지에 있다가 차차 양기(陽氣)가 돌아오게 되는 순환의 이치를 말함.] 병이(秉夷)하는 것이 같으니, 어찌 흠모(欽慕)하고 부러워하지 않겠습니끼?

    오직 원하는 것은, 여러 높으신 집사(執事) 여러분께서 더욱 노력(努力)하시어, 사문(斯文)을 빛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갑자년(甲子年) 4월 일

    정산강당(鼎山講堂) 유생(儒生)

    류치선(柳致善) 정순영(鄭淳榮) 이공우(李孔雨) 조석의(曺錫儀)

    김재운(金在運) 류영선(柳永善)

     

    흥덕교궁(興德校宮) 여러 높으신 지사(執事)님께



    井邑儒狀


    右回敬事 致忠盡節 國之爲幹獎節 褒忠務之當急 盖忠而不褒 則忠不勸 節而不獎 則節不興 無節無忠 國不國矣. 故必爲表章焉. 爲崇報焉 于以風厲乎千秋 矜式乎百世 乃士林之公議 國家之通規也. 謹按野叟蔡先生貞忠大節 昭載於湖南節義錄 詳具於貴校通文 不可一一枚擧 而姑据大槩 表而言之 則當宣廟朝龍蛇之變 慷慨忘身 與其兄弟子姪及鄕里同志者 合九十二人同盟於興城之北南塘里 灑血登壇 徒以義氣激勵 視死如歸 與長子命達 次子慶達 力戰不利 同地殉節於扶安胡伐峙 時則丁酉四月二十日也. 古固有殺身成仁者 或一代一人 人猶嚮風揭烈 况先生之一家三人耶. 義肝忠贍 建天地而幷日月 可以詔之千百代 凡有血氣之倫 而賦秉彛之衷者. 必當聞風起敬 於先生祠宇矣. 豈不卓卓尤茂哉. 前後事實 埩於霽峯高先生籩豆牲醴 宜有不祧之典 而士氣不振 尙今仍循矣. 先生之后孫東熯 與其族祖京洌 追遠慕先之誠 鳩財建祠設享 奚徒姓孫之所爲哉. 誠是士林之公論耳. 伏願僉位 春秋釋菜 依書院例 善爲奉行 而講品定式 又薦鄕先生 可爲矜式者 並爲配享扶 植綱常之地 幸甚.

    庚午十一月 日 井邑鄕校

    直員 申元均 安東觀 金載述 安東說

    多士 柳厚相 孫權植 申泰勛 李元國 南廷熙 申泰斗 安斗瑢 申泰禧 柳秉湜 金洛馨

    興德鄕校儒林 僉座下



    정읍유장(井邑儒狀)

     

    이는 회경(回敬)하는 것입니다.

    충의(忠義)를 다하고 절의를 다하는 것은 나라의 근간(根幹)이 되는 것이라, 절의(節義)를 장려(獎勵)하고 충성(忠誠)에 포상(襃賞)하는 것을 서둘러 힘써야만 합니다. 대개 충성을 포상하지 않으면 충성을 권장할 수 없고, 절의에 대하여 장려하지 않으면 절의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절의가 없고 충성이 없다면 그 나라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표장(表章)하는 것이고 숭상(崇尙)하여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추(千秋)에 가르치며 격려(激勵)하고 백세(百世)에 긍식(矜式, 規範)으로 하는 것이니, 곧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이며 국가(國家)의 통규(通規)인 것입니다.

    삼가 야수(野叟) 채선생(蔡先生)의 정충대절(貞忠大節)을 살피건대, 소상(昭詳)하게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실려 있으며 상세(詳細)하게 귀 향교(鄕校)의 통문(通文)에 갖추어 있으니, 하나하나 거론(擧論)할 것도 없으나, 그래도 대개(大槩)에 의거하여 말로 표시한다면, 선조대왕 때 임진·계사의 변()을 당하여 의기(義氣)가 북받쳐 슬퍼하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그 형제자질(兄弟子姪)과 향리(鄕里)의 동지(同志) 모두 92 ()이 흥성(興城)의 북쪽 남당리(南塘里)에서 동맹(同盟)하고 피를 뿌리고 단()에 올라, 무리에게 의기(義氣)로 격려(激勵)하여, 죽음 보기를 집에 돌아가듯 하셨습니다.

    큰아들 명달(命達), 둘째아들 경달(慶達)과 함께 힘껏 싸웠으나 불리(不利)하여 부안(扶安) 호벌치(胡伐峙) 같은 땅에서 순절(殉節)하시니, 때는 정유년 420일이었습니다.

    옛날부터 원래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사람이 있으면, 혹 일대(一代) 일인(一人)이라도 사람들이 향풍계열(嚮風揭烈)하는 것인데, 하물며 선생의 일가삼인(一家三人)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와 충()으로 된 간담(肝膽)은 천지(天地)를 세우고 일월(日月)과 함께 하니, 천백대(千百代)에 알릴만 하며, 혈기(血氣) 있는 친구들과 떳떳함을 지킬 마음을 가진 자는 모두 반드시 소문을 듣고 선생의 사우(祠宇)에 경의(敬意)를 표()할 것이니, 어찌 뛰어나게 더욱 성대(盛大)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후(前後)의 사실은 제봉(霽峯) 고선생(高先生)보다도 높으니, 변두생례(籩豆牲醴)는 마땅히 부조(不祧, 94) 참조)의 전례(典禮)가 있어야만 하는데, 사기(士氣)가 떨치지 못하여 아직 이제까지 계속 지연(遲延)되어 왔습니다.

    선생의 후손 동한(東熯)이 그 족조(族祖) 경렬(京洌)과 함께 멀리 선조(先祖)를 추모(追慕)하는 정성(精誠)으로 자금(資金)을 모아 사당(祠堂)을 세우고 향사(享祀)를 창설(創設)하니 어찌 다만 성손(姓孫, 97) 참조)의 할 일이겠습니까? 진실로 이는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인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여러분께서는 봄·가을의 석채(釋菜)를 서원(書院)의 예()에 의거하여 잘 봉행(奉行)할 것이며, 정식(定式)을 강품(講品)하고, 또 긍식(矜式)이 될 만한 사람으로 향선생(鄕先生)을 추천(薦擧)하여 함께 배향(配享)함으로써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도록 하신다면 고맙겠습니다.

    경오년(庚午年, 1870) 11월 일

    정읍향교(井邑鄕校)

    직원 신원균(申元均) 안동관(安東觀) 김재술(金載述) 안동열(安東說)

    다사 류후상(柳厚相) 손권식(孫權植) 신태훈(申泰勛) 이원국(李元國)

    남정희(南廷熙) 신태두(申泰斗) 안두용(安斗瑢) 신태희(申泰禧)

    류병식(柳秉湜) 김낙형(金洛馨)

     

    흥덕향교 유림 여러분 좌하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