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메뉴
  • 역사자료실
  • 갤러리
  •   야수실기(野叟實記) 야수선생채공실기서문(1)


    남당회맹단 채홍국장군의 야수실기(野叟實記)를 차례대로 게재합니다.


    野 叟 實 記


    野叟先生蔡公實記序 (1)

    昔在我穆陵壬辰之役 嶺湖間忠義敵愾之將 多出於文武食祿之臣. 朝廷 推薦君子 得輿賁餙中興一治師之長 人吉且无咎 殆若易易 而若布衣林下之士 內外絶援 雖有智出千人 千萬吾往之勇 其勢力之難 不其然乎. 吾於蔡先生 心心敬服焉 先生奮起韋布 忠信甲冑 仁義干櫓 鍛乃峙乃 一時數百義士 四方響應於會盟錄 可見一鼓轉戰 或前犯方來之鋒 或驅旣退之旗 興城之隣七八郡邑 賴以獲全. 先生之功果大多矣. 抑天意故不遇於大陣 回渡赤城江 保此一方生命耶 然百戰軍功 僅出於僉樞散班 當時幕下之士 雖若可恨 至於先生不伐之量 恒以濫恩自訟 萬一圖報之念 刻在輪囷之膽 幸値丁酉再猘 前盟尙不寒 馳檄募義 如馬伏波之馬革裹尸 祖士雅之中流 擊楫 斷以廓淸宇內 指日可計 不幸 當胡伐峙 天不佑我先生之三父子 及先生之族三十三人 幷同盟諸公九十義士 同地殉節 日月爭光 風雹縮氣 如其烈·如其烈 此與趙先生文烈公之錦山就義 雖道學地望有大小之殊 其得人之死力 從容全節 尙論者 以爲何如哉? 先生之身後事 如彼冷淡 故經三百年 頗寂寥無聞 九世孫泓覲 血誠慕先之久 値高宗朝壬申 賜祭文 命旌閭 上而蒙正卿之貤贈 下而成建院之公議 凡厥紆鬱之情 開雲霧·見靑天. 厥後 歲甲子 十一世孫東熯與其族祖京洌 協議宗族 鳩財設壇俎豆享 盖士論也. 而今 且十世孫秦永 以血誠囑士林刊實記 先生之詩文僅存者若干篇爲原篇 朝家闡揚之典 儒林公誦之章爲附錄 合成上下一秩. 編成之日 金永來·李鼎燮諸章甫 請永煥序其弁 永煥生也後 何敢當揶揄於先賢事蹟 竊念今年 則天褒之周甲也 今日之猖獗 百倍於壬丁 安能起先生於九原 毅然鳴大義於天下耶? 然則數盃後 讀丁酉義所書一遍 而不下淚者 無人心者也. 先生諱弘國 字光輔 野叟其號 爲平康世族云.

    壬申五月上澣 後學 前參奉 光山 金永煥 謹序

     

     

    야수선생 채공 실기 서문(1) (野叟先生蔡公實記序)

    전참봉 광산 김영환(金永煥)

     

    옛날 우리 선조대왕 임진년의 난리에 영남·호남 사이에서 충의(忠義)와 적개(敵愾)의 장수(將帥)가 문무(文武)로 녹()을 먹는 신하 가운데서 많이 나왔다.

    조정(朝廷)에서 군자(君子)를 추천(推薦)하여, 떠메어 중흥(中興)을 분희(賁餙)함에 한 군대를 잘 다스리는 사람을 얻어 길()하고 허물 없기가 아주 쉬울 것이지만, 벼슬이 없는 포의(布衣)로 산림(山林)에 사는 선비로서는, 안팎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비록 지혜(智慧)가 일천 사람에 뛰어나고 천만 사람이 막더라도 옳은 길을 가는 용기(勇氣)가 있더라도 그 세력(勢力)이 어려운 것은 당연(當然)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채선생(蔡先生)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경복(敬服)하는 것이니, 선생은 벼슬이 없는 선비의 몸으로 떨쳐 일어나시어 충신(忠信)으로 갑주(甲冑)를 삼으시고 인의(仁義)로 방패를 삼아, 자신을 단련(鍛鍊)하고 자신을 높이시니, 일시에 수 백 의사(義士)가 사방에서 회맹록(會盟錄)에 찬동하여 호응하였으니, 한 번 북 울려서 전전(轉戰)함을 볼 수 있었다. 혹은 앞으로 쳐들어오는 적의 예봉(銳鋒)을 범()하고, 혹은 물러가는 적의 깃발을 쫓아버리니, 흥성(興城, 興德의 별명)의 이웃 78 군읍(郡邑)이 그 덕택에 온전할 수가 있었다.

    선생의 공은 과연 크고 많으나, 원래 하늘의 뜻이, 굳이 큰 전진(戰陣)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적성강(赤城江)을 건너 돌아왔고 이 일방(一方)의 생명을 보존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백전(百戰)의 군공(軍功), 겨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라는 산반(散班)에서 나왔으니, 당시 막하(幕下)의 선비들이 비록 한()스럽게 생각한 것 같으나, 선생의 뽐내지 않는 도량(度量)으로는, 항상 함부로 임금의 은혜를 받는다고 자책(自責)하며, 만의 하나라도 갚고자하는 생각을 윤균(輪囷)한 간담(肝膽)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만나, 먼저 맹약(盟約)이 아직도 식지 않아,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義兵)을 모집하였으니, 마치 마복파(馬伏波)의 마혁과시(馬革裹尸)나 조사아(祖士雅)의 중류격즙(中流擊楫)과 같았으니, 단연(斷然)코 나라 안을 시원하게 청소(淸掃)할 것이 날짜를 꼽아 헤아릴 수 있을 것이었는데, 불행하게도 호벌치(胡伐峙) 언덕에 당하여 하늘이 우리 선생 삼부자(三父子)와 선생의 일족(一族) 33 명과 아울러 동맹한 제공(諸公) 90 의사(義士)를 돕지 아니하여, 같은 땅에서 순절(殉節, 戰死)하니, 해와 달과도 빛을 다투고, 바람과 우박(雨雹)도 기()를 움츠린다. 그 열렬(烈烈)함이여, 그 열렬함이여!

    이는 조선생(趙先生) 문열공(文烈公)의 금산취의(錦山就義)와 비교할 때, 비록 도학(道學)과 지망(地望)은 크고 작은 차이가 있으나, 그 사람의 사력(死力)을 얻어 종용(從容)하게 충절(忠節)을 다한 것에 대하여, 따지기 좋아하는 자들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의 일이 저처럼 냉담(冷淡)하기 때문에, 3백년을 지나오면서 매우 적료(寂寥, 쓸쓸함)하며 알려진 것이 없다.

    9세손 홍근(泓覲)은 피나는 정성으로 선조(先祖)를 사모(思慕)한 지 오래인데, 고종조(高宗朝) 임신년(壬申年, 1872)에 와서 제문(祭文)을 하사(下賜)하고 정려(旌閭)를 명하니, 위로는 정경(正卿)의 증직(贈職)을 받고 아래로는 서원(書院)을 세우자는 공의(公議)를 이룬 것이니, 모두 그 우울(紆鬱)한 마음이 운무(雲霧)가 개이고 푸른 하늘을 본 듯하였다.

    그 후, 갑자년(甲子年, 1924), 11세손 동한(東熯)과 그 족조(族祖) 경렬(京洌)이 일가들과 협의하여 자금을 모아 설단(設壇)하고 조두(俎豆, 에 제물을 담는 그릇. . 轉義하여 제사를 지낸다는 뜻으로도 쓴다.)의 제사를 지내니, 대개 사론(士論)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또 10세손 진영(秦永)이 피나는 정성으로 사림(士林)에게 위촉(委囑)하여 실기(實記)를 간행(刊行)하니, 선생의 시문(詩文) 가운데 겨우 남아있는 것 약간편(若干篇)을 원편(原篇)으로 하고, 나라에서 천양(闡揚)한 전례(典禮) 문건(文件)과 유림(儒林)에서 공적(公的)으로 칭송(稱誦)한 문장(文章)을 부록으로 하여, 합쳐서 상하(上下) 한 질()을 만들었다.

    편집(編輯)을 완성한 날, 김영래(金永來이정섭(李鼎燮)등 여러 선비들이 나 영환(永煥)에게 그 서문(序文)을 쓰라고 청하였다. 영환(永煥)은 늦게 태어났으니, 어찌 선현(先賢)의 사적(事蹟) 평가(評價)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금년은 바로 나라에서 포상(襃賞)이 있은 지 일주갑(一周甲, 60)이 되는 해인데, 오늘날 왜적(倭賊)의 창궐(猖獗)하기가 임진(壬辰) 정유(丁酉) 때보다 백배(百倍)나 더하다. 어찌하면 선생을 구원(九原, 저승)에서 일으켜 모셔 와서, 의연(毅然)하게 천하에 대의(大義)를 울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술을 몇 잔 마신 뒤에, 정유년 의소(義所)의 글을 한 번 읽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사람의 마음이 없는 자이다.

    선생의 휘는 홍국(弘國)이며 자는 광보(光輔)이며 야수(野叟)는 그 별호(別號)이니, 평강(平康)의 세족(世族)이시라고 한다.

    임신년(壬申年, 1932) 5월 상순에

    후학 전 참봉 광산 김영환(金永煥)이 삼가 서문을 쓰다.



    목록