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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수실기(野叟實記) 본손천장과 유장 등


    남당회맹단 의병대장 채홍국장군 야수실기를 차례대로 게시합니다.

    野 叟 實 記


    本孫薦狀(1)

    蔡膺浩·蔡膺福·蔡殷恭·蔡泓鐸等 遷狀于繡衣閣下


    興德 幼學 蔡膺浩·蔡膺福·蔡殷恭·蔡泓鐸等 謹齋沐百拜 上書于繡衣閤下 伏以 戰亡殞矢 此下當有臣子之大義 褒節獎忠之語[金禧東注]國家之盛典 生等 七世祖諱弘國當龍蛇之變 奮忠擧義 率其三子及宗族三十三人 同志義士六十餘人 會盟于南塘 築壇歃血 公爲義旅將 督旅禦賊 六七隣邑 賴以得全 本官羅公惕 助給軍糧而激勵 權元帥慄 以勉巡遠之責 於是 更追賊順天 多有斬獲 巡察使以狀聞 宣廟嘉之 特除僉中樞 長子命達 以義穀三百石 漕納于行在之功 又 除訓鍊副正 次子慶達 亦以軍功 除訓鍊院正 及至丁酉再猘 更倡義旅 禦賊於排風嶺 轉戰於扶安胡伐峙 連進連退二十餘日之間 斬獲無筭 又賊馘大進 數百餘義士盡爲被害凶鋒 生等 七世祖 素善射 自平明至日䀯時 射不停留 矢殲累百餘 勢盡力窮 竟遇害於賊鋒 子命達·慶達以救逐之 竟爲同地並殉. 生等 七世祖三父子 殉節事蹟 昭昭焉俱載於當時義錄·日記及興城邑誌 故玆敢仰訴於廉察之下 生等 七祖祖未蒙旌褒之典 爲其子孫者豈不至寃哉 伏乞繡衣 博採 生等 先祖之忠節 陳聞于天陛之特爲褒揚之地 無任屛營祈懇之至.

    본손의 천장(本孫薦狀) (1)

    채응호(蔡膺浩채응복(蔡應福채은공(蔡殷恭채홍탁(蔡泓鐸) 등이 수의사또에게 천장(遷狀)한 것이다.


    흥덕(興德) 유학(幼學) 채응호(蔡膺浩채응복(蔡膺福채은공(蔡殷恭채홍탁(蔡泓鐸) 등은, 삼가 재목(齋沐) 백배(百拜)하고 수의합하(繡衣閤下)에게 상서(上書)하나이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싸우다 죽고 화살에 목숨을 잃는 것은 () 국가(國家)의 성대(盛大)한 전례(典禮)입니다. 생등(生等) 7세조(七世祖) 휘 홍국(弘國)은 용사(龍蛇, 壬辰·癸巳)의 변()을 당하여, 충성심으로 분기(奮起)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그 세 아들과 종족(宗族) 33 ()과 동지의사(同志義士) 60여 인()을 이끌고 남당(南塘)에서 모여 맹서(盟誓)하고 단()을 쌓아 피를 마셨습니다.

    (), 의려장(義旅將)이 되어, 군려(軍旅)를 독려(督勵)하여 왜적을 방어(防禦)하니 67 개 이웃 고을이 그 덕택으로 온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본관(本官) 나척(羅惕) 공이 군량(軍糧)을 도와주며 격려(激勵)하였고, 원수(元帥) 권률(權慄)이 장순(張巡허원(許遠)故事를 가지고 면려(勉勵)하였습니다.

    이때에, 다시 왜적을 순천(順天)으로 추격(追擊)하여 참()하거나 사로잡은 것이 많았으며, 순찰사(巡察使)가 장계(狀啓)를 올려 선묘(宣廟)께서 이를 가상(嘉尙)하다 하시어 특별히 첨중추(僉中樞)에 제수(除授)하시고, 큰아들 명달(命達)은 의곡(義穀) 300 ()을 바다로 운송(運送)하여 행재소(行在所)에 바친 공()으로 또 훈련부정(訓鍊副正)에 제수(除授)되고, 차자(次子) 경달(慶達)도 궁공(軍功)으로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제수(除授)되었습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의려(義旅)를 창도(倡導)하여 왜적을 배풍령(排風嶺)에서 방어(防禦)하고, 부안(扶安) 호벌치(胡伐峙)로 전전(轉戰)하여 연달아 진군(進軍)하였다가 퇴각(退却)하였다가 하기를 20여 일이나 하는 사이에, ()하거나 사로잡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또 왜적의 무리가 크게 나오니, 수백여(數百餘) 의사(義士)는 흉봉(凶鋒)에 모두 피해(被害)를 당하였습니다. 생등(生等) 7세조는, 원래 활쏘기를 잘하여, 밝을 무렵부터 해가 질 때까지 활쏘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화살로 수백(數百) ()을 죽였으나, 힘이 다 빠져서 결국은 적의 칼날에 해()를 당하였습니다. 아들 명달(命達)과 경달(慶達)이 구하려고 쫓아갔으나 결국에는 같은 곳에서 나란히 죽었습니다. 생등(生等) 7세조 삼부자(三父子)의 순절(殉節)한 사적(事蹟)은 환하게 모두 당시의 의록(義錄일기(日記) 및 흥성읍지(興城邑誌)에 실려 있으므로, 이에 감히 염찰(廉察)하시는 아래 호소(呼訴)하는 바입니다. 생등(生等) 7세조는 아직 정포(旌褒)의 전례(典禮)를 받지 못하였으니, 그 자손 된 자가 어찌 지극히 원통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수의(繡衣) 사또에게 비옵나이다. 생등(生等) 선조(先祖)의 충절(忠節)을 널리 채택(採擇)하시어 임금님께 말씀을 올려, 특별히 포양(褒揚)이 되도록 해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本郡儒狀

    境內多士謹齋沐上書于城主閤下 伏以 爲國死節之臣 從古何限 而未有如本縣蔡氏一門三十三人之同時倡義 爲國誓死之多且衆者也. 本縣僉中樞蔡公諱弘國 當壬辰倭寇之變 以白衣倡義 率其三子及宗族三十三人 亦與同志之士 高德鳳·曺益齡·李綽等六十餘人 會于北面南塘 築壇聚旅 歃血同盟 推蔡公爲義旅將 推高公爲盟主將 誓曰 當此國難 君憂之時 爲臣子職分 有死無己 北望祝天 相向泣誓 軍容甚肅 蔡公命達 赴扈駕時 本官羅公諱惕 給助軍糧而激勵 都元帥權公諱慄 以張巡許遠之責 寄書慰勉 義旅所到處 斬獲甚衆 及見霽峯高先生倡義檄文 赴錦山戰鬪 赴順天赤城江 至于丁酉 再倡義旅 遇賊於扶安上掠峙 連戰破倭 又戰于本縣長嶝原 斬賊亦多 沿海諸邑 無不屯聚 而惟六七隣鄕 賴以得安 此蔡公之倡義 賊船不敢來泊矣 嗚呼 賊徒蹂躪 倭衆大至 義旅九十二士 爲國竟死 其炳然丹衷 無愧於古之張巡·許遠 不下於今之霽峯·重峰 前後事蹟 載於邑誌 亦載於會盟錄 節義 斑班可考 草野韋布之士 雖有如此希世之節義 而如無縉紳朝士 特聞褒獎之擧 則惡能施於後世也哉? 當時倡義之冊子與日記 至今幸存於本孫家 宛若間晨 有待今日矣 伏願 特採事實 轉報營門 無至泯沒 無任祈懇之至

    己丑四月 日

    李匡訓 柳世良 李宗漢 白東直 尹行煥 慎民鎭 宋基協 黃秀麟 宋禹鉉 白東佐 朴夏錫 朴圭錫 金邦七 李匡甲 李時中 金守運 李可大


    본군유장(本郡儒狀)

    경내(境內)의 많은 선비들이, 삼가 재계(齋戒) 목욕(沐浴)하고 성주각하(城主閤下)에게 글월을 올립니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나라를 위하여 절의(節義)에 죽은 신하가, 예로부터 어찌 한정(限定)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아직 본현(本縣)의 채씨일문(蔡氏一門)처럼 33 ()이 동시(同時)에 창의(倡義)하여,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맹서(盟誓)한 사람이 많았던 일은 없었습니다.

    본현(本縣)의 첨중추(僉中樞) 채홍국(蔡弘國)공은, 임진년 왜구(倭寇)의 난()을 당하여, 백의(白衣)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그 세 아들과 종족(宗族) 33()을 이끌고, 또 동지(同志)의 선비 고덕봉(高德鳳조익령(曺益齡이작(李綽) 60여 인()과 함께 북면(北面) 남당(南塘)에 모여, 단을 쌓고 군려(軍旅)를 모아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하였습니다. 채공(蔡公)을 추대하여 의려장(義旅將)을 삼고 고공(高公)을 추대하여 맹주장(盟主將)을 삼아 맹서하기를,

    이렇게 국난(國難)을 당하여 임금님이 근심하시는 때에, 신자(臣子)된 직분(職分), 죽음은 있으나 내 몸은 없다.고 말하고, 북쪽을 바라보며 하늘에 빌고, 서로 마주보고 울며 맹서하니, 군용(軍容)이 매우 엄숙(嚴肅)하였습니다.

    채명달(蔡命達) 공이 임금님의 수레를 호종(扈從)하러 갈 때, 본관(本官) 라척(羅惕) 공은 군량(軍糧)을 내주며 격려하였고, 도원수(都元帥) 권률(權慄) 공은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고사(故事)를 들어, 편지로 위로하고 면려(勉勵)하였습니다.

    의려(義旅)가 이르는 곳마다, ()하거나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제봉(霽峯) 고선생(高先生)의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고 금산(錦山) 전투(戰鬪)에 달려갔으며 순천(順天) 적성강(赤城江)으로도 달려갔습니다.

    정유(丁酉)에 이르러서는, 다시 의려(義旅)를 창도(唱導)하여, 왜적을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에서 만나, 연달아 싸우며 왜군(倭軍)을 격파(擊破)하였고, 또 본현(本縣) 장등(長嶝)의 언덕에서 싸워 왜적을 참()한 것이 또한 많았습니다. 바다에 연(沿)한 여러 고을에 왜적이 둔()을 치고 모여 있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오직 67 이웃 고을만이 힘입어 안전(安全)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채공(蔡公)이 창의(倡義)하여 적선(賊船)이 감히 와서 정박(碇泊)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아, 적도(賊徒)가 유린(蹂躪)하며 왜적의 무리가 크게 이르니, 의려(義旅)92 의사(義士)는 나라를 위하여 결국 죽었으니, 그 빛나는 붉은 충성심(忠誠心), 옛날의 장순(張巡허원(許遠)에게 부끄럽지 아니하고, 지금의 제봉(霽峯. 高敬命)이나 중봉(重峰, 趙憲)만 못하지 않습니다.

    전후(前後)의 사적(事蹟)은 읍지(邑誌)에 실려 있고, 또 회맹록(會盟錄)에 실려 있어, 절의(節義)를 환하게 고증(考證)할 수 있습니다.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벼슬 없는 선비라 하여, 비록 이와 같은 세상에 드문 절의(節義)가 있는데도, 벼슬이 높은 조정(朝廷)의 높은 선비들처럼 특별히 위에 알려 포장(褒獎)하는 조치(措置)가 없다면, 어찌 능히 후세(後世)에 베풀 수가 있겠습니까?

    당시 창의(倡義)한 책자(冊子)와 일기(日記)가 지금까지 다행히 본손(本孫) 집에 남아 있으니 완연(宛然)하게 어제의 일과 같아, 오늘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사실(事實)을 특채(特採)하여 영문(營門, 監司)에 전보(轉報)하여 민몰(泯沒)되지 않도록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기축년(己丑年) 4월 일

    이광훈(李匡訓) 류세장(柳世良) 이종한(李宗漢) 백동직(白東直) 윤행환(尹行煥) 신민진(慎民鎭) 송기협(宋基協) 황수린(黃秀麟) 송우현(宋禹鉉) 백동좌(白東佐) 박하석(朴夏錫) 박규석(朴圭錫) 김방칠(金邦七) 이광갑(李匡甲) 이시중(李時中) 김수운(金守運) 이가대(李可大)

    本孫薦狀(2)

    蔡膺徇·蔡膺福·蔡禮參·蔡成參等 遷狀于城主閣下

    興德 幼學 蔡膺徇·蔡膺福·蔡禮參·蔡成參 謹齋沐百拜 上書于城主閤下 伏以 爲國盡忠 臣子之大義 褒節獎忠 朝家之盛典也. 生等 七世祖諱弘國 當龍蛇之變 奮身杖義 率其三子及宗族三十三人 同志六十餘義士 歃血同盟 擊戰賊衆 六七隣邑 賴以得全 時本官羅公惕聞 給補兵糧 權元帥慄 以書勉巡遠之責 以狀聞 朝家 特除僉中樞之職 而又秩至嘉善同中樞焉 丁酉再倡 傳檄列邑 聞風響應者 尤倍於前日 勤王轉鬪 長嶝·胡峙之伐 仍爲殉節 卓蹟昭載於邑誌與節義錄 至今尙存 宛若隔晨事 而尙未蒙旌褒之典 爲子孫者 豈齎恨抑鬱 爲如何哉 當時日記帖 連仰訴于孝理之下 博採事實 亟爲報營 陳達于天陛之下 俾蒙襃揚之地 無任屛營 祈懇之至.

    月 日

    본손의 천장(本孫薦狀) (2)


    채응순(蔡膺徇채응복(蔡膺福채예참(蔡禮參채성참(蔡成參) 등이 성주(城主, 興德郡守)에게 천장(遷狀)한 것이다.


    흥덕(興德) 유학(幼學) 채응순(蔡膺徇채응복(蔡膺福채예삼(蔡禮參채성삼(蔡成參) 등은, 삼가 재목(齋沐) 백배(百拜)하고 성주각하(城主閤下)에게 상서(上書)하나이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은 신자(臣子)의 큰 절의(節義)이며, 절의(節義)와 충성을 포장(襃獎)하는 것은 국가(國家)의 성대(盛大)한 전례(典禮)입니다. 생등(生等) 7세조(七世祖) 휘 홍국(弘國)은 용사(龍蛇, 壬辰·癸巳)의 변()을 당하여 충성심으로 분기(奮起)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그 세 아들과 종족(宗族) 33 ()과 동지의사(同志義士) 60여 인()을 이끌고 맹서(盟誓)하고 피를 마셨습니다. 왜적의 무리와 격전(激戰)하여 67 개 이웃 고을이 그 덕택으로 온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본관(本官) 나척(羅惕) 공이 듣고 군량(軍糧)을 도와주었고, 원수(元帥) 권률(權慄)이 편지로 장순(張巡허원(許遠)의 고사(故事)를 가지고 면려(勉勵)하였습니다.

    장계(狀啓)가 올라가, 나라에서는 특별히 첨중추(僉中樞)의 관직(官職)을 제수(除授)하였으며 또 관질(官秩)이 가선 동중추(嘉善同中樞)에 이르렀습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다시 의려(義旅)를 창도(倡導)하여 격문(檄文)을 여러 고을에 전하였고 소식을 듣고 향응(響應)하는 자가 전일(前日)에 비하여 배나 더 많았습니다. 근왕(勤王) 전투(轉鬪)하니, 장등(長嶝)과 호벌치(胡伐峙)에서 토벌(討伐)하다가 이어 순절(殉節)하였습니다.

    뛰어난 공적(功績)은 읍지(邑誌)와 절의록(節義錄)에 소상(昭詳)하게 실려, 지금도 남아 있으니 완연(宛然)하게 어제의 일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정포(旌褒)의 전례(典禮)를 받지 못하였으니, 그 자손 된 자의 한()과 억울(抑鬱)함을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당시의 일기첩(日記帖)으로 연달아 효리(孝理)하시는 아래 우러러 하소연하오니, 사실(事實)을 널리 채택(採擇)하시어 빨리 감영(監營)에 알리시고 임금님께 말씀이 진달(陳達)되어 포양(褒揚)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월 일



    興德儒狀(1)


    興德儒生李匡訓·尹行煥等 謹齋沐 上書于巡相閤下 伏以 爲國死節之臣 從古何限 而未有如生 鄕蔡氏一門三十三人之多且衆者 至今泯沒 未蒙旌褒之典 豈非士林之抑鬱哉 本縣僉中樞蔡公 諱弘國 當龍蛇之變 以白衣倡義 率其三子及宗族三十三人 亦其同志之士高德鳳·曺益齡·李綽·金永年等六十餘人 會于本縣北面南塘 築壇聚旅 歃血同盟 推蔡公爲義旅將 與諸公誓曰 當此國難君憂之時 爲其臣子有死無已 北望祝天 相向泣誓 軍容甚肅 本官羅公惕 助給軍糧 都元帥權公慄 以張巡·許遠之責 寄書慰勉 義旅所到 斬獲甚多 及見高霽峰檄文 赴錦山之戰 轉赴順天 歸路至赤城江 各詩律以暢忠憤 至于丁酉 更倡義旅 亦有往復書札 而亦是爲國誓死之意也 遇賊於扶安上掠峙 轉戰斬獲 故後人名其峙曰胡伐峙 而至今傳稱 又戰於本縣長嶝原 斬倭亦多 沿海諸邑 倭船無不屯聚 而六七隣邑 賴賴下當有以得全三字此蔡公之倡義 倭船不敢來泊矣 忽遇賊衆大至 强弱不敵 九十二士 爲國竟死 其炳然丹忠 無愧於古之張巡·許遠 可俟於今之霽峯 蔡公父子殉節之蹟 昭載於邑誌 亦在於會盟錄·節義錄 班班可考 草野韋布之人 雖有如此希世之忠節 而如無搢紳朝士之博採褒獎之擧 則惡能施於後世也哉 當時倡義之盟錄 及日記冊子 幸存於本孫家 宛若隔晨 事若有待於今日矣 伏願特採事實 轉報天門毋至泯沒 無任祈懇之至.

    己丑四月 日

    幼學 白東直 朴夏錫 林成漢 宋禹鉉 金守運 申在中 李顯坤 黃秀麟 李時中 柳世良 慎恒鎭 朴圭錫 尹行祐 李匡甲 金邦七 吳成憲 宋基協 白東佐 李國鎭 金碩豐

    흥덕유장(興德儒狀)(1)

    흥덕(興德)의 유생(儒生) 이광훈(李匡訓윤행환(尹行煥) 등은 삼가 재계(齋戒) 목욕(沐浴)하고 순상합하(巡相閤下)에게 글월을 올리나이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나라를 위하여 절의(節義)에 죽은 신하가 예로부터 어찌 한정(限定)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아직 본현(本縣)의 채씨일문(蔡氏一門)처럼 33 ()이 동시(同時)에 창의(倡義)하여,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맹서한 사람이 많았던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민몰(泯沒)하여 정포(旌褒)의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사림(士林)이 억울(抑鬱)해 하지 않겠습니까?

    본현(本縣)의 첨중추(僉中樞) 채홍국공(蔡弘國公)은 임진년 왜구(倭寇)의 변()을 당하여, 백의(白衣)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그 세 아들과 종족(宗族) 33 ()을 이끌고, 또 동지(同志)의 선비 고덕봉(高德鳳조익령(曺益齡이작(李綽김영년(金永年) 60여 인()과 함께 본현(本縣) 북면(北面) 남당(南塘)에 모여, 단을 쌓고 군려(軍旅)를 모아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하였습니다. 채공(蔡公)을 추대하여 의려장(義旅將)을 삼고 제공(諸公)이 맹서하기를,

    이렇게 국난(國難)을 당하여 임금님이 근심하시는 때에, 신자(臣子)는 죽음은 있으나 자기 몸은 없다.고 말하고 북쪽을 바라보며 하늘에 빌고, 서로 마주보고 울며 맹서하니, 군용(軍容)이 매우 엄숙(嚴肅)하였습니다.

    본관(本官) 나척(羅惕) 공이 군량(軍糧)을 도와주었고, 원수(元帥) 권률(權慄) 공이 장순(張巡허원(許遠)故事를 가지고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면려(勉勵)하였습니다.

    장계(狀啓)가 올라가, 나라에서는 특별히 첨중추(僉中樞)의 관직(官職)을 제수(除授)하였으며, 또 관질(官秩)이 가선 동중추(嘉善同中樞)에 이르렀습니다.

    의려(義旅)가 이르는 곳마다 참()하거나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고제봉(高霽峯)의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고 금산(錦山) 전투(戰鬪)에 달려갔으며 순천(順天)으로 전전(轉戰)하여 달려가기도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적성강(赤城江)에 이르러, 각각 시()를 지어 충분(忠憤)한 마음을 펼쳤습니다.

    정유(丁酉)에 이르러서는 다시 의려(義旅)를 창도(唱導)하였고, 또한 왕복(往復)한 서찰(書札)이 있으니, 역시(亦是)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맹서하는 뜻이었습니다.

    왜적을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에서 만나, 연달아 싸우며 왜군(倭軍)을 참()하고 사로잡았기 때문에, 후인(後人)들이 그 고개 이름을 호벌치(胡伐峙)라고 하여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또 본현(本縣) 장등(長嶝)의 언덕에서 싸워 왜적을 참()한 것이 또한 많았습니다. 바다에 연(沿)한 여러 고을에 왜적이 둔()을 치고 모여 있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오직 67 이웃 고을만이 힘입어 안전(安全)할 수 있었던 것인데, 이것은 채공(蔡公)이 창의(倡義)하여 적선(賊船)이 감히 와서 정박(碇泊)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왜적의 무리가 크게 이르러, 강약(强弱)이 부적(不敵)이라, 92 의사(義士)는 나라를 위하여 결국 죽었으니, 그 빛나는 붉은 충성심(忠誠心)은 옛날의 장순(張巡허원(許遠)에게 부끄럽지 아니하고, 지금의 제봉(霽峯. 高敬命)이나 중봉(重峰, 趙憲)만 못하지 않습니다.

    채공(蔡公) 부자(父子)의 순절(殉節)한 사적(事蹟)은 읍지(邑誌)에 실려 있고, 또 회맹록(會盟錄절의록(節義錄)에 있으니, 환하게 고증(考證)할 수 있습니다.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벼슬 없는 선비라 하여, 비록 이와 같은 세상에 드문 절의(節義)가 있는데도, 벼슬이 높은 조정(朝廷)의 진신(縉紳)과 같이 널리 채택(採擇)하여 포장(褒獎)하는 조치(措置)가 없다면, 어찌 능히 후세(後世)에 베풀 수가 있겠습니까?

    당시 창의(倡義)한 맹록(盟錄)과 일기(日記) 책자(冊子)가 다행히 본손(本孫) 집에 남아 있으니, 완연(宛然)하게 어제의 일과 같아, 오늘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사실(事實)을 특채(特採)하여 천문(天門)에 전보(轉報)하여 민몰(泯沒)되지 않도록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을축년(乙丑年) 4월 일

    유학(幼學) 백동직(白東直) 박하석(朴夏錫) 임성한(林成漢)

    송우현(宋禹鉉) 김수운(金守運) 신재중(申在中) 이현곤(李顯坤) 황수린(黃秀麟) 이시중(李時中) 류세량(柳世良) 신항진(慎恒鎭) 박규석(朴圭錫) 윤행우(尹行祐) 이광갑(李匡甲) 김방칠(金邦七) 오성헌(吳成憲) 송기협(宋基協) 백동좌(白東佐) 이국진(李國鎭) 김석풍(金碩豐)

    興德儒狀(2)

    興德儒生白東直·李匡訓 等 謹齋沐 上書于繡衣閤下 伏以 臨難死義 臣子之大節 褒忠獎節 朝家之盛典 生等 之鄕 蔡氏之門 有三十三人死節之蹟 而尙未蒙旌褒之恩 則斯豈非士林之抑鬱 而聖世之欠典乎 噫 粤在壬辰倭寇之變 本縣蔡公諱弘國 白衣倡義 與其三子及宗族三十三人 同志之士 高公德鳳·曺公益齡·金公永年等九十餘人 會于本縣 北面南塘 築壇聚旅 歃血同盟 凡九十二士也 推蔡公爲義旅將 諸公 各推任定 而或出家僮 或募丁壯 軍容甚肅 本官羅公惕 助給軍糧 都元帥權公慄 以書勉巡遠之責 義聲所及 聚軍幾至數千餘 糧可餉士 自排風嶺 轉戰扶安上掠峙 斬首累級 掃淸凶賊 後人 名其峙曰胡伐峙 自此以後 六七隣鄕 賴以得安 時巡察使 以狀聞 宣廟嘉之 特除僉中樞職 而又秩至嘉善同中樞焉 長子命達 義穀漕納于赴扈駕之功 特除訓鍊院副正 次子慶達 亦以軍功 除訓鍊院正 及至丁酉更倡 擧義奮發 急擊累戰累捷禦賊 賊衆大至 百餘義士盡爲所害 蔡公弘國 獨與二子 抗死力戰 所殺甚多 蔡公只以赤手 旣無用武之地 遂抱倭賊之背 則倭賊以劒自揕其胸 而伏刃及於蔡公之身 公之二子 方與賊接戰 見其父死倭鋒 急往救之 則已無及矣 遂奪倭劒 刺殺倭酋 從父並殉 嗚呼蔡公三父子 同地殉節之蹟 俱載於邑誌與湖南節義錄 而當時九十二士同盟錄 及日記草本 尙存本 孫家 血痕班班 而二百餘年往蹟 宛若隔晨事矣 九十二節士之中 惟蔡公之族姪禹齡 以曾經縣監 特蒙宣武原從之勳 又蒙兵曺叅判之贈 而蔡公弘國三父子 貞忠大節 尙未蒙旌褒之典 則極爲士林之抑鬱 而亦豈非國家之欠典乎 玆敢齊聲仰龥於按廉之下 伏乞特採蔡公三父子殉節之蹟 陳聞于天陛之下 以爲襃揚之地 無任屛營之至.

    己丑九月 日

    李匡訓 李可白 申在中 魯榮栢 白東直 尹行煥 林成漢

    李匡甲 李顯坤 慎恒鎭 朴震榮 尹行祐 朴夏錫 柳世良

    宋禹鉉 宋伯鉉 慎民鎭 鄭海迎 柳世長 朴圭錫 宋基協

    李宗漢 吳成憲 李可大 黃秀麟 白東佐 金邦七

    흥덕유장(興德儒狀) (2)

    흥덕(興德) 유생(儒生) 백동직(白東直이광훈(李匡訓) 등은 삼가 재계(齋戒) 목욕(沐浴)하고, 수의합하(繡衣閤下)에게 글월을 올립니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국난(國難)에 임하여 의()에 죽는 것은 신자(臣子)의 대절(大節)이며, 충절(忠節)에 포상(襃賞)하여 권장(勸獎)함은 나라의 성전(盛典)입니다. 저희들 향리(鄕里)의 채씨(蔡氏) 가문(家門)33 ()이 절의(節義)에 죽은 실적(實跡)이 있는데, 아직 정포(旌褒)의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사림(士林)의 억울(抑鬱)함이 아니며, 성세(聖世)의 전례(典禮)에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임진(壬辰) 왜구(倭寇)의 변란(變亂) 때에, 저희 고을 채홍국(蔡弘國) ()은 백의(白衣)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그 세 아들과 종족(宗族) 33 (), 동지(同志)의 선비 고덕봉(高德鳳조익령(曺益齡김영년(金永年) 공 등 90여 인()과 함께 본현(本縣) 북면(北面) 남당(南塘)에서 만나, ()을 쌓아 군병(軍兵)을 모아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하였으니, 모두 92 의사(義士)였습니다.

    채공(蔡公)을 추대하여 의려장(義旅將)을 삼고, 제공(諸公)이 각각 추천하여 소임(所任)을 정하였는데, 더러는 집에서 부리는 하인들을 내놓고, 더러는 장정(壯丁)을 모집(募集)하여 군대의 모습이 매우 엄숙하였습니다.

    본현(本縣)의 원이었던 나척(羅惕) 공이 군량(軍糧)을 원조(援助)해 주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공이 편지로 장순(張巡허원(許遠)처럼 되라고 면려(勉勵)하였습니다.

    의성(義聲)이 미치는 곳에 모인 군사(軍士)가 거의 수천여(數千餘)에 이르렀고 군량(軍糧)은 군사들을 먹일 만 하였습니다. 배풍령(排風嶺)으로부터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로 전전(轉戰)하였는데 여러 개의 수급(首級)을 참()하여 흉악한 왜적을 청소(淸掃)하였습니다. 후인(後人)들이 그 언덕을 이름 지어 호벌치(胡伐峙)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그 뒤로는 67 이웃 고을이 덕택에 편안할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순찰사(巡察使)가 장계(狀啓)로 알리니, 선조대왕이 이를 가상(嘉尙)하다 하여, 특별히 첨중추(僉中樞)의 관직을 제수(除授)하였습니다.

    큰아들 명달(命達)은 의곡(義穀)을 바다로 운송(運送)하여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바치니 호가(扈駕)한 공()으로 특별히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에 제수(除授)하였고, 둘째 경달(慶達)도 역시 무공(武功)으로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제수되었습니다.

    정유년에 왜적이 다시 창궐(猖獗)하자, 의병을 일으켜 분발(奮發)하여, 급히 공격하여 여러 번 싸워 여러 번 이기며 왜적을 방어(防禦)였는데 왜적의 무리가 크게 이르니, 백여 명의 의사(義士)가 모두 해()를 입었습니다. 채홍국 공은 홀로 두 아들과 함께 죽기로 항거(抗拒)하여 힘껏 싸웠으며, 죽인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채공(蔡公)이 단지 맨손 밖에 남은 것이 없게 되자, 이미 용무(用武)할 방법이 없으니, 드디어 왜적의 등을 안으니, 왜적은 검()으로 스스로 그의 가슴을 찌르고 엎어졌고, 칼날이 채공의 몸에 다다랐습니다. 공의 두 아들은, 바야흐로 왜적과 접전(接戰)하고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왜적의 칼에 죽는 것을 보고, 급히 가서 구하였으나 이미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왜적의 검()을 빼앗아 왜적의 우두머리를 찔러 죽이고 아버지를 따라 나란히 순절(殉節)하였습니다.

    아아, 채공(蔡公) 3부자(父子)가 같은 곳에서 순절(殉節)한 사적(事蹟)은 모두 읍지(邑誌)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실려 있으며, 당시 92 의사(義士)의 동맹록(同盟錄)과 일기(日記) 초본(草本)이 아직도 본손(本孫) 집에 남아 있으니 핏자국이 얼룩덜룩하고, 2백여 년 과거의 유적(遺蹟)이 완연하게 어제의 일과 같습니다.

    92 명의 절사(節士) 가운데, 오직 채공(蔡公)의 족질(族姪) 우령(禹齡)이 전에 현감(縣監)을 지냈었기 때문에 특별히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훈작(勳爵)을 받고, 또 병조참판(兵曺叅判)의 증직(贈職)을 받았으나, 채홍국(蔡弘國) ()3부자의 정충대절(貞忠大節)은 아직도 정포(旌褒)의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였으니, 극히 사림의 억울한 바가 되니, 또 어찌 국가의 흠전(欠典)이 되지 않겠습니끼?

    이에 감히 소리를 가지런히 하여 안렴사(按廉使) 각하(閣下)에 우러러 소리치는 것입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채공(蔡公) 삼부자(三父子)가 순절(殉節)한 자취를 특별히 채택(採擇)하시어, 천폐(天陛 : 임금님 계신 곳) 아래 진달(陳達)해 주심으로써 포양(襃揚)이 되도록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기축년(己丑年) 9월 일

    이광훈(李匡訓) 이가백(李可白) 신재중(申在中) 노영백(魯榮栢)

    백동직(白東直) 윤행환(尹行煥) 임성한(林成漢) 이광갑(李匡甲)

    이현곤(李顯坤) 신항진(慎恒鎭) 박진영(朴震榮) 윤행우(尹行祐)

    박하석(朴夏錫) 류세량(柳世良) 송우현(宋禹鉉) 송백현(宋伯鉉)

    신민진(慎民鎭) 정해영(鄭海迎) 류세장(柳世長) 박규석(朴圭錫)

    송기협(宋基協) 이종한(李宗漢) 오성헌(吳成憲) 이가대(李可大)

    황수린(黃秀麟) 백돈좌(白東佐) 김방칠(金邦七)

    興德儒狀 (3)

    境內多士 謹齋沐 上書于城主閤下 伏以 在昔壬辰 卽我 國家不幸之年也 島夷搶攘 國步蒼黃 南州義烈 不爲不多 而若夫本縣蔡公弘國·高公德鳳·曺公益齡 只一布衣之士 而以衛社報國爲已任 倡率義旅 會于本縣南塘 築壇聚衆 歃血同盟 凡九十二士也 推蔡公爲義旅將 推高公爲盟主 曺公爲叅 謀 而其他召募義徒 鳩聚軍糧 衆爲三百餘名 本官羅公惕 助給軍糧 都元帥權公慄 以巡遠之責 寄書慰勉 義旅所到 斬獲甚多 追賊至順天石堡倉 連破數陣 回至赤城江 各有吟詠 以瀉其懷 其後事聞 蔡公 以軍功 特除同中樞職 而公之長子命達 義穀漕納赴扈駕之功 除訓鍊院副正 次子慶達 亦以軍功 除訓練院正 而丁酉再猘 更倡奮忠杖義 率其三子及宗族三十三人 同志義士六十餘人 擊賊斬獲甚多 而督旅精銳防禦賊 遇大衆之猝至 百餘義徒 皆爲賊所害 而其時同盟錄與日記 尙在於本孫家矣 嗚呼 當時嶺湖之間 方岳之臣 或有望風而先遁全軀而保妻子 惟此諸公 築壇歃血 而人皆忘身 臨陣折箭 而士皆許死 則自古烈士忠臣 何代無之 而一鄕之九十二士 所未有者也 事蹟之來來 邑誌與節義錄之卓卓 同盟錄可見可考也 其衆雖小 而不讓於金健齋晉城之歿矣 其死雖後而無愧於高霽峯錦山之陷矣 忠烈如彼其卓卓 事蹟如此其昭昭 而道郡之擧報 尙此不聞 國家之褒贈之典 至今未蒙 今當倡義回甲之年 則戰亡寃魂 豈不爲抑鬱於泉臺者哉 民等 以同鄕之人 實知事蹟 謹擧其槩仰塵 明庭之下 伏願城主閤下 擧實報營 便使卓絶之忠 當此回甲之年 咸得蒙顯揚旌褒之典 無任祈懇之至.

    壬辰四月 日

    尹行煥 李益中 李可白 姜在恒

    李匡訓 金守運 朴奎錫 黃秀琩

    白東秀 趙命彦 柳世良 慎永鎭

    李匡秀 慎民鎭 吳成憲 徐命鐸

    宋伯鉉 吳錫元 徐赫輔 朴漢奎

    李敏九 李宅東 李宗漢 李儒鐸

    金邦七 宋基協 尹行祐 柳世長

    흥덕유장(興德儒狀) (3)

    경내(境內)의 많은 선비들이, 삼가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성주합하(城主閤下)에게 글월을 올립니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옛날 임진년은 우리나라가 불행하였던 해이니, 섬 오랑캐가 어지럽게 날쳐대니 나라의 발걸음이 허둥거렸습니다.

    남쪽 고을의 의사(義士열사(烈士)가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는데, 그 가운데 본현(本縣)의 채홍국(蔡弘國고덕봉(高德鳳조익령(曺益齡) 공과 같은 사람은 다만 한낱 포의(布衣 : 無官)의 선비로서 사직(社稷)을 지키고 나라에 보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任務)로 삼고 주창(主倡)하여, 의군(義軍)을 이끌고 본현(本縣) 남당(南塘)에서 만나 단을 쌓고 여러 사람을 모아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하였으니 모두 92 명의 의사(義士)였습니다.

    채공(蔡公)을 추대하여 의려장(義旅將)을 삼고, 고공(高公)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를 삼고, 조송(曺公)을 참모(參謀)로 삼았으며, 그 밖에도 의군(義軍)을 모집하고 군량(軍糧)을 모아, 무리가 300 여명이나 되었습니다. 본현(本縣)의 원이었던 나척(羅惕) 공이 군량(軍糧)을 원조(援助)해 주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공이 편지로 장순(張巡허원(許遠)처럼 되라고 면려(勉勵)하였습니다.

    의려(義旅)가 이르는 곳에, ()하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왜적을 추격(追擊)하여 순천(順天) 석보창(石堡倉)에 이르렀는데, 연달아 몇 번 적진(敵陣)을 격파(擊破)하였습니다.

    적성강(赤城江)으로 돌아와서 각자 시()를 읊어 그 회포(懷抱)를 쏟아냈습니다. 그 후 사적(事蹟)이 위에 알려져, 채공(蔡公)은 군공(軍功)으로 특별히 동중추(同中樞)의 관직을 제수(除授)하였고 큰아들 명달(命達), 의곡(義穀)을 바다로 운송(運送)하여 가서 바쳐, 호가(扈駕)한 공()으로 특별히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에 제수(除授)되었고, 둘째 경달(慶達)도 역시 무공(武功)으로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제수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유재란(丁酉再亂)에도 다시 분충장의(奮忠杖義)를 주창하여, 그 세 아들과 종족(宗族) 33 (), 동지(同志) 의사(義士) 60여 인()을 이끌고 왜적을 쳐서 참획(斬獲)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정예(精銳)한 군려(軍旅)를 독전(督戰)하여 왜적을 방어(防禦)하였습니다.

    왜적의 많은 무리가 갑자기 나타나 백 명의 의병(義兵)이 모두 왜적의 해()를 입었는데, 그 때의 동맹록(同盟錄)과 일기(日記)가 아직도 본손(本孫) 집에 남아 있습니다.

    아아, 당시 영남(嶺南)과 호남(湖南) 사이에, 사방(四方)의 산악(山嶽)과 같은 신하(臣下)들이 더러는 바람소리에 먼저 도망쳐 몸을 온전하게 하고 처자(妻子)를 보호(保護)하려고 하였는데, 오직 이 제공(諸公)은 단을 쌓아 피를 마시고, 사람마다 모두 자신을 생각지 않고 전진(戰陣)에 임하여는 화살을 꺾으며 의사(義士)들이 모두 죽기를 허락하였으니, 자고(自古)로 열사(烈士) 충신(忠臣)이 어느 시대엔들 없었을까마는, 한 향리(鄕里)92 명의 의사(義士)가 있은 적은 아직 없었습니다. 사적(事蹟)의 내려오는 것이 읍지(邑誌)와 절의록(節義錄)에 탁탁(卓卓)하고, 동맹록(同盟錄)이 볼 만하고 고증(考證)할 만합니다.

    그 무리가 비록 적으나, 김건재(金健齋)가 진주성(晉州城)에서 죽은 것에 손색(遜色)이 없으며, 그 죽은 것이 비록 뒤졌으나, 고제봉(高霽峯)이 금산(錦山)에서 함몰(陷沒)된 것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충렬(忠烈)이 저와 같이 탁탁(卓卓)하고, 사적(事蹟)이 이와 같이 소소(昭昭)한데, ·(道郡)에서 사적(事蹟)을 들어 보고(報告)하는 것을 아직 이제까지 듣지 못하였고, 국가(國家)가 포증(褒贈)하는 전례(典禮)를 아직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창의(倡義)한 지 회갑(回甲)이 되는 해를 당하였으니, 싸우다가 죽은 원혼(冤魂)이 어찌 저승에서 억울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백성들은 같은 향리(鄕里) 사람으로, 실제로 사적(事蹟)을 알기에, 삼가 그 개요(槪要)를 들어 밝으신 뜰아래 말씀드리는 것이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성주합하(城主閤下)께서는 실적(實跡)을 들어 감영(監營)에 알리시어, 저 탁절(卓絶)한 충성(忠誠)이 이 회갑(回甲)의 해에 모두 현양정포(顯揚旌褒)의 전례(典禮)를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임진년(壬辰年, 1652) 4월 일

    윤행환(尹行煥) 이익중(李益中) 이가백(李可白) 강재항(姜在恒)

    이광훈(李匡訓) 김수운(金守運) 박규석(朴奎錫) 황수창(黃秀琩)

    백동수(白東秀) 조명언(趙命彦) 류세량(柳世良) 신영진(慎永鎭)

    이광수(李匡秀) 신민진(慎民鎭) 오성헌(吳成憲) 서명탁(徐命鐸)

    송백현(宋伯鉉) 오석원(吳錫元) 서혁보(徐赫輔) 박한규(朴漢奎)

    이민구(李敏九) 이택동(李宅東) 이종한(李宗漢) 이유탁(李儒鐸)

    김방칠(金邦七) 송기협(宋基協) 윤행우(尹行祐) 류세장(柳世長)


    道內儒狀(1)


    全羅道內儒生 謹齋沐 上書于太宗伯閣下 伏以 臨難死義 臣子之素節 褒忠獎節 朝家之盛典也 興德縣蔡氏之門 有三十三人死節之蹟 而尙未蒙旌褒之恩 則斯豈非士林之抑鬱 而聖世之欠典乎 噫 粤自壬辰倭寇之變 興德縣蔡公弘國 白衣倡義 率其三子及宗族三十三人 與同志之士 高德鳳·曺益齡·李綽·裵守義·金永年等六十餘人 會于興德北面南塘 築壇聚旅 歃血同盟 凡九十二士也 推蔡公爲義旅將 諸公各定其任 而或出家僮 募丁壯 軍容甚肅 本官羅公惕 助給軍糧 都元帥權公慄 以張巡許遠之責寄書慰勉義所 及聚軍幾至數千 排風之戰 長嶝之圍 斬獲不知其數 追賊至扶安上掠峙 積屍如山 後人名其峙曰胡伐峙 自此以後 倭賊不敢復泊於近處 六七隣鄕 賴以得全 其後事聞 蔡公弘國以軍功 特除僉同樞職 公之子命達 義穀漕納于行在所 次子慶達 亦除訓鍊院正·訓鍊院副正 及丁酉之變 更倡義旅 累戰累捷 忽遇倭賊之大進 百餘義士 盡爲倭賊之所害 蔡公弘國 獨與二子 抗死力戰 所殺甚多 蔡公只以赤手 旣無用武之地 遂抱倭人之背 則倭賊以劒自揕其胸 而伏刃及於蔡公之身 公之二子 方與倭賊力戰 見其父死於倭鋒 急往救之 則己無及矣 遂奪倭劒刺殺倭酋 隨父同死 嗚呼 蔡公三父子殉節之蹟 俱載於興德誌及湖南節義錄 而當時九十二士同盟錄及日記草本 尙在於本孫家 血痕班班 而二百餘年往蹟 宛若隔晨事矣 九十二節士之中 惟蔡公之族姪禹齡 以曾經縣監 特蒙宣武原從之勳 又蒙兵曺叅判之贈 而蔡公弘國三父子忠節 尙未蒙旌褒之典 則豈非有待而然耶 生等 不勝抑鬱 千里裹足 玆敢齊聲仰龥 伏乞特採蔡公三父子殉節之實蹟 啓達天陛之下 以爲襃揚之地 千萬無任祈懇之至.

    大宗伯閣下 處分

    癸酉二月 日

    古阜進士 崔允中 金 觀 金應泰

    扶安幼學 金隣相 許 絃 裵處章 閔興相 金

    興德幼學 白師徽 高漢平 柳彬賢

    長城進士 金宜休 邊相容 金得海 申廷模 邊鎭鐸

    全州幼學 宋文益 李鍾德 卓景孝

    泰仁幼學 李集鵬 宋益欽 李志又

    高敞幼學 羅世維 柳東植 柳英謨

    南原幼學 尹致孝 楊宗烈 崔興大

    淳昌進士 楊宗核 洪貴燮 薜景復

    金堤幼學 金樂喆 李集野 朱英宅

    務安幼學 蔡榮觀

    도내유장(道內儒狀) (1)


    전라도(全羅道)의 유생(儒生)이 삼가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태종백각하(太宗伯閣下)에게 글월을 올립니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국난(國難)에 임하여 의()에 죽는 것은 신자(臣子)의 원래의 절의(節義)이며, 충절(忠節)에 대하여 포장(襃獎)하는 것은 나라의 성대(盛大)한 전례(典禮)입니다.

    흥덕현(興德縣) 채씨(蔡氏) 가문(家門), 33 ()이 사절(死節)한 실적이 있는데, 아직 정려(旌閭)를 내려 포상(襃賞)하는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사림(士林)의 억울(抑鬱)함이 아니겠으며, 성세(聖世)의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임진년 왜구(倭寇)가 변란(變亂)을 일으키자, 흥덕현(興德縣) 채홍국(蔡弘國) 공은, 백의(白衣)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그 세 아들과 종족(宗族) 33 ()을 이끌고, 동지(同志)의 의사(義士) 고덕봉(高德鳳조익령(曺益齡이작(李綽배수의(裵守義김영년(金永年) 60여 명과 함께 흥덕(興德) 북면(北面) 남당(南塘)에서 만나, 단을 쌓고 군려(軍旅)를 모아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하였으니, 모두 92 명이었습니다.

    채공(蔡公)을 추대하여 의려장(義旅將)을 삼고, 제공(諸公)이 각각 소임(所任)을 정하였으며, 혹은 집에서 부리는 하인(下人)을 내고, 장정을 모집(募集)하니 군용이 엄숙하였습니다. 본현(本縣)의 원이었던 나척(羅惕) 공이 군량(軍糧)을 원조(援助)해 주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공이 장순(張巡허원(許遠)처럼 되라고 편지로 위로하고 면려(勉勵)하였습니다.

    의병소(義兵所)에 달려와서 모인 군사(軍士)가 거의 수천(數千)에 이르렀으며, 배풍(排風)의 전투(戰鬪), 장등(長嶝)의 포위(包圍)로 참()하고 사로잡은 것이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왜적을 추격(追擊)하여 부안(扶安) 상략치(上掠峙)에 이르렀을 때, 쌓인 시체(屍體)가 산과 같았으니, 후인(後人)들이 그 고지(高地)의 이름을 호벌치(胡伐峙)라고 부릅니다. 이로부터 이후(以後)로는 왜적의 배가 감히 근처에 정박(碇泊)하지 못하였고, 67 이웃 고을이 덕택으로 온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뒤 일이 알려져서, 채공(蔡公)은 군공(軍功)으로 특별히 첨동추(僉同樞)의 관직을 제수(除授)하였고 공의 아들 명달(命達)은 의곡(義穀)을 바다로 운송(運送)하여 가서 행재소(行在所)에 바쳤고, 둘째 경달(慶達)도 또 훈련원정(訓鍊院正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에 제수(除授)되었습니다.

    정유년의 변란(變亂)에 이르러,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여러 번 싸워 여러 번 승리하였는데, 갑자기 왜적이 크게 진출(進出)하여 백 여명의 의사(義士)가 모조리 왜적에게 살해(殺害)되었습니다.

    채홍국(蔡弘國) (), 홀로 두 아들과 함께 죽기로 항전하여,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나, 채공(蔡公)이 다만 맨손만이 남게 되고 이미 무예(武藝)를 사용할 방법이 없게 되자, 드디어 왜놈의 등을 껴안으니, 왜적은 검으로 자기 가슴을 찌르고 엎어졌는데, 칼날이 공의 몸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공의 두 아들이 바야흐로 왜적과 힘껏 싸우고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왜놈의 칼끝에 죽는 것을 보고, 급히 가서 구()하였으나 때가 이미 늦었습니다. 드디어 왜놈의 검()을 빼앗아 왜놈의 우두머리를 찔러 죽이고, 아버지를 따라서 죽었습니다.

    아아, 채공(蔡公) 삼부자(三父子)가 순절(殉節)한 자취는, 모두 흥덕지(興德誌)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실려 있으며, 당시 구십이사(九十二士)의 동맹록(同盟錄)과 일기초본(日記草本)이 아직도 본손(本孫) 집에 남아 있으며, 핏자국이 얼룩덜룩한데, 2백여 년 지난날의 자취가 완연(宛然)하게 어제의 일과 같습니다.

    92 절사(節士) 가운데, 오직 채공의 족질(族姪)인 우령(禹齡) 만이 전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하여 특별히 선무원종(宣武原從)의 녹훈(錄勳)을 받고, 또 병조참판(兵曺叅判)의 증직(贈職)을 받았으나, 채홍국 삼부자(三父子)의 충절(忠節)은 아직도 정포(旌褒)의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기다린 것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저희들은 억울(抑鬱)함을 이기지 못하여, 천리(千里) 길을 감발(발감개를 한 차림새)을 하고 와서 이에 감히 목소리를 가지런히 하여 우러러 호소(呼訴)하는 것이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채공(蔡公) 삼부자(三父子)의 순절(殉節)한 실적(實蹟)을 임금님께 계달(啓達)하시어 포양(襃揚)이 되도록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대종백각하(大宗伯閣下)의 처분

    계유년(癸酉年, 1813) 2월 일

    고부(古阜)의 진사 최윤중(崔允中) 김 관(金 觀) 김응태(金應泰)

    부안(扶安)의 유학 김인상(金隣相) 허 현(許 絃) 배처장(裵處章)

    민흥상(閔興相) 김 결(金 缺)

    흥덕(興德)의 유학 백사휘(白師徽) 고한평(高漢平) 류빈현(柳彬賢)

    장성(長城)의 진사 김의휴(金宜休) 변상용(邊相容) 김득해(金得海)

    신정모(申廷模) 변진탁(邊鎭鐸)

    전주(全州)의 유학 송문익(宋文益) 이종덕(李鍾德) 탁경효(卓景孝)

    태인(泰仁)의 유학 이집붕(李集鵬) 송익흠(宋益欽) 이지우(李志又)

    고창(高敞)의 유학 나세유(羅世維) 류동식(柳東植) 류영모(柳英謨)

    남원(南原)의 유학 윤치효(尹致孝) 양종렬(楊宗烈) 최흥대(崔興大)

    순창(淳昌)의 진사 양종핵(楊宗核) 홍귀섭(洪貴燮) 설경복(薜景復)

    김제(金堤)의 유학 김낙철(金樂喆) 이집야(李集野) 주영택(朱英宅)

    무안(務安)의 유학 채영관(蔡榮觀)


    道內儒狀(2)


    此狀上頭缺 錄 義兵所日記 及諸任分定錄 閱二百二十年 而其本秩 尙在於興德士人蔡膺纘 及古阜李集鵬·李奎玉 金堤金樂喆 咸平張墐 務安蔡榮觀家 而敗牋渝墨 完若隔晨事 其闡揚之道 惟在於按道大賢君子之薦聞與仍置之如何也 昔陶士行之忠節 而七百年之後始立祠 睢陽之壯節 得韓文公之立傳 而名益彰 今而 閤下杖節湖南 卽立傳之日也 羣枉之秋也 伏乞閤下務察情狀 以爲陳聞之地 無任屛營祈懇.

    癸酉二月 日

    興德幼學 高克慄 蔡膺徇 曺景明 李德成 高克恒 李聲春

    古阜幼學 李得浩 金膺泰 金膺喆 李奎玉 金致燮 金致安

    扶安幼學 裵處章 蔡泓德 尹 埴

    泰仁幼學 李集鵬 宋益欽 李集野

    長城幼學 金得海 申廷模

    金堤幼學 金樂喆 金守貞 李

    全州幼學 卓景孝 朱英宅

    務安幼學 蔡榮觀

    도내유장(道內儒狀) (2)


    이 유장(儒狀)의 머리 부분이 결락(缺落)되었다. [아아, 채공(蔡公) 삼부자(三父子)가 순절(殉節)한 자취는, 모두 흥덕지(興德誌)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실려 있으며,] 의병소일기(義兵所日記)와 여러 소임(所任)의 분정록(分定錄)220년이 지났는데도 그 본질(本秩)이 아직도 흥덕(興德)의 사인(士人) 채응찬(蔡膺纘)과 고부(古阜) 이집붕(李集鵬이규옥(李奎玉), 김제(金堤)의 김낙철(金樂喆), 함평(咸平)의 장근(張墐) 무안(務安)의 채영관(蔡榮觀)의 집에 남아 있으며, 찢어진 종이와 풀어진 먹이, 완전(完全)하여 마치 어제의 일과 같습니다.

    그것을 천양(闡揚)하는 도리(道理), 오직 도()를 안찰(按察)하시는 대현군자(大賢君子)께서 천거하여 위에 알리느냐, 계속해서 그대로 내버려 두느냐의 여하(如何)에 달려 있습니다.

    옛날 도사행(陶士行)의 충절(忠節)이 있었는데, 700년이 지난 뒤에 비로서 사당(祠堂)을 세웠으며, 휴양(睢陽)의 장절(壯節)이 한문공(韓文公)의 전기(傳記)를 얻어 이름이 더욱 빛났으니, 지금 () 합하(閤下)께서 호남(湖南)의 안절사(按節使)가 되셨으니, 바로 전기(傳記)를 세우는 날이며, 군왕(羣枉)의 가을입니다. ().

    엎드려 비옵건대, 합하(閤下)께서는 힘써 정상(情狀)을 살피시어, 위에 말씀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계유년(癸酉年, 1813) 2월 일

    흥덕(興德)의 유학 고극율(高克慄) 채응순(蔡膺徇) 조경명(曺景明)

    이덕성(李德成) 고극항(高克恒) 이성춘(李聲春)

    고부(古阜)의 유학 이득호(李得浩) 김응태(金膺泰) 김응철(金膺喆)

    이규옥(李奎玉) 김치섭(金致燮) 김치안(金致安)

    부안(扶安)의 유학 배처장(裵處章) 채홍덕(蔡泓德) 윤 식(尹 埴)

    태인(泰仁)의 유학 이집붕(李集鵬) 송익흠(宋益欽) 이집야(李集野)

    장성(長城)의 유학 김득해(金得海) 신정모(申廷模) ()

    김제(金堤)의 유학 김락철(金樂喆) 김수정(金守貞) ( )

    전주(全州)의 유학 탁경효(卓景孝) 주영택(朱英宅)

    무안(務安)의 유학 채영관(蔡榮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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