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메뉴
  • 역사자료실
  • 갤러리
  •   야수실기(野叟實記) 호벌치순절일기


    남당회맹단 의병대장 채홍국장군 야수실기를 차례대로 게시합니다.

     

     

    野 叟 實 記


    胡伐峙殉節日記 扶安地

     

    萬曆丁酉三月二十三日 黃得中 急告軍中曰 倭寇殺掠興德云. 卽日起軍 至興德 靈巖·海南義兵先來 共討之. 排風嶺 蔡弘祖 死.

    二十四日 又戰 李綽·承萬世·金榮 死.

    二十五日 倭寇散走. 八日 護軍.

    四月初四日 聞賊侵掠扶安 移軍蝟蟠洞 九日 堅壁不出. 賊曰 㤼矣. 扁邦.

    十四日 以錚進軍突擊 良久 金弼善 爲倭副將阿伊大所俘 傷胸以死. 後來一賊 割鼻而去. 曺益齡·崔彦深等相救赴之 已死矣. 蔡弘國·蔡禹齡 憤突急擊 賊不知其所措 東奔西走. (+) 呼泣拔劒逐捕二賊 剖肝嚙之 乃高德鳳·吳松壽·李蕃等 共捕也. 羅起寅 死 失其尸 從弟起宗招魂而去. 右日 十六員 死.

    十五日 賊屯于長磴 蔡弘國 發兵急擊

    十六日 蔡禹齡·李時華 死.

    十七日 李益盛 爲平義石之所害而死 子琳 斬賊復讎.

    十八日 林樞 爲倭僧舜岑所俘而死.

    十九日 吳夢瑞·金貴福 死.

    二十日 曺益齡 爲洛古伊介賊所俘 蔡弘國 以救逐賊 大呼掩擊冒白刃 與曺益齡同死.

    二十一日 蔡慶達· 林機死 鄭慢 爲樂古協 斷膂而死.

    二十二日 朴榮東·蔡瑺·崔有靑·金廷立 死.

    二十三日 蔡命達·田始春·林世茂 死. 其後日記 亂而不記. 胡伐峙 則扶安邊山上麓也 茁浦在其下 古稱上稤峙矣. 丁酉正月 義兵更倡 與靈巖·海南義軍共擊 殺倭甚多 始於排風之峴 終於此 凡二十三日也. 後人 名其地曰胡伐峙.

     

     

     

    호벌치 순절일기 부안 땅에서

     

    만력정유 223일 황득중(黃得中)이 급히 군중(軍中)에 알리며 말하기를,왜구(倭寇)가 흥덕(興德)에서 사람을 죽이고 약탈(掠奪)한다.고 하였다. 그날로 군사(軍士)를 일으켜 흥덕(興德)으로 가니, 영암(靈巖해남(海南)의 의병(義兵)이 먼저 와 있었다.그들과 함께 이를 토벌하였다. 배풍령(排風嶺)에서 채홍조(蔡弘祖)가 죽었다.

    24일 또 싸웠다. 이작(李綽승만세(承萬世김영(金榮)이 죽었다.

    25일 왜구(倭寇)가 흩어져 달아났다. 8일 동안 호군(犒軍)하였다.

    4월 초4일 왜적(倭賊)이 부안(扶安)을 침략(侵掠)한다는 말을 듣고, 군사(軍士)를 위반동(蝟蟠洞)으로 옮기고 9일 동안 성벽(城壁)을 단단히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왜적(倭賊)()이 났구나.라고 하였다. 편방(扁邦)().

    14일 쟁()을 쳐서 진군(進軍) 돌격(突擊)하였다. 한참 후에, 김필선(金弼善)이 왜()의 부장(副將) 아이대(阿伊大)의 포로(捕虜)가 되었는데, 가슴에 상처(傷處)를 입어 죽었다. 뒤에 한 왜적(倭賊)이 와서 코를 베어갔다. 조익령(曺益齡최언심(崔彦深) 등이 구하려고 갔으나 이미 죽은 뒤였다. 채홍국(蔡弘國채우령(蔡禹齡)이 분개(憤慨)하여 급히 돌격(突擊)하니 왜적(倭賊)은 어찌 할 바를 몰라 동분서주(東奔西走)하였다. 김헌()이 울면서 검()을 뽑아 쫓아가 두 왜적을 잡아 간()을 쪼개어 이것을 씹었다. 곧 고덕봉(高德鳳오송수(吳松壽이번(李蕃) 등이 함께 잡은 것이었다. 나기인(羅起寅)이 죽었는데 그 시신(屍身)을 잃어버렸다. 종제(從弟) 나기종(羅起宗)이 초혼(招魂)하여 갔다. 이날 열여섯의 인원(人員)이 죽었다.

    15일 왜적이 장등(長磴)에 주둔(駐屯)하였다. 채홍국(蔡弘國)이 군사(軍士)를 내어 급격(急擊)하였다. ().

    16일 채우령(蔡禹齡)과 이시화(李時華)가 죽었다.

    17일 이익성(李益盛)이 왜적 평의석(平義石)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아들 림()이 왜적을 죽여 복수(復讎)하였다.

    18일 임추(林樞)가 왜승(倭僧) 순잠(舜岑)에게 포로(捕虜)가 되어 죽었다.

    19일 오몽서(吳夢瑞)와 김귀복(金貴福)이 죽었다.

    20일 조익령(曺益齡)이 왜적 낙고이개(洛古伊介)의 포로가 되었는데 채홍국(蔡弘國)이 달려가 구()하고 왜적을 쫓았다. () 도리어 적이 반격하니 채홍국은 이놈들!”하고 크게 외쳐 부르짖으며 적이 뜻하지 못한 사이에 갑자기 덥쳐 싸우다가 적의 예리(銳利)한 칼날을 무릅쓰고 조익령(曺益齡)과 함께 장렬(壯烈)하게 죽었다.

    21일 채경달(蔡慶達)과 임기(林機)가 죽었다. 정만(鄭慢)은 낙고협(樂古協) 때문에 팔이 끊어져서 죽었다.

    22일 박영동(朴榮東채상(蔡瑺최유청(崔有靑김정립(金廷立)

    죽었다.

    23일 채명달(蔡命達전시춘(田始春임세무(林世茂)가 죽었다.

    그 뒤의 일기(日記)는 어지러워 기록하지 못하였다. 호벌치(胡伐峙)는 부안(扶安) 변산(邊山)의 상록(上麓)이니, 줄포(茁浦)가 그 아래 있다. 옛날의 호칭(呼稱)은 상수치(上稤峙)이다. 정유년 정월 의병(義兵)이 다시 일어나니, 영암(靈巖해남(海南)의 의군(義軍)과 함께 공격(攻擊)하여 왜적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배풍현(排風峴)에서 시작하여 여기서 끝났는데, 모두 23일 동안이었다. 후인(後人)이 왜적을 토벌하였다 하여 그 땅을 이름 지어 호벌치(胡伐峙)라고 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