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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수실기(野叟實記) 회맹록서



    남당회맹단 의병대장 채홍국장군 야수실기 게시 연재

    野 叟 實 記






    會盟錄序(1)

    嗚呼 從古 臨亂擧義 不在於肉食綺紈 多現於草茅寒畯之士 豈不以衛社報國 秉彛同得之性 而窮居慷慨 素有所講明此義 故板蕩倉卒之頃 激發其忠憤而然耶 余以義錄編緝 在白巖禪樓 蔡君榮觀 袖示一帖曰 龍蛇之變 吾家傍先祖 同中樞公弘國 及吾先祖縣監公禹齡與曺公益壽·高公德鳳·金公永年·李公益盛·李公綽·金公榮·裵公守義·李公始華·金公廷立等 倡起同志 歃血同盟 凡九十二士 蔡姓三十三人 募兵鳩糧 一戰於興城長嶝 再戰於扶安胡峙 或殲賊樹功 或力盡殉身 而旌褒之典 率多未洎 願借一言 以壽其傳. 余 惟當時起義者何恨 而齊聲列名 盟心誓死於一壇之中 未有如斯之多焉 尤可欽歎 乃今二百年餘 摩挲遺牒 宛若隔晨 事寧不偉哉 義錄之刊行 可徵不朽 其將永有辭於來後矣 聊庸識之 以寓畧感之思云.

    戊午仲秋 前承旨 瑞山柳匡天 謹書

     

     

    회맹록 서문(會盟錄序) (1)

    아아, 옛날부터 난()에 임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키는 것은 잘 먹고 잘 입는 부귀(富貴)한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개는 모옥(茅屋, 띠 집)에 살며 가난하여 농사짓는 선비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어찌 사직(社稷)을 보위(保衛)하고 나라에 보답(報答)하는 것이 똑같이 얻은 병이(秉彛, 떳떳함을 지키는 것.)의 천성(天性) 때문이 아니라, 빈궁(貧窮)하게 살면서도 강개(慷慨)하여 원래 이 의리(義理)를 강명(講明)한 것이 있기 때문에, 판탕(板蕩)하여 허둥댈 때에, 그 충분(忠憤)이 격발(激發)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의록(義錄)의 편집 때문에 백암선루(白巖禪樓)에 있을 때, 채영관(蔡榮觀) 군이 하나의 첩()을 옷소매에서 꺼내 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용사(龍蛇. 임진·계사)의 변(), 우리 집 방선조(傍先祖)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홍국공(弘國公)과 내 선조(先祖) 현감공(縣監公) 우령(禹齡)은 조익수(曺益壽고덕봉(高德鳳김영년(金永年이익성(李益盛이작(李綽김영(金榮배수의(裵守義이시화(李始華김정립(金廷立) 등 제공(諸公)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자고 뜻을 함께하고, 피를 마시고 동맹하니 모두 92 의사(義士)였고, 채성(蔡姓)만도 33()이었습니다. 군병(軍兵)을 모집하고 군량(軍糧)을 모아 한 번 흥성(興城)의 장등(長嶝)에서 싸우고, 두 번 부안(扶安)의 호치(胡峙)에서 싸워, 더러는 왜적을 죽여 공을 세우고, 더러는 힘이 다하여 전사(戰死)하였으나, 정포(旌褒)의 은전(恩典)은 모두 미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원컨대 한 말씀 하시어, 그 전설(傳說)이 오래 가도록 해주시오.

    내가 생각하기에, 당시 의병을 일으킨 자가 어찌 한정이 있을까마는, 같은 소리로 이름을 열기(列記)하고 마음으로 죽기를 맹서한 사람이 하나의 단() 가운데 이렇게 많았던 일은 아직 없었다.

    더욱 흠탄(欽歎)할 것은, 지금 200여 년이나 되었는데, 유첩(遺牒)을 쓰다듬으니 마치 어제의 일과 같다. 일이 어찌 위대(偉大)하지 아니한가? 의록(義錄)을 간행(刊行)하니 영구(永久)히 징빙(徵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은 장차 후세(後世) 사람들에게 영구히 할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첩자(帖子)에 의거하여 이와 같이 쓰며, 감동(感動)한 생각을 붙이는 것이다.

    무오년(戊午年, 1798) 8월 전 승지 서산(瑞山) 류광천(柳匡天)이 삼가 쓰다.



    會盟錄序(2)


    在昔龍蛇之歲 國亂方棘 南州義烈 指不勝屈 有可以記 旂常垂竹帛 而朝家褒典 前後備至 獨遐壤堙海之蹟 亦或有不章於世者矣 歲戊午秋 余因湖南義錄之役 得遍閱百家記剳 其與我先世事 同時而應者 固己夥然 適爲曠世之感 而事若朝暮遇也 我宗氏()漢甲·蔡斯文膺演榮觀·曺斯文景明·袖一小帖 來示之求一言甚勤 盖其先祖同中樞蔡公弘國·縣監蔡公禹齡·白衣高公德鳳·曺公益齡·益壽等九十二人名錄之一古紙也.記其年曰 萬曆壬辰九月二十日 歃血同盟於興城南塘義兵所 又於下署之曰 某也出家僮幾人 凡出家僮者十一家 而蔡弘國出二十人 蔡禹齡率二十五人 曺益齡·高德鳳·直長蔡鳳·蔡蔘·生員蔡瑺·李綽·李益盛·金永年·裵守義·金榮··李始華 各出若干而人有差 其敗牋渝墨 黏在牒上 猶班班可考也 夫自萬曆壬辰 至今二百有七年 而披考其牒 如目擊當日之會 惟其仁干義矛 糾募相應 擧一鄕黨 而義士之奮袂而起者 殆將百數 則誠不爲不多 而蔡氏一門 乃至於三十三人 尤可謂偉然鮮覯者矣 且其數公者 不過職卑責微 其餘皆韋布踈賤 而錦山敗潰之后 復同此盟 則平日義利之辨 已自燎然 故親上死長之義 感奮而激勵 非有所强之 而磨盾記署 合力號聚 其所以丁寧誓戒 自在其中 凜乎有不可犯之色 如櫓風陣雨獵獵起 紙墨間 尙令人目曠而髮竪也. 是知我列聖朝 漸摩禮義之敎 累百年浹洽於東土 故一朝倉卒 雖草野寒畯 而能沫血奮戈 未嘗有全躬保妻子之私 則天理民彝之在人心 隨感而發 終不泯滅者 於此可見矣 當年長嶝原 興德地 之役 多有斬獲勞 又於胡峴 扶安地 之戰 同中樞公及縣監公 與宗弟蔡蔘·蔡瑺 死於賊 曹益齡·李綽·裵守義等 亦同死之 縣監公 錄宣武勳 贈兵參 是盖南塘在彼 不負其盟 而畢竟成就之卓然者也 今其錄中 歃血同盟等數十字 足可徵於百世之下 而爲桑海遺蹟也 嗚呼 九十二人之雲仍 其共祗守之永作靑氈 以寓無忝之戒也哉.

    是年季秋甲子復軒居士長澤高廷 謹書

     

     

     

    회맹록 서문(會盟錄序) (2)

     

    옛날 임진·계사의 해에, 나라의 어지러움이 바야흐로 위급(危急)하였는데, 남쪽 고을의 의사(義士열사(烈士)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기록(記錄)할 만 한 것이 있었다. 기상(旂常, 깃발)은 죽백(竹帛)에 드리우며, 나라의 포전(褒典)은 앞뒤로 지극히 갖추어졌는데, 다만 먼 지방(地方) 바닷가의 자취는 역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무오년(1798) 가을에, 나는 <호남의록(湖南義錄)>의 일 때문에 여러 사람의 기()와 차(, 메모와 같은 것.)를 다 볼 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나의 선세(先世)의 일과 동시(同時)이면서 대응(對應)하는 것이 아주 많았다. 마침 세상에 유례(類例)가 없다는 느낌을 하였으나, 일은 마치 아침저녁에 만난 것처럼 새로웠다.

    우리 종씨(宗氏) 한갑(漢甲), 사문(斯文) 채응연(蔡膺演영관(榮觀), 조경명(曺景明)이 하나의 작은 첩자(帖子)를 옷소매에서 꺼내어 보이면서 한 마디의 말을 구하기에 매우 부지런하였다.

    대개 그 선조(先祖)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채홍국(蔡弘國)·현감(縣監) 채우령(蔡禹齡)·백의(白衣) 고덕봉(高德鳳)·조익령(曺益齡익수(益壽)공 등 92인의 이름을 기록한 한 장의 헌 종이이니, 그 해를 기록하여 만력(萬曆) 임진년 920일이라고 하였다.

    흥성 남당 의병소(興城南塘義兵所)에서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아래에 쓰기를, 누구누구는 가동(家僮) 몇 명을 냈다고 하였는데, 내놓은 가동(家僮)이 모두 열 한 집인데, 채홍국이 20명을 내고, 채우령이 25명을 이끌고, 조익령(曺益齡고덕봉(高德鳳직장(直長) 채봉(蔡鳳채삼(蔡蔘생원 채상(蔡瑺이작(李綽이익성(李益盛김영년(金永年배수의(裵守義김영(金榮김헌()·이시화(李始華)가 각각 몇 사람씩을 내었는데 차등(差等)이 있었다. 그 낡은 종이는, () 위에 엷어진 먹이 달라붙어 있었으나, 그래도 반반(班班)하게 고증(考證)할 수 있었다.

    대개 만력(萬曆) 임진년에서 지금 207년이 되는데, 그 첩()을 펼쳐서 상고(詳考)하니, 마치 당일의 모임을 목격(目擊)한 듯, 오직 그 인()으로 방패삼고, ()로 창을 삼아, 온 향당(鄕黨)이 모두 모집(募集)하는데 서로 응()하였으며, 의사(義士)들이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난 것이 거의 백()으로 헤아렸으니, 참으로 많지 않다고는 못하겠으며, 채씨일문(蔡氏一門) 만해도 33 ()에 이르렀으니 더욱 훌륭한 것이 보기 드문 일이라고 하겠다. , 그 가운데 몇 사람은 직책(職責)이 낮은 사람에 불과(不過)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위포(韋布, 벼슬 없는 선비)와 소천(踈賤)이었으나, 금산(錦山)이 패전(敗戰)하여 찌부러진 뒤에 다시 이 동맹(同盟)을 하였으니, 평일(平日)에 의리(義利)의 분별(分別)이 이미 명백(明白)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위를 친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는 의리(義理)가 감분(感奮)하여 격려(激勵)한 것이니, 강요(强要)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며, 맷돌처럼 돌아가며 서명(署名)을 하고, 합력(合力)하여 불러 모아 그렇게 정녕(丁寧)하게 경계(誓戒)한 것은, 스스로 그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늠름(凜凜)하여 침범(侵犯)할 수 없는 빛이 있으니, 마치 망루(望樓)의 바람과 전진(戰陣)에 내리는 비가 엽렵(獵獵, 비바람 소리의 형용)하게 지묵(紙墨) 사이에서 일어나, 아직도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크게 뜨게 하고 머리를 곤두서게 하는 것이다.

    이래서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 예의(禮義)의 가르침을 점마(漸摩)하여, 여러 백년 우리나라에서 넉넉하게 적시어 왔음을 알겠다.

    그러므로 하루아침에 급한 일이 일어나면, 비록 초야(草野)의 가난한 농부(農夫)라도 능히 피를 뿌리고 창을 휘둘러, 몸을 보전하고 처자식을 보호하려는 사심(私心)을 가진 적이 없었으니, 천리(天理)와 민이(民彝)가 사람의 마음에 있으며 느끼는 바에 따라서 발동(發動)하고 끝내 민멸(泯滅)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당년(當年) 장등원(長嶝原)흥덕땅이다.의 전역(戰役)에서 참()하고 사로잡은 공로(功勞)가 많았으며, 또 호현(胡峴)부안땅이다.의 전투(戰鬪)에서 동중추공(同中樞公)과 현감공(縣監公)은 종제(宗弟) 채삼(蔡蔘채상(蔡瑺)과 함께 왜적(倭賊)에게 죽었고, 조익령(曹益齡이작(李綽배수의(裵守義) 등도 함께 죽었다.

    현감공(縣監公)은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녹훈(錄勳)되고 병조참판(兵曹參判)이 증직(贈職)되었다.

    이것이 대개 남당(南塘)이 저기 있으니, 그 맹서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인데, 필경(畢竟) 성취(成就)한 것이 높이 뛰어난 것이다. 지금 그 기록 가운데,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하였다.등 수십자(數十字)는 충분히 백세(百世)가 지난 뒤에라도 證驗할 수 있을 것이며,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유적(遺蹟)이 될 것이다.

    아아, 92 ()의 먼 후손(後孫)들이여! 함께 삼가 이것을 지켜 영원한 청전(靑氈)으로 만들고 부끄럽지 않도록 하는 경계(警戒)로 삼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 해 9월 갑자일(甲子日)

    복헌거사(復軒居士) 장택(長澤) 고정헌(高廷)이 삼가 쓰다.

     

     

    會盟錄序(3)


    刊斷羣穢 繼日月於高衢 終風雲於大地 男兒氣節 孰賢於此. 昔 南塘蔡公弘國父子兄弟 倡高義於天地 樹奇勳於長嶝 至數百年不泯 赫赫若昨日事 至若高德鳳·曺益齡·金英武·裵守義·李綽諸公 一時響應 或出家僮爲土團 何其韙哉 蔡命達·慶達·英達·禹齡·瑺一門三十三人 相應倂與諸公 而成得胡伐峙 一伐·再伐·三伐之 功垂竹帛 可以不朽於我東方億萬年 而會盟中九十二人 俱是同閈義氣男子 同成長嶝原 興德 大功 又爲胡伐峙 扶安 殉節 而皆不得朝家褒贈之典 草澤之志士 至今悲之. 蔡公之后裔膺文 持南塘錄 願聽一言 嘻 忠孝本無二致 旣無效心之所 則移孝於親 病篤裂指 裂指不足斷指 斷指不足割股 鄕里極稱之 膺文若在會盟時 損軀節義不後於人 余以宗人之義 曠舊感今 遂爲之訖

    乙丑冬十月 宗人 正憲大夫刑曹判書兼知義禁府事·知經筵·五衛都摠府都摠管 蔡弘履



    회맹록 서문(會盟錄序) (3)

     

    더러운 무리를 끊어내어 없애고, 큰 길 네거리에 해와 달을 이어 놓으며, 대지(大地)에 풍운(風雲)을 종식(終熄)시키는 것은 사나이의 기절(氣節)이니, 무엇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랴?

    옛날, 남당(南塘)의 채홍국(蔡弘國) 공 부자형제(父子兄弟)는 천지(天地)에 높이 의기(義旗)를 내걸고, 장등(長嶝)에서 뛰어난 공훈(功勳)을 세워 수백년(數百年)에 이르도록 민멸(泯滅)하지 아니하여, 혁혁(赫赫)하게 빛나는 것이 어제의 일과 같으며, 고덕봉(高德鳳조익령(曺益齡김영무(金英武배수의(裵守義이작(李綽) 등 제공(諸公)에 이르러서는 일시(一時)에 향응(響應)하여 혹은 가동(家僮)을 내어 사단(士團)을 만들었으니,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채명달(蔡命達경달(慶達영달(英達우령(禹齡() 등 일문의 서른 세 사람은, 제공(諸公)과 함께 서로 호응(呼應)하여, 호벌치(胡伐峙)의 일벌(一伐재벌(再伐삼벌(三伐)의 공()을 이루어 죽백(竹帛, 역사책)에 드리웠으니, 우리 동방(東方)에 억만년(億萬年) 내려가도록 썩지 않을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회맹(會盟)92 명은, 모두 이것이 한 마을의 의기남자(義氣男子)이니 함께 장등원(長嶝原, 흥덕(興德))에서 성장(成長)하여, 대공(大功)을 세우고, 또 호벌치(胡伐峙, 부안(扶安))에서 순절(殉節)하였으나, 모두가 나라의 포상(襃賞)과 증직(贈職)의 은전(恩典)을 받지는 못하였으니, 초야(草野)의 뜻있는 선비들이 지금도 이를 슬퍼한다.

    채공(蔡公)의 후예(后裔) 응문(膺文)이 남당록(南塘錄)을 가지고 와서 일언(一言) 듣기를 원하였다.

    아아, 충효(忠孝)는 본래 두 가지 이치(理致)가 아니니, 이미 마음을 바칠 곳이 없으면, 어버이에게 효()를 옮겨, ()이 위독(危篤)하면 손가락을 찢고, 손가락을 찢어서 부족하면 손가락을 끊고, 손가락을 끊어서 부족하면 넓적다리를 쪼개어, 향리(鄕里)에서 이를 극찬(極讚)하였으니, 응문(膺文)이 만약 회맹시(會盟時)에 있었더라면, 몸을 던지는 절의(節義)가 남에게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종인(宗人)의 의리(義理)로 옛 일을 밝히고 이제의 일에 느끼면서 드디어 말을 마치는 것이다.

    을축년(乙丑年, 1805) 10

    종인(宗人) 정헌대부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지경연·오위도총부도총관(正憲大夫 刑曹判書 兼 知義禁府事·知經筵·五衛都摠府都摠管) 채홍리(蔡弘履)가 쓰다.


     

    會盟錄序(4)


    易曰 同聲相應 同氣相求 義節相符 聲氣相通者 理固然矣. 在昔龍蛇之變 國厄之不幸而極矣 忠憤義瞻之士 將鉞秉矛 起於草茅者 比比有之 而興城南塘之會 齊聲列名 同壇血盟者 以至九十二員之多 何其壯也 若非朝家漸磨之仁 士氣激勵之義 而若是夥然也 收聚義旅·義穀及兵戈弓矢 一會·再會合戰累次 而或多殲賊 或多殉身 六七隣邑 賴而得全 而旌褒之典 率多未洎. 悲夫 地處雖微 而忠義凜然 則何讓於張巡· 許遠乎 余以後生 居在近邑 畧聞其槩 而未得其詳 慨然欽歎而已 今於二百年餘之後 偶得倡義會盟錄一卷於其子孫家 某某之聚會 兵糧與其通信於各處 義兵所日記遺蹟也. 披閱再三 想像其軍容之肅 號令之嚴 有若躬接而目擊者然 激動感服 尤當如何哉. 其後九年 又得金㤼巖後孫家會盟錄 果與此日記若合符 契無一字相違 奇哉異哉 嗚呼 忠瞻義肝 永世不朽 若是昭昭 無乃天慳其忠 欲垂現於來後耶 聞其義家雲仍 欲壽其傳剞劂 將告功 余亦有秉彛願忠之心 知其賢而不欲泯嘿 忘拙而若序焉.

    己巳季春 前獻納 昌寧曺喜有 謹書



    회맹록 서문(會盟錄序) (4)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같은 소리는 서로 호응(呼應)하고 같은 기()는 서로 구()한다.(同聲相應 同氣相求)고 하였으니, 의절(義節)이 서로 부합(符合)하고, 성기(聲氣)가 서로 통하는 것은 이치가 원래 그런 것이다.

    옛날 임진·계사의 변()은 나라 액운(厄運)의 불행(不幸)이 극도(極度)에 달한 것이었다. 충성심(忠誠心)으로 분개(憤慨)하고 의()로운 담()을 가진 선비가 도끼를 잡고 창을 잡아, 초가(草家)와 모옥(茅屋)에서 일어난 자()가 많이 있었는데, 흥성(興城) 남당(南塘)의 모임은 똑같은 소리로 이름을 나열(羅列)하여 같은 단()에서 혈맹(血盟)한 사람이 92 명이나 많이 모였으니, 그 얼마나 장()한 일인가?

    만약 나라에서 점마(漸磨)하는 인()과 사기(士氣)를 격려(激勵)하는 의()가 아니었더라면, 이와 같이 많았겠는가? 의려(義旅의곡(義穀)과 병과(兵戈궁시(弓矢)를 거두어 모았고, 한 번 모이고 두 번 모여 여러 번 회전(會戰)하였으며, 더러는 왜적을 많이 죽이기도 하고, 더러는 전사(戰死)하기도 하였다. 67 이웃 고을이 덕택으로 온전할 수가 있었으나, 정포(旌褒)의 은전(恩典)은 다 미급(未及)한 점이 많았으니, 슬프도다.

    지체가 비록 미약(微弱)하나, 충의(忠義)가 늠연(凜然)하니 어찌 장순(張巡허원(許遠)과 견주어 손색(遜色)이 있을 것인가?

    나는 후생(後生)으로 가까운 읍()에 살아, 대략 그 내용을 듣고 있었으나, 그 자세한 것을 몰라서 슬퍼하며 탄식(歎息)할 뿐이었는데, 지금 200년도 넘은 뒤에, 우연(偶然)하게 창의회맹록(倡義會盟錄) 한 부()를 그 자손 집에서 얻으니, 누구누구가 회()를 모으고, 병량(兵糧)과 그 통신(通信)을 각처(各處)에 보낸 것 등, 의병소일기(義兵所日記)의 유적(遺蹟)이었다. 재삼(再三) 펼쳐서 보며, 그 군용(軍容)의 숙연(肅然)함과 호령(號令)의 엄연(奄然)함을 상상(想像)하니, 마치 자신이 직접(直接) 목격(目擊)한 것과 같았다. 격동(激動)하고 감복(感服)함이 더구나 어떠하였겠는가?

    그 뒤 9년이 지나서, 또 김겁암(金㤼巖)의 후손 집에서 회맹록(會盟錄)을 얻으니, 과연 이 일기(日記)와 딱 들어맞는 것이 한 자()도 틀림이 없었다. 기이(奇異)한 일이 아닌가?

    아아, 충의(忠義)의 간담(肝膽)이 영세(永世)토록 썩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이 밝고 밝으니, 틀림없이 하늘이 그 충성(忠誠)을 아까워하여 현세(現世)의 후래자(後來者)에게 드리워주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의가(義家)의 먼 후손들이 그 전기(傳記)의 간행(刊行)을 축하하고자 완공(完工)을 고()하려 하니, 나도 떳떳함을 지니고 충성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으니, 그 현명(賢明)함을 알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졸렬(拙劣)함을 잊고 이와 같이 서문을 쓰는 것이다.

    기사년(己巳年, 1809) 3

    전 헌납 창녕(昌寧) 조희유(曺喜有)가 삼가 쓰다.


     

    會盟錄序(5)


    余 率性于愚 無喫緊于世 惟喜談古今人物·文章·行義 好觀史氏所記孝子·忠臣·烈士等篇 每到其卓異特絶處 未嘗不擊節歎賞 而若稽曆代 亦不能多得 惟張巡·許遠·顔杲卿·文天祥·陸秀夫之徒 最其忠尤者 當國家板蕩之時 扶綱常於萬死之中 其精忠義烈 可謂冠百代無其右者也. 而或以將 或以相 皆擔負當世之責者耳 能奮發於草野韋布之中 救君父於湯火 而生死以之 自生民以來鮮有聞也. 今此義錄之修 余以固陋 猥參其任 一道文券 擎手披覽 孤城烈日 幾處睢陽 而得於布衣人百其人 摩挲興嘆 不能自已 看到一處 尤有異焉 興城蔡氏家是已 當壬丁創攘之時 白衣奮袂 隻手起義 父子兄弟曁宗族合三十三人 同志親僚 曺益齡·高德鳳·李綽·裵守義·曺益壽·金英武等六十有餘 築壇聚衆 歃血同盟 或樹奇勳 或致大節 爲國輪屛 以基中興之業 南徼日星 至今增光 海嶠橫霄 想見其人. 昔唐帝 有二十四郡 曾無一人義之嘆 而今何興城南塘 一盟節士義人 如是其多也 信知我國家列聖朝 培養有異 而忠義輩出 興城土俗 亦可想矣 噫 余小子 以璇派一物 自有與國家同休戚之誼 安危隨處 不敢有身 得人特節 感愛如私 况我先祖 且當此難 痛哭垂涕 救護宗榜 諸義同志 惟多愈喜 追憶古事 怳若隔晨 班班遺蹟 幸出其家 紙本雖舊 字畫維新 三復三歎 不覺潛然 奉以合部 異姓同譜 豈曰偶爾 時亦有待 勗爾雲仍 無替祖烈 雖未展褒 無傷其忠 集感成文 喚起泉臺

    戊午仲冬上澣 全州后人 聾隱居士李台煥 謹書



    회맹록 서문(會盟錄序) (5)


     

    나는 천성(天性)이 어리석어 세상에 긴요(緊要)한 사람이 못되고, 오직 고금(古今)의 인물(人物문장(文章행의(行義)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역사가(歷史家)가 기록한 효자(孝子충신(忠臣열사(烈士) 등의 책 보기를 좋아하여, 늘 그 탁이(卓異, 뛰어나게 남다른 것.특절(特絶)한 대목을 만나게 되면, 무릎을 치며 감탄(感歎)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역대(曆代)를 헤아려 볼 것 같으면, 역시 많이 얻어 볼 수 없다. 오직 장순(張巡허원(許遠)·안고경(顔杲卿)·문천상(文天祥)·육수부(陸秀夫)와 같은 무리가 그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자()이다. 나라가 판탕(板蕩)하는 때를 당하여, 강상(綱常)을 만사(萬死) 가운데서 붙들어 세웠으니, 그 정충의열(精忠義烈)은 그야말로 백대(百代)에 으뜸이요, 그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혹은 장군(將軍)으로 혹은 재상(宰相)으로, 모두 당세(當世)의 책임을 담당(擔當)한 자()일뿐이다. 능히 초야(草野위포(韋布) 가운데서 분발(奮發)하여 끓는 물, 타는 불 속에서 군부(君父)를 구()하고 이것으로 하여 살았다거나 죽었다는 이야기는 백성이 생긴 이래(以來) 들어본 일이 거의 없다.

    지금 이 의록(義錄)을 편수(編修)함에, 나는 고루(固陋)한 사람이지만 외람되게 그 소임(所任)에 참여하여 온 도내(道內)의 문권(文券, 文書)을 손에 받쳐 들고 펴 보았다.

    외로운 성()에 날씨는 뜨거운데, 휴양(睢陽)은 어느 곳에 있는가?(孤城烈日 幾處睢陽)라고 하였는데, 포의인(布衣人) 100 명이 바로 그 사람임을 알고는 쓰다듬으며 감탄(感歎)하기를 스스로 마지않았다. 보다가 한 곳에 이르러서는 더욱 특이(特異)함이 있었으니, 흥성(興城) 채씨(蔡氏) 집의 일이 바로 그것이다.

    임진년·정유년의 몹시 혼란하고 어수선한 때에, 백의(白衣, 無官)로 옷소매를 떨쳐 맨손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부자형제(父子兄弟)와 종족 33 (), 동지친료(同志親僚)인 조익령(曺益齡고덕봉(高德鳳이작(李綽배수의(裵守義조익수(曺益壽김영무(金英武) 60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단()을 쌓아 여러 사람이 모여,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하여 혹은 기특(奇特)한 공훈(功勳)을 세우고, 혹은 큰 절의(節義)에 이르렀으며 나라를 위하여 병풍을 쳤으니, 중흥(中興)의 대업(大業)의 바탕이 되고, ()으로 순행(巡行)하는 해와 별이 지금도 빛을 더하니, 해교(海嶠)에 비낀 하늘에서 아마도 그 사람들을 볼 것이다.

    옛 당() 나라 황제(皇帝)24 ()이 있는데 어찌 한 사람의 의인(義人)이 없느냐?고 탄식(歎息)하였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흥성(興城) 남당(南塘)에서 한 번에 동맹한 절사(節士의인(義人)이 이처럼 많은 것인가? 진실로 우리나라 열성조(列聖朝)에서 배양(培養)함이 특이(特異)하였다는 것을 알겠으며, 충의(忠義)를 배출(輩出)한 흥성(興城)의 토속(土俗)을 또한 알만 하다.

    아아 나 소자(小子), 왕가(王家)의 일원(一員)으로, 자연 국가(國家)와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야할 의의(誼義)가 있어, 안위(安危)가 따르는 곳에 감히 내 일신(一身)을 생각할 수 없으며, 사람의 특이(特異)한 절의(節義)를 알게 되면 감격(感激)하고 사랑함이 내 자신의 일과 같이 생각한다. 하물며 우리 선조(先祖)가 또한 이 난()을 당하여 통곡(痛哭)하고 눈물을 흘렸고, 종방(宗榜)을 구호(救護)한 의리(義理)에 있어서 동지(同志)이니 생각하면 더욱 더 기쁘다. 옛일을 추억(追憶)함에, 황홀(恍惚)함이 마치 어제의 일과 같다.

     

    반반(班班)한 유적(遺蹟)이 다행히 그 집에서 나오니

    지본(紙本)은 오래 됐어도 자획(字畫)은 새롭도다.

    세 번 다시 보고 세 번 탄식하며, 저절로 눈물 흘리고

    받들어 합부(合部)하니 이성(異姓)이 같은 보첩(譜牒)에 들도다.

    어찌 우연이라고 하랴, 때를 또한 기다림이 있었으니,

    힘쓰시오 후손들이여, 조상의 열열(烈烈)함 변치 않도록.

    비록 포상(襃賞)을 펼친 것이 없더라도 그 충성(忠誠) 손상(損傷)되지 않으니

    감회(感懷)를 모아 글을 지어 천대(泉臺)를 환기(喚起)하도다.

     

    무오년(戊午年, 1858) 11월 상순(上旬)

    전주후인(全州后人) 농은거사(聾隱居士) 이태환(李台煥) 근서



    會盟錄序(6)


    大較 物不得其平則鳴 物猶然而人爲甚也. 粤在龍蛇 拚死衛誠者 難一二計 而鳴國家貤贈之盛者 亦非獨二 獨於南塘村義士蔡氏弘國之父子兄弟叔姪 晦蹟不鳴 何哉 可謂不平而鳴者也 噫 稱亂之大事 蹈刃人之標節 方其國步之板蕩 一門歃血 乃至三十餘人 而至於高德鳳·金英武·李綽·曺益齡·裵守義近百同志 氣求聲應 相與張空擧·冒白刃 不知死所 炳卓節於長嶝·胡峴之役. 偉哉 夫也宜乎曠感于百世 表揚於一門 而蔑蔑無聞 終然微泯於一隅南塘 嗟乎其一門之裔 與近百義士之後孫 庶不得其平而鳴矣. 吾亦慕義者 覽其錄·聞其蹟 而不可無言.

    丁卯季夏 前校理完山李東煥 謹書

     

     

     

    회맹록 서문(會盟錄序) (6)

     

    대략(大略), 동물(動物)은 그것이 평안(平安)하지 못하면 운다. 동물(動物)이 오히려 그러한데, 사람은 더 심하다.

    임진·계사년에 죽음을 돌아보지 않고 정성(精誠)을 지킨 자가 하나 둘로 헤아리기 어려운데, 국가(國家)에 하소연하여 증직(贈職)을 성대(盛大)하게 더한 자도 또한 하나 둘이 아니다.

    다만, 남당촌(南塘村)의 의사(義士) 채홍국씨(蔡弘國氏) 부자(父子형제(兄弟숙질(叔姪)만은 공적(功績)을 감추고 울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불평(不平)하면서도 울지 않은 것이라고 하겠다.

    아아, “()”큰일이라고 말하니, 칼날을 밟는 것은 사람이 표방(標榜)할 절의(節義)이다. 바야흐로 그렇게 나라의 형세(形勢)가 판탕(板蕩)할 때에, 일문(一門)이 피를 마신 것이 곧 30여 인()에 이르고, 고덕봉(高德鳳김영무(金英武이작(李綽조익령(曺益齡배수의(裵守義) 100 명에 가까운 동지(同志)에 이르러서는, 의기(義氣)를 찾고 의성(義聲)에 응하여 서로 함께 맨주먹을 펼치고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며, 죽을 곳을 몰랐으니, 높은 절의(節義)가 장등(長嶝호현(胡峴)의 전역(戰役)에서 빛났도다.

    위대(偉大)하도다. 그것은 마땅히 백세(百世)를 내려가며 밝게 감동(感動)하여 일문(一門)을 표양(表揚)해야 할 것인데, 멸멸(蔑蔑)하게 알려진 것이 없고, 마침내 한 구석 남당(南塘)에 미미(微微)하게 파묻혀 있다.

    슬프도다. 그 일문(一門)의 후예(後裔)들이 백 명에 가까운 의사(義士)의 후손(後孫)들과 함께 모두 그 평안(平安)함을 얻지 못하여 우는 것이니, 나 역시 의기(義氣)를 사모(思慕)하는 사람으로서 그 기록을 보고 그 유적(遺蹟)을 듣고서는 말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정묘년(丁卯年, 1867) 6

    전 교리 완산(完山) 이동환(李東煥)이 삼가 쓰다.

     

     

    會盟錄序(7)


    蔡公弘國 平康人 世居湖南地興德縣 立心不苟 持身有度 平居 常激仰有凜凜不可奪之操 鄕里稱之以有道者 誠明之工 發於辭表 剛毅之操 動於形色 粤在龍蛇之變 國步播越 生靈塗炭 八路喁喁 勢同霜風之刃 豹豕匝地 腥穢滿天 于斯時也 公奮不他顧 以一身任天地之大義 以尺劒憑薙獮之神功 慷慨誓衆招募於興德之南塘 一時響應者 或出家僮 或助軍糧 奮忠齊會者九十二人 蔡氏一門之三十三人焉 合將忠烈 勢如風雨 一伐於扶安地胡峙 再伐三伐 錦山之捷 卓乎有可觀 而鐵槊縱橫 霜籜閃鑠 及乎長嶝之坡 力盡力竭 逐突而衝擊者 不知其幾千萬人 公於是也 奮張睢陽之大節 持文正氣之死心 一呼奮起者九十其人 終然並殉 從古節義之士何限 而若言龍蛇變 湖南之趙文烈·金倡義·金助坊諸公 立殣而成義 光動鰈蝶域之山川 名重槿花之日月 而聖朝之褒忠大矣 士類之欽節久矣 一何蔡氏無聞焉 噫 公之一人扶義 而樹忠 亦云偉哉 而况一門之殉義者三十三人 泯泯蔑蔑 此豈非朝家之大欠典耶. 噫嘻 扶常而褒義 人道之高節 迄今寂然 似是南陬邈矣 當日採訪之臣 未知緣何闕焉 是以 咨嗟而興感 三復摩挲 終莫知其何故也. 公之七世孫膺文 持公遺事 請言於愚 雖欲述其偉蹟 而非但文辭荒拙 斯非太史氏 又何以明言也 然 又有所感 歎者 愚聞湖南之人蔡氏之門 不啻忠節而已 其後承也 割股之孝 名於世者 亦可尙己 嗟呼 公之殉節 猶可風動一世 况有祖而有孫 以孝聞于世 卓矣斯家也 大哉斯家也 由是 所申言之 將以竢立言之士焉.

    戊辰季冬 通訓大夫前行潭陽府使 李廷仁 謹書

     

     

    회맹록 서문(會盟錄序) (7)

     

    채홍국(蔡弘國) 공은 평강인(平康人)이니 대대로 호남 땅 흥덕현(興德縣)에 살았다. 입심(立心)에 구차(苟且)함이 없고 지신(持身)에 법도(法度)가 있었으며, 평소(平素)에 늘 격앙(激仰)하고 늠름(凜凜)함 빼앗을 수 없는 지조(志操)가 있어, 향리(鄕里)에서는 유도자(有道者)라고 불렀다. 성의(誠意) 명덕(明德)의 공()은 사표(辭表, 말과 표정)에 나타났고, 강직(剛直) 의연(毅然)한 절조(節操)는 얼굴 기색(氣色)에 움직였다.

    임진·계사년의 변란(變亂)이 일어나자 임금님의 걸음이 파월(播越)하고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지고 팔로(八路, 八道)가 우우(喁喁)하고, 사세(事勢)는 서릿바람 이는 칼날과 같고 표범과 돼지가 땅에 널렸고, 비린내와 오물(汚物)이 하늘에 가득하였다.

    이러한 때에, ()은 분연(奮然)하게 딴 것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일신(一身)을 천지(天地)의 대의(大義)에 맡기고 척검(尺劒)으로 후려쳐 베어 죽이는 신공(神功)을 세웠다.

    강개(慷慨)하여, 여러 사람에게 맹서하고, 흥덕(興德)의 남당(南塘)에 불러 모으니, 한때 향응(響應)한 사람들이 혹은 가동(家僮)을 내고 혹은 군량(軍糧)을 도와, 충의(忠義)에 분기(奮起)하여 모두 모인 자가 92 ()이며, 채씨(蔡氏) 한 문중(門中)33 ()이었다.

    모두가 충의(忠義) 열사(烈士)이니, 기세(氣勢)는 풍우(風雨)와 같아, 한 번 부안(扶安) 땅 호치(胡峙)에서 토벌(討伐)하고, 재벌(再伐삼벌(三伐)하여 금산(錦山)의 승리(勝利)는 뛰어나 볼만 한 것이 있었으며, 철삭(鐵槊, 쇠로 만든 )이 종횡(縱橫)하고 상탁(霜籜)이 섬삭(閃鑠)하였는데, 장등(長嶝)의 고개에 이르러 힘이 다하여, 축돌(逐突)하고 충격(衝擊)한 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인지 모른다.

    ()은 이때에, 장휴양(張睢陽, 張巡)의 대절(大節)을 떨치고, 문정기(文正氣, 文天祥)의 사심(死心)을 지녔으니, 한 번 부르짖어 분기(奮起)한 자, 90 ()이 마침내 나란히 순절(殉節)하였다.

    옛날부터 절의(節義)의 선비가 어찌 한정(限定)이 있을까마는, 임진·계사년의 변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호남(湖南)의 조문렬(趙文烈, 趙憲김창의(金倡義, 金千鎰김조방(金助坊) 제공(諸公)이 죽어서 절의(節義)를 이루었다. 빛은 접역(鰈域, 우리나라의 異稱)의 산천(山川)을 진동시키고 이름은 근화(槿花, 무궁화)의 일월(日月)에 무거웠으니, 성조(聖朝)의 포충(褒忠)이 컸으며, 사류(士類)들이 절의(節義)를 흠모(欽慕)함이 오래였다. 그런데 도대체 왜 채씨(蔡氏)는 알려지지 않았는가?

    아아, () 한 사람이 의()를 붙들어 세우고, 충절(忠節)을 세운 것만도 위대(偉大)하다고 하겠는데 하물며 일문(一門)의 순의자(殉義者) 33인이 민민멸멸(泯泯蔑蔑)하니, 이 어찌 나라의 큰 흠전(欠典)이 아니겠는가?

    아아, 떳떳함을 부식(扶植)하여 의()를 포상(襃賞)함은 인도(人道)의 고절(高節)인데 이제까지 적막(寂寞)하니 이는 아마도 남쪽 구석이 멀기 때문인가? 당일(當日) 채방(採訪)하는 신하(臣下)가 어째서 빼 먹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 때문에 한숨 쉬며 감회(感懷)가 일어나니, 세 번 다시 쓰다듬으나, 끝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公之) 7세손(世孫) 응문(膺文)이 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내게 말을 청하니, 비록 그 위대한 실적(實跡)을 기술(記述)하려고 하나, 다만 문사(文辭)가 거칠고 서툴 뿐만 아니라, 이는 역사가(歷史家)가 아니니 어떻게 명언(明言)을 하겠는가?

    그러나 또 감탄(感歎)한 것이 있으니, 내가 호남(湖南)사람에게 듣건대, 채씨(蔡氏) 가문(家門)에는 충절(忠節)뿐만이 아니라, 그 뒤에, 허벅지살을 가른 효도(孝道)로 이름난 자가 계승(繼承)하였다니, 또한 가상(嘉尙)할 뿐이다.

    아아, 공의 순절(殉節)은 아직도 바람이 일세(一世)를 진동시키는데, 더구나 이 할아버지가 있어서 이 손자가 있으니, 효도(孝道)로도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탁월(卓越)하도다 이 가문(家門)이어! 대단하도다 이 가문이여! 이때문에 되풀이하여 말하며 입언(立言)하는 선비를 기다리고자 하는 것이다.

    무진년(戊辰年, 1808) 12

    통훈대부 전행 담양부사 이정인(李廷仁)이 삼가 쓰다.

     

     

    會盟錄序(8)


    在昔龍蛇 島夷猖獗 充攘八路 宗社安危 凜如一髮. 當是時 南之士 倡義振旅 殞身殉國者 前後相屬 尙氣崇節之風 低仰千古 若夫興德蔡公弘國 身任大義 與同閈高德鳳·金英武·曺益齡·裵守義·李綽諸公 一時歃血 而蔡氏一門之與盟者 多至三十餘人 張拳冒刃 初樹勳於胡峙 終立殣於長嶝 卓絶之蹟 可垂竹帛 而況又父子兄弟同時並命 凜凜義烈 可與高霽峯敬命 匹休而幷美 然而 戡亂褒節之日 彼顯而此晦者 獨何也 盖其南鄕章甫 未遑於表揚之擧耶 抑或文獻無徵 後裔零替而然耶 公之七世孫膺文 常以痛先烈之未彰 而孝又根天 於其親病之篤也 裂指斷指 重以割股 以延一旬之命 鄕里咸稱 其所謂有是祖而有是孫矣 余旣以慕其義 而感其孝 亦以慨南塘壯蹟之獨泯 而書之.

    戊辰季冬 輔國崇祿大夫判敦寧府事 行戶曹判書·原任 奎章閣提學·兩館大提學 延安李晩秀 謹書

     

     

    회맹록 서문(會盟錄序) (8)

     

    옛날 임진·계사의 해에, 섬 오랑캐가 미쳐 날뛰니, 팔도(八道)에 꽉 차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안위(安危)가 머리털 하나에 걸린 듯 위태로웠는데, 이런 때를 당하여, 남쪽 땅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떨치고 몸을 버리고 순국(殉國)한 자가 앞뒤로 이어졌었다.

    기절(氣節)이 높은 풍도(風度)는 천고(千古)를 훑어 볼 때, 그 흥덕(興德)의 채홍국(蔡弘國) 공과 같은 이는 스스로 자신을 대의(大義)에 임()하여 한마을의 고덕봉(高德鳳김영무(金英武조익령(曺益齡배수의(裵守義이작(李綽) 제공과 함께 일시(一時)에 피를 마셨는데, 채씨(蔡氏) 한 가문(家門)에서 동맹(同盟)에 참여한 자가 30여 명이나 되게 많았다.

    주먹을 벌리고 칼날은 무릅써 처음에는 장등(長嶝)에서 공훈(功勳)을 세우고 나중에는 호치(胡峙)에서 전사(戰死)하였으니, 탁절(卓絶)한 공적(功蹟)은 죽백(竹帛)에 드리울 만하다. 그리고 더구나 부자(父子) 형제(兄弟)가 동시에 나란히 죽은 것은, 의열(義烈)이 늠름(凜凜)하여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과 아름다움이 나란히 짝될 만하다. [이 대목의 글에서 원문에서는 호치(胡峙)와 장등(長嶝)의 선후(先後)가 바뀌었으나 사실대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김희동]

    그러나 난()이 그치고 절의(節義)에 대하여 포상(襃賞)하는 날에, 저쪽은 뚜렷이 나타나고 이쪽은 어둠에 가려진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그 남쪽 고을 선비들이 표양(表揚)하는 일에 겨를이 없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혹 문헌(文獻)으로 징험(徵驗)할 것이 없고 후예(後裔)가 영락(零落)하게 되어서 그런 것인가?

    공의 7세손(世孫) 응문(膺文)이 늘 선열(先烈)이 표창(表彰) 되지 못한 것을 슬퍼해왔는데, ()가 또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라, 그 어버이의 병환이 위독하였을 때에, 손가락을 찢고, 끊고, 또 다시 넓적다리를 쪼개어 일순(一旬, 10)의 목숨을 연장(延長)하여 향리(鄕里)에서 모두 칭찬하였으니, 그것은 소위(所謂)이 조상(祖上)이 있어서 이 손자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대개 그 의()를 사모하고 그 효()에 감동(感動)하며, 또 남당(南塘)의 장()한 공적(功績)이 홀로 미미(微微)하게 되는 것을 슬퍼하여 이것을 쓰는 것이다.

    무진년(戊辰年, 1808) 12월 보국숭록대부 판돈녕부사 행호조 판서·원임규장각제학·양관대제학 연안(延安) 이만수(李晩秀) 근서



    會盟錄序(9)


    易曰 安而不忘危 存而不忘亡 治而不忘亂 聖人之爲天下後世慮 可謂至矣 就以 我東言之 前焉而用李文成養兵十萬之策 則秀吉請好之計 不敢售矣. 後焉而假趙文烈尺寸之權 則宗社生民 厄又不如是其慘且酷也. 錄中諸賢之事功梗槩 固不敢孰爲優劣 而其至誠惻怛之心 効力於安危存亡之際者 則於二先生尤有光焉. 豈但以一時偶爾言哉 高君石鎭 慷慨好古士也 謂方有重刊之役 屬余以一言弁之. 噫 古之人 愛君如父 憂國如家 先事之慮 臨難之忠 彼其正大 磊落無纖毫間 然 今之人 視君父如路人 待仇敵如同室 自安於伏屍百萬 流血千里之禍者 其視九十二義士之爲能不顔厚而顙泚乎 然則是錄之行 所以激風節·厲廉隅者 爲不貲矣. 吁 其偉哉. 任錄中 盟主將白衣高公德鳳 於君爲九世顯祖云.

    上之四十年歲次癸卯秋九月 月城崔益鉉書

     

     

     

    회맹록 서문(會盟錄序) (9)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살아 있을 때에 망()할 것을 잊지 않고, 다스려질 때에 어지러울 것을 잊지 않으면, 성인(聖人)의 천하(天下)를 위하여 후세(後世)를 염려(念慮)함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다.(安而不忘危 存而不忘亡 治而不忘亂 聖人之爲天下後世慮 可謂至矣.)고 하였다.

    나아가, 우리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앞서에서는 이문성(李文成, 栗谷)의 양병십만(養兵十萬)의 계책(計策)을 사용하였으면 수길(秀吉)의 청호지계(請好之計)가 감히 나오지 못하였을 것이고, 뒤에서는 조문렬(趙文烈, 重峯)에게 작은 권한(權限)을 빌려주었더라면 종묘·사직과 백성들이 겪는 액화(厄禍)가 이처럼 참혹(慘酷)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회맹록(會盟錄) 가운데 제현(諸賢)의 일과 공()은 대체적으로 감히 누가 더 낫다, 못하다고 할 수 없으나, 그 지성(至誠) 측달(惻怛)한 마음과 안위(安危)와 존망(存亡)이 달렸을 때의 힘쓴 것은, 두 선생이 더욱 빛난다. 어찌 다만 일시(一時)의 우연(偶然)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고석진(高石鎭) 군은 강개(慷慨)하고 호고(好古)하는 선비이니, 바야흐로 중간(重刊)하는 역사(役事)가 있다고 하여, 내게 한 마디의 서문(序文)을 부탁하였다.

    아아, 옛날 사람들은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고, 나라 근심하기를 자기 집 일처럼 하였다. 섬김을 앞세우는 생각, 어려움이 닥쳤을 때의 충성(忠誠)이 저들은 그렇게 정대(正大)하였고, 뇌락(磊落)함이 터럭만큼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군부(君父) 보기를 길가는 사람처럼 보고, 구적(仇敵) 대접하기를 동실(同室)과 같이 하여, 엎어진 시체(屍體)가 백만(百萬)이요 흘린 피가 천리(千里)나 되는 화()를 당하고도 스스로 아무렇지 않게 편안한데, 그것을 92 의사(義士)와 비교할 때, 능히 낯가죽이 두꺼워 이마에 땀이 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 회맹록(會盟錄)을 간행(刊行)하는 것은, 풍기(風氣)와 절의(節義)를 격앙(激昻)하고 염치(廉恥)있는 사람을 격려(激勵)하기 위한 것이니, 값으로 따질 수 없다고 하겠다.

    아아, 그 얼마나 위대(偉大)한가? 임록(任錄) 가운데 맹주장(盟主將) 백의(白衣) 고덕봉(高德鳳) 공은 군()에게 9() 현조(顯祖)가 된다고 한다.

    고종 40년 계묘년(癸卯年, 1903) 가을 9월에,

    월성(月城) 최익현(崔益鉉)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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