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메뉴
  • 역사자료실
  • 갤러리
  •   야수실기(野叟實記) 사우청건문


    남당회맹단 의병대장 채홍국장군 야수실기를 차례대로 게시합니다.

    野 叟 實 記


    祠宇請建文(1)


    境內多士白令鎭·李遇賢·鄭海冕等 謹上書于城主閤下孝理之下爲去乎 伏以 忠以死國 臣子之大節 禮以設享 士林之正論也 生等鄕 蔡公諱弘國 號野叟 贈資憲大夫兵曺判書 卽禮曹判書諱忠敬之玄孫也 世襲德懿 天資雄偉 當龍蛇之變 率其三子及宗族三十三人 鄕隣同志六十餘義士 歃血同盟 推蔡公爲義旅將 誓死國難 屢獲戰捷 時權元帥慄 以書慰勉 長子命達 義穀三百石 漕納于赴扈 已還 巡察使以狀聞 宣廟嘉之 貤爵增秩 而丁酉再猘 更督前日同盟義士 喩以大丈夫之高義 仍奮鬪於興城排風·扶安胡峙 斬馘甚多 竟爲殉節 後人名其峙曰胡伐峙 事載湖南節義錄 千載之下 孰不欽仰其忠節乎 公之不參於建祠設宇 豈非多士與后孫之抑鬱哉 玆敢仰由 特爲題敎 俾設俎豆之禮 千萬伏祝.

    사우 건립을 청하는 글(祠宇請建文) (1)

    경내(境內)의 많은 선비 백령진(白令鎭이우현(李遇賢정해면(鄭海冕) 등은 삼가 성주합하(城主閤下)께서 효()로 다스리시는 아래 글월을 올립니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충성하여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신자(臣子)의 대절(大節)이며 예()로 제향(祭享)을 지내는 것은 사림(士林)의 정론(正論)입니다. 저희들 고을의 채공(蔡公)은 이름이 홍국(弘國)이고 호가 야수(野叟)이며,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曺判書)에 증직(贈職)되셨는데, 바로 예조판서(禮曹判書) 휘 충경(忠敬)의 현손(玄孫)입니다. 덕과 아름다운 행실을 세습(世襲)하여 타고난 바탕이 웅위(雄偉)하셨습니다.

    용사(龍蛇, 임진·계사)의 변을 당하여, 그 세 아들과 종족(宗族) 33 ()과 향린(鄕隣)의 동지(同志) 60여 의사(義士)를 이끌고,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하니, 채공(蔡公)을 추대하여 의려장(義旅將)을 삼았고, 국난(國難)에 죽기를 맹서하여 여러 번 전승(戰勝)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원수(元帥) 권률(權慄)이 편지로 위로(慰勞면려(勉勵)하였습니다.

    큰아들 명달(命達)은 의곡(義穀) 3백 석()을 배로 조운(漕運)하여 바치며 호종(扈從)하러 갔습니다. 돌아와서는 순찰사(巡察使)가 장계(狀啓)로 알려, 선조대왕(宣祖大王)이 이를 아름답다하여, 훈작(勳爵)을 주고 품질(品秩)을 높혀 주었습니다.

    그런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다시 전일(前日)에 동맹(同盟)한 의사(義士)들을 독려(督勵)하여 대장부(大丈夫)의 높은 의기(義氣)를 가지고 타일렀습니다. 계속하여 흥성(興城)의 배풍(排風)과 부안(扶安)의 호벌치(胡伐峙)에서 분투(奮鬪)하여 왜적을 참괵(斬馘. 목 베어 죽이는 것)한 것이 많았습니다. 결국에는 순절(殉節)하였으니, 후인(後人)들이 그 고개 이름을 호벌치(胡伐峙)라고 하였습니다.

    사적(事蹟)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실려 있으니, 천년(千年)이 지난 뒤에라도 누군들 그 충절을 흠모하여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공의 사우(祠宇) 건설(建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어찌 많은 선비들과 후손(後孫)이 억울해 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이에 감히 사유(事由)를 말씀드려 특별히 제교(題敎)하시어 조두(俎豆)의 예()를 베풀 수 있도록 천 번 만 번 엎드려 축원(祝願)하는 바입니다.



    祠宇請建文(2)


    鄕中多士尹禹鉉·鄭海冕·白昇洙 謹齋沐 上書于城主閤下 伏以 褒尙忠義 刱設禮享 朝家之盛典 士林之公議也 本郡義旅將 平康蔡公 諱弘國 號野叟 卽禮曺判書諱忠敬 號槐亭公玄孫 司正公諱致義子也 世襲懿德 天資雄偉 當龍蛇之變 見高霽峯·金健齋倡義檄文 募義旅 赴錦山 及高公敗歿 收散卒以歸 先出二十餘家僮 率三子及宗族三十三人 鄕隣同志高德鳳·曺益齡·金永年等 六十餘義士 歃血同盟於南塘 公爲義旅將 誓死國難 約于衆曰 髮毛身體 受之父母也 今我聖上 卽父母也 當父母之危 豈惜髮毛身體乎 知此以行 輪檄列邑 聞風而來附者 惟日愈衆 軍容凜凜 六七隣鄕 賴而得全 權元帥慄 以勉巡遠責 又寄檄於法聖鎭 出兵糧四百石 三百石 漕納于龍灣行在所 一百石 送于嶺南郭再佑陣 而偵聞賊犯順天 急振義旅而奮擊 到淳昌石堡 留軍餉士 於是巡察使 擧實狀聞 宣廟嘉之 以軍功 特除通政僉中樞焉 丁酉再猘 更倡與前日同志義士及靈巖·海南來附之陣 奮發追擊於興城·扶安 斬賊累級 刃及公身 竟爲殉節 子命達·慶達 以未復父讎 賊衆大至 同地殉節 后人名其峙曰胡伐峙 事載於節義錄 其丹忠炳節 如彼卓偉 尙欠俎豆禮享 實爲輿論之抑鬱者也 道繡·宗伯題敎 帖連仰訴 細細垂察後 特爲題敎 俾設俎豆之禮 無任祈懇之至.

    壬申八月 日

    多士 白令鎭 李遇賢 柳 湧 朴鎭休 金復煥

    高昇鎭 鄭哲黙 宋學鉉 李鶴洙 吳世源

    金洛鎭 慎宗寬 林時遠 黃在濂 宋憙洙

    曺衡承 金以成 高時休

    사우 건립을 청하는 글(祠宇請建文) (2)

    고을 안의 많은 선비, 윤우현(尹禹鉉정해면(鄭海冕백승수(白昇洙) 등은, 삼가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성주합하(城主閤下)에게 글월을 올립니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충의(忠義)에 포상(襃賞)하여 예향(禮享)을 창설(刱設)함은 나라의 성대한 전례(典禮)이며,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입니다.

    본군(本郡)의 의려장(義旅將) 평강채공(平康蔡公)은 휘가 홍국(弘國)이고 호가 야수(野叟)이니, 바로 예조판서 휘 충경(忠敬) 호 괴정(槐亭) 공의 현손(玄孫)이며 사정공(司正公) 휘 치의(致義)의 아들이니, 아름다운 덕을 세습(世襲)하여 하늘에서 타고난 바탕이 웅위(雄偉)하였습니다.

    용사(龍蛇, 임진·계사)의 변란(變亂)을 당하여, 고제봉(高霽峯김건재(金健齋)의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고, 의려(義旅)를 모집하여 금산(錦山)으로 갔는데, 고공(高公)이 패전(敗戰)하여 죽게 되자, 흩어진 병졸(兵卒)을 수습하여 돌아가, 먼저 20여 명의 가동(家僮)을 내고, 세 아들과 종족 33 (), 향리(鄕里) 이웃 동지(同志)인 고덕봉(高德鳳조익령(曺益齡김영년(金永年) 60여 의사(義士)를 거느리고 남당(南塘)에서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하였으니, 공을 의려장(義旅將)으로 삼아, 국난(國難)에 죽기를 맹서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기약하기를,

    발모(髮毛)와 신체(身體)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며, 지금의 우리 임금님은 곧 부모이니, 부모가 위급한 처지를 당하였는데, 어찌 터럭과 몸을 아까워 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을 알고 행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리니 풍문(風聞)을 듣고 와서 합류(合流)하는 자가 날이 갈수로 많아지고, 군용(軍容)이 늘름(凜凜)하여 67 이웃 고을이 덕택으로 온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책(, 職分)으로 권면(勸勉)하였습니다. 또 격문(檄文)을 법성진(法聖鎭)으로 보내어 병량(兵糧) 400 ()을 내놓게 하여, 300 ()은 바다로 조운(漕運)하여 용만(龍灣, 義州) 행재소(行在所)에 바치게 하고, 100 (), 영남(嶺南) 곽재우(郭再佑)의 의진(義陣)으로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탐(偵探)하여 왜적이 순천(順天)을 침범한다는 말을 듣고, 급히 의군(義軍)을 진작(振作)하여 분격(奮擊)하면서 순창(淳昌) 석보(石堡)에 군대를 멈추고 군사(軍士)들을 잘 먹이도록 하였습니다.

    이때에 순찰사(巡察使)가 사실을 들어 장계(狀啓)를 올리니, 선조대왕(宣祖大王)이 이를 가상(嘉尙)하다 하여, 군공(軍功)으로 특별히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除授)하였습니다.

    정유(丁酉)에 왜적들이 다시 미쳐 날뛰니, 다시 창의(倡義)하여, 전일(前日)의 동지의사(同志義士)와 영암(靈巖해남(海南)에서 와서 합류(合流)한 병진(兵陣)과 함께 분발(奮發)하여 흥성(興城부안(扶安)으로 추격(追擊)하여 왜적의 여러 수급(首級)을 참()하였습니다.

    칼날이 공의 몸에 미치니, 결국에는 순절(殉節)하였고, 아들 명달(命達경달(慶達)이 아버지 원수(怨讐)를 갚지 못하고 왜적의 무리가 크게 이르니 같은 땅에서 순절(殉節)하였습니다.

    후인(後人)들이 그 고지(高地)의 이름을 호벌치(胡伐峙)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적(事蹟)은 절의록(節義錄)에 실려 있으니, 그 붉은 충성과 빛나는 절의(節義)가 저렇게 뛰어나게 훌륭한데, 아직도 조두(俎豆)로 예향(禮享)함이 없으니, 실로 여론(輿論)의 억울(抑鬱)함이 되는 것입니다.

    도수(道繡, 監司繡衣御史)와 종백(宗伯, 예조판서)의 제교(題敎)를 첩련(帖連, 첨부)하여 우러러 하소연하오니 자세하게 굽어 살피신 뒤에 특별히 제교(題敎)하시어, 조두(俎豆, 제사)의 예()를 베풀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임신년(壬申年) 8월 일

    다사(多士)

    백영진(白令鎭) 이우현(李遇賢) 류 용(柳 湧) 박진휴(朴鎭休)

    김복환(金復煥) 고승진(高昇鎭) 정철묵(鄭哲黙) 송학현(宋學鉉)

    이학수(李鶴洙) 오세원(吳世源) 김낙진(金洛鎭) 신종관(慎宗寬)

    임시원(林時遠) 황재렴(黃在濂) 송희수(宋憙洙) 조형승(曺衡承)

    김이성(金以成) 고시휴(高時休).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