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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수실기(野叟實記) 행장


    남당회맹단 의병대장 채홍국장군 야수실기 게시 연재

    野 叟 實 記


    行狀


    公姓蔡 諱弘國 字光輔 號野叟 高麗門下侍郞平章事 諡景平 諱松年十世孫 高祖 諱忠敬 官禮曹判書 娶扶安金氏 漢城尹世英之女 始居于扶安 曾祖 諱居亨 副司直 祖 諱准 生員 官軍資監叅奉 考 諱致義 司正 配淸州韓氏 叅奉英器女 生三男 公居第二 生於嘉靖十三年甲午 旣長 移居興德南塘村 公之天性 忠厚慷慨 常以爲人生世間 爲人臣而不能以忠事君 非臣道也 爲人子而不能以孝事親 非子職也 吾旣不得立身 則匡國事君之道 固無所施 家有兩親 當盡子道而己 於是晨昏必定省 甘旨衣服之供 必以至誠 及居喪送終之節 祭奠之儀 一遵禮制 隣里鄕黨 咸以出天之孝稱之 公娶坡平尹氏 叅奉畢女 有三男 俱有膂力 善騎射 公 以忠孝二字 常勉戒三子 自幼受敎訓 三子亦以忠義自勵 一日三子侍坐 公 從容言 曰 乃爺 生長村巷 居然五十年之間 尙未遂爲國效忠之願 汝輩知我此心 毋負乃爺所戒也 公之滿腔忠義 於斯可見矣 豈不偉哉 萬曆壬辰 倭賊擧國入寇 不滿二旬 凶鋒犯陷都城 大駕幸龍灣 於是公與羅州人前府使金公千鎰 光州人前叅奉高公敬命 先倡義旅 公亦赴錦山之役 時高公敗沒 公慨然奮發 收散卒以歸 先出二十餘家僮與其三子及宗族三十餘人 鄕隣同志六十餘人 歃血同盟于興德南塘 公爲義旅將 誓于衆曰 髮毛身體 皆是父母之遺 今我聖上 卽父母也 當父母之危 爲 其子者 豈惜髮毛身體乎 玆在三綱五倫 知此以行 其餘諸公 各隨才任職 於是 軍容整肅 列邑義旅之來附者 日益惟衆 六七隣邑 賴而得全 時 本官羅公惕 多出義穀 補給兵糧 都元帥權公慄 以書慰勉巡遠之責 於是 使餉士都監金善弼 作檄書 寄法聖鎭 令曰 鄙廳兵多糧足云 廣出義穀四百石 一百石送于嶺南郭再佑義兵所 三百石 屬義穀將奇孝曾 同長子命達 漕納于龍灣行在所 宣廟嘉之 除命達訓鍊副正 忽聞賊犯順天 急奮旅追擊 連破于石堡 斬獲無筭 巡察使 以狀聞 宣廟又嘉 之 特除僉中樞府事 次子慶達 亦以功除訓鍊院正 至丁酉再猘 寄書於金都監永年曰 近者奸虜 乘後再猘嶺南 幷進水陸 連陷州郡 國事之蒼黃 倍加前日 驚愕之狀 一體吾心 其在臣子之道 寧安於宵旰之閒哉 望須更發奮義 與前日同志 合謀聚衆 以當一面 終死於矢石之所 盡命酬國 豈非大丈夫之高義乎云 同聲響應者 尤倍於前日 仍伐賊於興德之培風嶺 連破扶安上掠峙 又賊衆大至 公素射自朝至晡 矢殲累百餘 右手指爲决弦所斷 更以左手彎弓 左指亦然 是時盡矢手徒 賊酋以短兵突犯 公以手當敵 大呼掩擊 抱挾賊背 賊酋負劒而 躓 刃及公身 公之子命達慶達 急往救之 已無及矣 二子 憤突擊倭 斬獲無數 勢窮力盡 俱爲凶鋒所害 嗚呼 賊退翌日 公之長孫應蓍 與其叔父英達 收公屍 葬于扶安乾先面朝家洞酉坐原 享年六十四 配貞夫人坡平尹氏 祔左 收副正公屍 葬于同面花田洞後麓庚坐原 配淑夫人水原白氏 附左 牧訓正公屍 葬于敏堂山先塋下午坐原 配淑夫人保安林氏 祔左 長房命達子應蓍 以孝行薦敎官 壽僉中樞 仲房慶達 有三子 長萬蓍 次仁蓍 次遵蓍 季房英達 官奉事 娶長澤高夢得女 有四子 長興蓍 次雄蓍 次中蓍 次有蓍 曰應蓍有四子 長沆宣敎郞 次淹號敏堂處士 次沰贈通政戶議 次澄. 曰萬蓍 有子厚發. 曰仁蓍 有子元尙. 曰有蓍 有三子 長顯後 次吉後 次慎後 其餘蕃衍不能盡記. 嗚呼 公以天賦忠厚之性 窮居慷慨 平生勉戒 只以忠孝二字 而國步板蕩之際 激發忠憤 伏節死 義 輕於鴻毛 其衛社報國惻怛之誠 間不容髮 而况三父子同時並命 卓絶忠孝 堂堂與日月爭光矣. 後世忠臣烈士 寧不興起於惟公之風哉. 公之七代孫膺纘 痛先烈之未褒 又患徵獻隨泯 懇余狀德之文 此不惟世好之誼 曠感節義之卓絶 又嘉繼述之誠 謹次顚末 他日大家鴻匠 立言取裁之資 則庶幾徵之云爾

    崇祿大夫知中樞府事 儒州 柳 發撰

     

     

    행장(行狀)

     

    ()의 성()은 채()이고 휘는 홍국(弘國)이고 자는 광보(光輔)이고 호는 야수(野叟)이니, 고려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시고 시호(諡號)가 경평(景平)이신 휘 송년(松年)10세손(世孫)이시다.

    고조(高祖)의 휘는 충경(忠敬)이시니, 벼슬은 예조판서(禮曹判書)이시며, 부안김씨(扶安金氏) 한성윤(漢城尹) 세영(世英)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비로소 부안(扶安)에서 사셨다. 증조(曾祖)는 휘가 거형(居亨)이시고 부사직(副司直)을 하셨다. 할아버지의 휘는 준()이며 생원(生員)으로 벼슬이 군자감 참봉(軍資監叅奉)이시다.

    아버지는 휘가 치의(致義)이시며 사정(司正)을 지내셨다. 배위(配位)는 청주한씨(淸州韓氏) 참봉(叅奉) 영기(英器)의 따님으로, 세 아들을 낳으셨는데, ()은 그 두 번째이시다. 가정(嘉靖) 13년 갑오(甲午, 1534)에 나셨다. 자라서는 흥덕(興德) 남당촌(南塘村)으로 이거(移居)하셨다.

    공의 천성(天性)은 충후(忠厚강개(慷慨)하여, 늘 말씀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효성(孝誠)으로 어버이를 섬기지 못하면 아들의 직분(職分)이 아니며, 사람의 신하(臣下)가 되어서 충성(忠誠)으로 임금을 섬기지 못하면, 신하의 직분이 아니다. 나는 이미 입신(立身)을 못하였으니, 나라를 바로잡고 임금을 섬기는 도리(道理)는 애당초 베풀 곳이 없으나, 집에 양친(兩親)이 계시니, 마땅히 아들의 도리(道理)를 다할 뿐이다.

    이때에, 저녁과 새벽에 정성(定省)하고 감지(甘旨)와 의복(衣服)의 공궤(供饋)는 반드시 지성(至誠)으로 하고, 거상(居喪) 송종(送終)의 예절(禮節)과 제사(祭祀)와 궤연(几筵)의 의례(儀禮)를 한 결 같이 예제(禮制)에 준거(遵據)하여, 인리(隣里) 향당(鄕黨)에서 모두 하늘이 낸 효자(孝子)라고 칭찬하였다.

    공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참봉(叅奉) ()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이 있는데, 모두 힘이 좋아서 활쏘기를 잘하였다. 공이 충효(忠孝) 두 글자를 가지고 늘 세 아들을 권면(勸勉)하고 경계(警戒)하여, 어려서부터 교훈(敎訓)을 받아 세 아들도 충의(忠義)를 스스로 힘썼다. 그런데 하루는 모시고 앉았는데, 공이 조용히 말씀하기를,

    이 아비는 촌마을에서 생장(生長)하여, 어느덧 50세가 되는 동안에, 아직도 나라를 위하여 충성(忠誠)을 바치고자 하는 원()을 이루지 못하였구나. 너희들은 이러한 내 마음을 알고 경계(警戒)하는 이 아비의 말을 저버리지 말아라.라고 하셨다. 이렇게 공의 온 몸에 가득한 충의(忠義)를 여기서 볼 수 있으니, 어찌 위대(偉大)하지 아니한가?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 1592)에 왜적(倭敵)이 쳐들어 오니, 20일이 못되어 흉봉(凶鋒)은 도성(都城)을 범()하여 함락(陷落)시키고 대가(大駕)는 용만(龍灣)으로 행행(行幸)하였다.

    이때에, 공은 나주인(羅州人) 전 부사(府使) 김천일(金千鎰), 광주인(光州人) 전 참의(參議) [원문에는 참봉(參奉)으로 되어 있으나 참의(參議)로 바로잡음.] 고경명(高敬命)공과 함께 먼저 의병(義兵) 일으키기를 동모(同謀)하고, 공도 금산(錦山)의 싸움에 갔는데, 고공(高公)이 패몰(敗沒)하니, 공은 개연(慨然)히 분발(奮發)하여 흩어진 군졸(軍卒)을 수습(收拾)하여 돌아와, 먼저 가동(家僮) 20여 명을 내놓고 세 아들과 종족(宗族) 30여 인(), 고향의 이웃 동지(同志) 60여 명과 더불어 피를 마시고 흥덕(興德) 남당(南塘)에서 동맹(同盟)을 하였다. 공이 의려장(義旅將)이 되어, 여러 사람에게 맹서(盟誓)하기를,

    발모(髮毛)와 신체(身體)는 모두 이것이 부모가 남겨준 것이다. 지금 우리 임금님은 곧 부모이니, 부모의 위급함을 당하여 그 사람의 아들 된 자가 어찌 발모(髮毛)와 신체(身體)를 아끼겠느냐? 여기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있다. 이것을 알고 행하라.고 하셨다.

    그 나머지 제공(諸公)도 각각 재주에 따라 직책(職責)을 맡았다. 이렇게 되니, 군대(軍隊)의 위엄(威嚴)이 정숙(整肅)하였다. 67 이웃 고을이 덕택으로 온전할 수가 있었다.

    당시 본관(本官) 나척(羅惕) 공이 의곡(義穀)을 많이 내어 병량(兵糧)을 보급(補給)하였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공이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장순(張巡허원(許遠)의 책임(責任)이 있다고 하며 면려(勉勵)하였다.

    이때에, 편향사도감(便饗士都監) 김필선(金弼善)이 격문(檄文)을 만들어 법성진(法聖鎭)으로 부쳐, 명령하기를,

    우리 의병청(義兵廳)은 병사(兵士)가 많고 병량(兵糧)도 충분하니, 의곡(義穀) 400 ()을 내어, 100 ()은 영남(嶺南) 곽재우(郭再佑)의 의병소(義兵所)로 보내고, 300 ()은 의곡장(義穀將) 기효증(奇孝曾)과 같은 의곡장(義穀將)인 큰아들 명달(命達)에게 딸리게 하여 바다로 조운(漕運)하여 용만(龍灣) 행재소(行在所)로 바치게 하라.고 하였다. 선조대왕이 이를 가상(嘉尙)하다 하여, 명달(命達)을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에 제수(除授)하였다.

    이때, 왜적이 순천(順天)을 침범(侵犯)한다는 말을 듣고, 곧 군려(軍旅)를 떨쳐 추격(追擊)하였다. 석보(石堡)에서 왜적을 연달아 격파(擊破)하여, ()하거나 사로잡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당시 순찰사(巡察使)가 장계(狀啓)로 조정(朝廷)에 알려, 선조대왕이 이를 가상(嘉尙)하다 하여 특별히 첨중추(僉中樞)에 제수(除授)하였고, 차자(次子) 경달(慶達)도 공()으로 훈련원정(訓鍊院正)을 제수(除授)하였다.

    정유년에 이르러, 왜적이 다시 미친개처럼 날뛰니, 도감(都監) 김영년(金永年)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씀하기를,

    근자(近者), 간사한 오랑캐가 뒤를 틈타 다시 영남(嶺南)에서 미친개처럼 날뛰며, 수륙(水陸)으로 병진(並進)하여 연달아 주군(州郡)을 함락(陷落)시키니, 나라 일의 허둥대는 것은 전일(前日)의 경악(驚愕)한 모습보다 배()나 더하다. 내 마음과 일체(一體)라면, 그 신자(臣子)의 도리(道理)에 있어서 어찌 조석(朝夕) 사이에 편안할 수가 있겠는가? 바라건대, 다시 의기(義氣)에 발분(發奮)하여 전일(前日)의 동지(同志)들과 함께 군대(軍隊) 모집(募集)하기를 도모하여, 하나의 방면(方面)을 담당하고 끝내 시석(矢石)이 쏟아지는 곳에서 죽어, 목숨이 다하도록 나라에 보답한다면 어찌 대장부의 높은 의기(義氣)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셨다.

    이때에, 소리에 응낙(應諾)한 자가, 전일(前日)보다 배()나 더 많았다.

    곧 흥덕(興德)의 배풍령(排風嶺)에서 왜적을 토벌(討伐)하여 여러 번 승리(勝利)하고,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에서 왜적의 무리가 크게 몰려 왔다. 공은 원래 활을 잘 쏘아,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수백(數百)이 넘는 왜적을 죽였는데, 오른손 손가락이 활시위를 당기기에 끊어졌고, 다시 왼손으로 활을 당겨 왼 손가락도 또 그렇게 되었다. 이때 화살도 다 없어지고 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적장(賊將)이 단병(短兵)으로 돌진(突進)하여 범()하니, 곧 손으로 적()을 상대(相對)하여, 크게 부르짖고 엄격(掩擊)하여 왜적의 등을 껴안으니, 왜적은 검()을 지고 넘어졌는데 칼날이 공의 몸에 미쳤다. ()의 아들 명달(命達경달(慶達)이 급히 가서 이를 구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미치지 못하였다. 두 아들이 분격(憤擊)하여 사방으로 충돌(衝突)하며 왜적을 참()하거나 사로잡은 것이 무수(無數)하였으나, ()가 궁하고 힘이 다하여 모두 흉봉(凶鋒)의 해()를 입었다.

    아아, 정유년 420일은 바로 부군(府君)께서 순의(殉義)하신 날이며, 향년(享年)64세이시다.

    그 다음날 훈정공(訓正公)은 복수(復讎)를 온전하게 못한 것을 슬퍼하여 용기(勇氣) 있게 가서 왜적을 죽이는데 분()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어 해()를 당하니 향년(享年)37세이시다.

    부정공(副正公, 큰아들)은 근왕(勤王)하고 돌아와 역시 군중(軍中)에 있었는데, 아버지와 아우의 원수(怨讐) 갚기를 맹서하고 왜적(倭賊)의 우두머리를 호되게 꾸짖으며 급히 분돌(憤突)하여 수 없이 격살(格殺)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또한 흉봉(凶鋒)에 해를 입으니 향년(享年)41세였다.

    아아, 왜적이 물러간 다음날, 부군(府君)의 장손(長孫) 응시(應蓍)와 그 숙부(叔父) 영달(英達)이 공의 시체(屍體)를 거두어 부안 건선면 조가동 유좌(扶安乾先面朝家洞酉坐)의 언덕에 장사(葬事)하였다. 향년(享年)64세이시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를 왼쪽에 합장하였다.

    부정공(副正公)의 시신(屍身)을 거두어 같은 면() 화전동(花田洞) 뒷기슭 경좌(庚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고 배위 숙부인(淑夫人) 수원백씨(水原白氏)를 왼쪽에 합장하였다.

    훈정공(訓正公)의 시신을 거두어 민당산(敏堂山) 선영(先塋) 아래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사하고 배위 숙부인 보안임씨(保安林氏)를 왼쪽에 합장하였다.

    장방(長房) 명달(命達)의 아들 응시(應蓍)는 효자로 교관(敎官)에 천거되었고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하였다.

    중방(仲房) 경달(慶達)에게 세 아들이 있으니, 맏이는 만시(萬蓍)이고 다음은 인시(仁蓍)이고 다음은 준시(遵蓍)이다.

    계방(季房) 영달(英達)은 벼슬이 봉사(奉仕)인데, 장택(長澤) 고몽득(高夢得)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이 있으니, 맏이는 흥시(興蓍)이고 다음은 웅시(雄蓍)이고 다음은 중시(中蓍)이고 다음은 유시(有蓍)이다.

    응시(應蓍)에게 네 아들이 있으니 맏이 항()은 선교랑(宣敎郞)이고 다음 엄()은 호()가 민당처사(敏堂處士)이고 다음 탁()은 통정대부 호조참의(戶曹參議) 다음은 징()이다. 만시(萬蓍)에게 아들 후발(厚發)이 있고, 인시(仁蓍)에게 아들 원상(元尙)이 있고, 유시(有蓍)에게는 세 아들이 있으니, 맏이가 현후(顯後)이고 다음이 길후(吉後)이고 다음이 신후(慎後)이다. 그 나머지는 번연(蕃衍)하여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아, 공은 하늘에서 타고난 충후(忠厚)한 성품(性品)을 가지고 궁벽(窮僻)한 곳에서 살며 강개(慷慨)하고 평생(平生)을 단지 충효(忠孝) 두 글자를 가지고 면려(勉勵)하고 경계(警戒)하였다. 그리고 나라의 운명(運命)이 판탕(板蕩)할 때에, 충성(忠誠)스러운 분기(憤氣)를 격발(激發)하여 절의(節義)에 엎어져 죽었으니, 홍모(鴻毛)보다도 가벼웠고, 사직(社稷)을 보위(保衛)하고 나라에 보답(報答)하는 슬픈[惻怛] 정성(精誠)은 그 사이에 터럭도 용납(容納)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구나 삼부자(三父子)가 동시(同時)에 함께 죽은 탁절(卓絶)한 충효(忠孝)는 당당하게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투니, 후세(後世)의 충신열사(忠臣烈士)가 어찌 오직 공의 풍모(風貌)에서 흥기(興起)하지 않겠는가?

    공의 7대손 응찬(膺纘) 선렬(先烈)이 포상(襃賞) 받지 못한 것을 슬퍼하고, 또 징빙(徵憑)할 문헌(文獻)이 점점 없어지는 것을 걱정하여, 내게 장덕(狀德)의 글을 청하니, 이는 오직 세호(世好)의 친분으로 절의(節義)가 탁절(卓絶)함에 크게 감동(感動)해서 만이 아니라, 또 계술(繼述)의 정성을 아름답게 생각하여 삼가 전말(顚末)을이어 놓은 것이니, 후일(後日)에 대가(大家홍장(鴻匠)께서 입언(立言)할 때, 취사(取捨)하는 꺼리로 삼기를 바라는 바이다.

    숭록대부 지중추부사(崇祿大夫知中樞府事)

    유주(儒州) 류 발(柳 發)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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